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38화 (38/148)

#38

OST

“맞네...”

이해진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송대준도 넋을 잃었다.

자신들이 한 곡을 만드느라 기진맥진하는 사이, 김세준은 자신들의 두 배의 작업량을 거뜬히 소화했다.

그것도 개인적인 스케줄까지 소화하면서.

자신들이 바쁘다 하더라도, 현재 유명 가수인 그보다 바쁠까.

“너 몸은 잘 챙기고 있는 거지?”

이해진이 우려를 표했고, 송대준도 옆에서 걱정 가득한 얼굴로 김세준을 쳐다봤다.

“네. 괜찮습니다. 잠이 조금 부족하지만, 원래 다 그런 거죠.”

김세준이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내젓고는, 주제를 다시 돌렸다.

“다음 노래 틀게요. 이 노래가 저와 예은이가 듀엣 할 곡으로 생각해둔 겁니다.”

걱정을 뒤로하고 일단 김세준이 만든 새로운 곡을 감상한다.

밝고 흥겨웠던 아까 노래하고는 전혀 다른 느낌.

인트로부터 시작되는 빗소리.

그리고 김세준 특유의 분위기인 애처롭고 서글픈 감성이 이어진다.

밝고 활기찬 느낌이었던 전 노래와는 상반되는 분위기.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거 같은 서정적인 느낌.

이해진의 고개가 자기도 모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좋네...’

이번에도 김세준은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번에 들었던 두 곡 모두 타이틀 곡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어떻습니까?”

“솔직히 둘 다 너무 좋아. 한 곡을 타이틀 곡에 이름을 못 올린다는 게 아쉬울 정도야.”

“동감입니다. 단순히 수록곡으로 남기엔 곡이 너무 좋은데요?”

송대준도 김세준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감사합니다.”

둘의 칭찬에 김세준 입가에 머쓱한 미소가 새겨졌다.

***

“오빠. 오늘 무슨 일 있어?”

“그러게?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모여 있지?”

평소에도 유동인구가 많은 코엑스지만, 오늘은 그 분위기가 남달랐다.

거대한 장소에 군집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

그 숫자가 얼핏 봐도 수백은 되어 보였다.

그리고 직원처럼 보이는 인원들이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오늘 무슨 사인회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야?”

“아. 그런가 보다. 우리도 구경할까?”

“그래. 근데 뭔가 좀 이상하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며 남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보통 사인회 하면 젊은 사람들이 많지 않나? 지금 봐봐. 대부분 중년층인데?”

“그러네. 사인회가 아닌가?”

그들의 말대로 거대한 광장을 채운 건 대부분 중년의 남성이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내들이 기대감을 물씬 풍기고 누군가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직원의 안내에 따라 한 남성이 그들 앞에 나타나자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김세준.

오늘은 그의 공개 사인회 날이었다.

***

“세준씨! 진짜 팬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인은 어디다 해드릴까요?”

“여 종이에다가 해주세요. 그리고 사진도. 사진도 가능하죠?”

“그럼요 형님!”

“형님?”

“30대 초 아니세요? 그럼 저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형님이죠.”

“흐허허허. 내가 그렇게 보여요?”

남자가 잇몸을 환히 드러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속내가 뻔히 보이는 김세준의 말.

그래도 자신이 동경하는 연예인과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고마워요. 내가 진짜 세준씨 덕분에 딸내미랑 화해했어요. 세준씨 아니었으면 진짜 평생 딸이랑 이야기 못 했을지도 몰라요.”

중년의 남성이 사진을 찍고 김세준의 손을 부여잡으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제가 형님 가정에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요.”

“어우. 진짜 큰 도움 됐어요. 아, 그리고 이거. 이거 받아요.”

남자가 들고 온 선물 하나를 김세준에게 건넸다.

곱게 포장된 상자.

포장만 봐도 예사 물건이 아닌 듯 귀해 보였다.

