#39
지나간 봄날
“OST요?”
뜬금없는 이해진의 제안에 김세준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아직 1집 앨범도 갈무리가 되지 않았는데 OST는 또 무슨 말인 걸까.
“지금 당장 하라는 건 아니야. 올해 여름에 방영될 BBS 드라마야. 그쪽에서 너를 좀 강하게 어필하네. 여름이면 너도 얼추 시간은 맞을 테고. 우리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했지.”
“흠...”
OST라.
사뭇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했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작업이기도 했다.
잘만 만들면 드라마의 재미와 감동을 배로 키울 힘도 있고, 어쩔 땐 유명 배우 출연보다 더 큰 파급력을 지닐 때도 있는 게 OST 아닌가.
자신의 노래가 드라마에 관여된다는 게 어떤 느낌일지 기대감이 생기기도 했다.
“무슨 드라만데요?”
“일단 장르는 사극. 그리고 제목이 뭐였더라? 아, 태조 이성계였다.”
“... 태조 이성계요?”
이해진의 입에서 예상외에 대작이 나오자 김세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조 이성계가 이때 나온 드라마였나?’
태조 이성계.
훗날 20년 뒤, 사극 매니아들에게 마지막 명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오랜만에 등장한 명품 정통 사극으로 수많은 시청자들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준 대작.
PPL을 비롯한 다양한 문제로 이 작품 이후로 대한민국 사극은 사장됐다고 봐도 무방했고, 태조 이성계가 마지막 명작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우리나라 사극에 화룡점정을 찍은 작품.
먼 미래에 사극 매니아들 사이에선 끊이지 않고 거론되는 사극 중 하나였다.
“좋네요. 꼭 하겠다고 전해주세요.”
김세준이 이해진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먼 미래에 두고두고 화자 대는 명작 OST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기회다.
걷어차 버리기엔 아쉬움이 컸다.
“상당히 긍정적이네. 알았어. 잘 이야기해줄게.”
이해진이 김세준의 열의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음악에 대해서 소극적이었던 적은 없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더욱 적극적이다.
‘태조 이성계. 나도 몇 번이나 정주행했지.’
위에서 말한 사극 매니아들.
김세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작품 OST를 작업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들떴다.
‘이렇게 하면 재밌겠는데.’
몇 번이나 정주행했던 드라마 덕분일까.
그의 머릿속에 태조 이성계 OST에 대한 소재와 구상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그래도 일단 OST는 접어두고...’
들뜬 머릿속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김세준이 이해진의 방문 밖으로 나왔다.
지금 당장은 OST보다 자신의 앨범에 집중해야 할 때.
오늘도 남은 시간은 연습실로 가 연습에 매진할 계획이었다.
연습실로 향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김세준이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어?’
그가 아레스 뮤직 사옥에서 처음 봤던 가수인 장준.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분위기가 사뭇 어두웠다.
죽상을 지으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의 모습이 한여름의 바람처럼 시원하던 첫 모습과 달라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천천히 다가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고, 장준이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얼굴이 더욱더 어두웠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우울해 보였다.
처음엔 왜 그런가 싶었지만, 김세준은 금세 원인을 떠올렸다.
‘힘들만 하지...’
작년 겨울에 발매했던 장준의 새 음반.
야심 차게 발매했던 그의 디지털 싱글 곡이 대차게 망해버렸으니까.
첫 음반에 이어 두 번째 음반도 망했으니 상실감에 푹 빠져 있을 만도 했다.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그것도 잠시 미래의 일을 알고 있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죽을 듯이 괴로워도, 앞으로 그의 미래는 탄탄대로였으니까.
그냥 작은 위로 한마디를 넌지시 건넬 뿐이었다.
“힘내세요. 장준씨.”
“아... 고마워요.”
그의 위로가 예상 밖이었을까?
장준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부끄럽네...’
장준은 김세준의 위로에 창피함을 느꼈다.
2번이나 실패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자 수치심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자신을 알아보던 그를 향해 팬이냐고 설레발을 쳤던 자신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다가 이불을 찰 일이다.
특히 지금 하늘과 땅처럼 벌어진 그와 자신과의 격차를 생각하면.
‘대가수가 될 사람도 몰라보고, 내 팬이냐고 묻기나 하고.’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그때 당시 자신을 알아본 김세준의 존재가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른다.
그 뒤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참담한 현실 덕분에 더욱 그러했다.
자신에게 팬이라는 존재를 처음 인식시켜준 사람이 김세준이었고, 그런 남자에게 알려야 할 일종의 예의라고 생각하며 장준이 입을 열었다.
“세준씨. 그때 고마웠어요. 제 팬이라고 해주신 거. 그리고 제 유일한 팬이어서 말씀드리는 건데, 저 이제 가수 그만하려고요.”
“...네?”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일까.
그의 화려한 미래를 알고 있는 김세준이기에 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마 현생에 치여 잠깐 고민하는 정도라고 여겼다.
하지만 심각하고 진지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자, 김세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게 쉽게 단정 지어도 될 문제일까?
모든 미래가 내가 알고 있는 대로 진행된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이예은도 자신 때문에 미래가 바뀌었는데, 장준이라고 해서 미래가 바뀌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엘리베이터가 도착을 알리는 신호를 냈음에도 김세준은 무시하곤 그에게 물었다.
“말 그대로예요. 회사하고 계약도 끝나가고, 2년 동안 했으면 충분하잖아요. 이 길은 제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심각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그의 모습은 하루 이틀 고민한 흔적이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뭐라고 말하는데요?”
“회사는 절 믿는다고 재계약하자는데... 사람이 양심이 있지 어떻게 그래요. 그것도 민폐일 거 같아서 그냥 그만두려고요.”
장준의 말에 김세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서는 당연히 붙잡아야지.’
무명과 무능은 동일하지 않다.
장준은 아직 무명일 뿐, 그의 실력은 대한민국 내로라하는 가수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건 그의 팬이었던 김세준이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캐스팅한 이해진도 김세준처럼 그의 실력엔 한 치의 의심도 없으리라.
다만 이 바닥에선 운이 필요한 게 사실이고, 장준에겐 아직 그 운이 찾아오지 않은 것뿐이다.
“가수 그만두려면 뭐 하시게요?”
김세준의 질문에 장준이 흠칫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뱉었다.
“그냥... 아버지가 작은 사업을 해서... 가업이나 이으려고요.”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그를 향해 김세준이 자기 생각을 내뱉었다.
“장준씨. 저는 장준씨가 진짜 재능있고, 실력 있는 가수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아직 포기하긴 이르지 않나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의 위로에 장준이 표정이 잠깐 밝아졌지만, 이내 살짝 고개를 저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네요. 뜬금없이 이런 말 해서 시간만 뺐었네요. 죄송해요. 저는 그럼 이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걸 에둘러 표현하는 그를 보며 김세준이 고민에 빠졌다.
그가 가수의 삶을 포기한다 한들, 김세준이 피해를 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의 노래를 좋아했고, 다시는 그 노래를 못 듣는단 생각이 드니 큰 아쉬움이 남았다.
‘무슨 방법이... 아!’
김세준이 장준을 바라보며 눈을 번뜩였다.
아버님이 사업을 하신다니 금전적으로 힘든 건 아닐 거다.
그가 지금 필요한 건 대중의 관심이다.
대중들의 무관심에서부터 오는 자존감의 하락.
그걸 해결해야 했다.
“장준씨. 제가 조만간 연락드릴게요. 그때 다시 한번 저랑 이야기해 봐요. 그리고 그때 가서 다시 고민해보는 건 어때요?.”
“네?”
엘리베이터의 탑승하는 장준을 향해 김세준이 급하게 말을 뱉었다.
“이런 말 하면 그렇지만 제가 지금 앨범 작업만 끝나면 장준씨 진짜 도와드릴게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고려해줘요. 팬으로서 부탁할게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며 김세준이 사라졌고, 장준이 멍한 표정으로 닫힌 엘리베이터를 바라봤다.
***
2월 초가 되자, 앨범 준비가 순조롭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세션 녹음까지 마쳤고, 이제 남은 건 보컬 녹음뿐.
녹음을 위해 김세준이 아레스 뮤직 녹음실로 향했고, 송대준이 그를 맞이했다.
“오셨어요?”
“네. 커피 드시죠?”
“아 먹긴 하는데, 오늘은 커피 마시면서 할 정도로 오래 걸리지 않을 거 같은데요?”
송대준의 말에 김세준이 슬며시 웃었다.
그를 간접적으로 칭찬하는 말이었다.
보통 며칠이곤 걸리는 녹음 작업.
하지만 김세준은 여태까지 녹음을 마무리하는데,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오늘은 또 몰라요. 제 곡이 아니니까.”
김세준이 이유 있는 엄살을 부렸다.
그동안의 녹음은 그의 자작곡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해진과 송대준이 만들어준 곡.
어쩌면 자신의 곡을 녹음할 때와는 다르게,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글쎄요. 제 생각엔 크게 안 다를 거 같은데.”
송대준이 커피를 마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작곡한 ‘지나간 봄날.’
제목부터 가사까지 김세준이 마무리했다.
‘고칠 구석이 없었지.’
제목부터 해서 가사까지 그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없었다.
그의 의도를 십분 이해했다는 방증이었고 하동준은 김세준이 오늘도 단숨에 녹음을 끝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김세준이 방긋 웃으며 녹음 부스로 들어갔고, 잠시 후 송대준이 노래를 틀었다.
청승맞은 휘파람 소리가 울렸고, 김세준이 순식간에 감정을 잡았다.
‘이 곡은 감정 잡기 너무 쉬웠지.’
중년 남성의 외로움을 표현한 곡.
자신도 뼈저리게 느껴본 감정이었다.
가정을 꾸리지 않았던 회귀하기 전 시절.
늦은 밤, 문득문득 썰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외로움에 술로 억지로 잠을 청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왜 가정을 꾸리지 않았을까 아쉬워도 하며, 친구 놈들의 귀여운 아들, 딸을 보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결혼했다고 외롭지 않은 건 아니지만.’
결혼한 몇몇 지인들은 자신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저 인생에서 오는 공허함.
그 공허함을 견딜 수 없던 비루한 인간군상이었다.
봄이 왔는데.
내 인생의 봄은 끝나버렸네.
꽃이 폈는데.
내 마음속 꽃들은 다 저물었네요.
김세준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졌고, 허심탄회하게 고백하는 듯한 그의 노래에 송대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거지.’
씁쓸한 독백 같은 노래.
그 누구에게도 뱉을 수 없던 마음속 아픔.
술기운을 빌려 혼잣말로 지껄이는 오래된 응어리.
자기가 생각했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김세준이었고, 송대준은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고민했다.
그의 예상대로, 오늘 녹음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