“아니, 뭘 이런 걸 챙기셨어요.”

“알아보니까 연예인들도 고달픈 직업이더라고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때 못 챙겨 먹고. 그래서 뭐 드릴 게 있을까 싶었는데, 마침 좋은 물건이 들어와서 드리는 거예요.”

남자의 말에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를 조심스럽게 받고, 이주성한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근데 뭐예요? 저게?”

남자가 고개를 내밀어 김세준의 옆에 조용히 속삭였다.

“산삼이요. 30년짜리 지리산 산삼.”

“쿨럭....”

“푸흡,”

조용히 속삭인다 했지만, 이주성의 귓가에도 들렸고 그가 재빨리 상자를 품에 껴안았다.

혹여 떨어트려 상하기라도 할까 봐.

“산...산삼이요?”

“네. 장뇌삼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삼이에요. 사람 손길 닿지 않은 진짜 삼.”

굳은 표정으로 내뱉는 그를 보며 김세준이 재빨리 시선을 이주성에게 돌렸다.

선물로 받기엔 너무 값진 물건이었다.

그의 시선을 단번에 눈치챈 이주성이 조심스럽게 상자를 다시 책상 위로 올렸고, 김세준이 그 상자를 남자에게 밀었다.

“형님. 이거 제가 받기엔 너무 과해요. 가서 형님 가족분들이랑 드시는 게 더 나을 거 같습니다.”

“무슨 말을! 그런 말 하지도 마요. 진짜 세준씨 덕분에 우리 가정이 화목해졌어요. 그거에 비하면 산삼은 가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가져요. 산삼 받고 더 좋은 곡 많이 내주시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거 먹은 날 저희 딸내미가 내려온 날입니다. 귀한 날 드세요.”

능글맞은 표정과 함께 남자가 다시 상자를 밀었고, 김세준이 고민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좋은 노래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남자가 환한 웃음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김세준이 다시 상자를 이주성에게 건넸다.

산삼이라.

사람들에겐 짐짓 허세를 부리긴 했지만, 피로가 쌓여가던 요즘이다.

그런 와중에 팬한테 받은 산삼은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역시 가수는 팬이 있어야 해.’

속으로 중얼거리며 미소지은 후, 김세준이 다시 활기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 자신과 만남을 기다리는 팬이 수십 명이나 있었다.

***

“쪼로록... 크으... 쓰다 써.”

사인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김세준이 팩에 담긴 녹용을 쪽 빨아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받은 선물.

산삼으로 그치지 않았다.

산삼뿐만 아니라 홍삼, 녹용, 영양제 등 각종 건강식품을 선물로 받은 그.

보편적으로 다른 세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건강에 관심이 많은 세대.

그런 그들이 팬인 만큼 김세준은 어마어마한 선물 공세를 받았다.

“주성아, 너도 이거 가져가.”

김세준이 홍삼 한 박스를 조수석으로 넘겼고, 이주성이 한 손을 핸들에서 때며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형님. 이거 형님 팬분들이 주신 건데, 어떻게 제가 먹습니까.”

“됐어. 네가 건강해야 나도 작업에 몰두하지.”

“저 건강합니다. 형님.”

“그러지 말고 가서 예은이랑 함께 먹어.”

이예은의 이름이 나오자 이주성이 주저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가수가 바쁘면 당연히 매니저도 바쁜 법.

내색은 안 하지만 이주성도 제법 많은 피로가 쌓여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 자신 혼자 이런 선물을 받고 입을 싹 닫는 건 너무 양심 없는 짓이었다.

김세준이 등받이에 기대며 시선을 산삼으로 돌렸다.

귀한 날 먹으라고 주신 삼.

근데 그런 귀한 날이 올까?

아직은 까마득해 보이는 그런 날이었다.

***

BBS 방송국 거대한 회의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피로에 찌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감독님. 이 작품 될까요?”

“되게 만들어야지.”

상석에 앉은 턱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남성이 눈을 빛냈다.

그들의 다음 작품.

BBS에서 창사 30주년을 기념하고 만드는 대작.

이 작품이 실패하면 그들의 인사고과도 형편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게 분명했다.

“강숙희 작가님은 집필 얼마나 끝났대?”

“이제 3편 정도 쓰셨나 봐요.”

“배우들은? 캐스팅 확정 난 거야?”

“그게... 아마 S급들은 힘들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뒷말을 흐리는 스텝의 말에 감독 김병서가 이마를 짚었다.

안다. 저 뒷말이 무슨 말인지.

배우들이 영화보다 기피하는 드라마.

그중에서도 촬영 환경이 최악에 가깝다는 사극.

찾는 곳이 수두룩한 S급 배우들이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건 쉽게 예상 가능했다.

“후우... 계속 두들겨봐.”

“네...”

김병서가 찌푸린 인상으로 한 남성에게 말을 돌렸다.

“준영아. 그 OST는? 어떻게 할 거야?”

음향 감독인 박준영이 김병서의 말에 재빨리 답했다.

“그. 김세준 어떠십니까?”

“응? 김세준?”

찌푸려져 있던 김병서의 미간이 박준영의 말에 슬며시 펴졌다.

내내 답답했던 회의.

그나마 괜찮은 답변이 들려왔다.

“네. 김세준이 국악기로 노래를 만들기도 하고, 요새 잘 나가잖아요. 저희 드라마 OST를 김세준이 맡는다고 하면 제법 홍보 효과도 있을 거고요.”

“흐음...”

김병서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계속해봐.”

“네. 그리고 김세준이 아직 신인 포지션이긴 한데, 노래는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건 추측이지만 김세준도 저희에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극 OST면 김세준도 자신의 장기를 잘 살릴 수 있으니까요.”

“좋네...”

김병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박준영의 말대로 김세준과 자신들의 조합은 훌륭해 보였다.

“좋아. 한 번 제의 넣어 봐.”

김병서의 승낙이 떨어지자 박준영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이거 예은이가 작사한 거라고?”

“네.”

김세준이 내민 종이를 보며 이해진이 혀를 내둘렀다.

“와... 너도 그렇지만 예은이 얘도 특이하네. 이거 20대가 녹일 감성이 아닌데. 내가 알기론 연애 경험도 없다고 들었는데. 대단한데?”

이해진의 감탄을 뱉은 이유.

이예은이 작사한 가사 때문이었다.

‘믿는 판단이 옳았지.’

이예은의 가사.

그의 멜로디와 찰떡궁합이다.

아련한 커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잘 풀어낸 곡.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지켜왔던 하나의 가치.

‘눈치채고 있었나 보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가치지만 이예은은 짐작하고 있었던 거 같았다.

그의 노랫말.

오로지 한글로만 지어진 것들이었다.

영어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마음속 간직하고 있던 작은 아집.

자신의 노래에는 영어로 가사를 쓰지 않겠다는 그 고집을 이예은이 알아차리고 한글로만 가사를 적어왔다.

“곡이랑도 잘 어울리는 거 같고. 좋은데?”

이해진의 옆에 있던 하동준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찬성. 예은이가 센스가 있네. 아 그리고.”

하동준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너 산삼 받았다며?”

“... 그건 어디서 또 들으셨습니까?”

“다 들을 수 있지. 뭘 그리 질색하는 표정이야? 설마 달라고 할까 봐?”

“아닙니다. 설마요.”

김세준의 말에 하동준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의 등을 쳤다.

“됐어. 줘도 안 먹어. 지금 그거 먹을 사람은 너야. 아끼지 말고 팍팍 먹어. 안 그래도 너 많이 피곤해 보였다.”

“어떻게 먹을까 고민 중입니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은 둘의 분위기를 깬 건 이해진이었다.

이해진이 다리를 꼬며 그에게 말을 던졌다.

“세준아. 너 OST 한번 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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