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봄비
금수강산(錦繡江山).
비단으로 수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우리나라 자연을 일컫는 말이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우리나라의 자연.
그 자연에 빠져 조선 시대엔 자연을 예찬하는 풍조인 강호가도(江湖歌道)가 유행했을 정도였다.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던 게 한민족인데.
내가 자연을 논하지 않는다고?
지하에 계신 우륵 선생님이 눈물을 쏟아내실 거다.
“좋아, 그럼 그렇게 진행해보고, 그러면 곡은? 4곡 다 준비할 수 있겠어?”
이해진의 물음에 김세준이 고개를 저었다.
“4곡을 다 준비하는 건 무리일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혹시 사장님이 한 곡 만들어주시면 안 됩니까?”
“내가?”
김세준의 제안이 의외였는지 이해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지금까지 모든 곡을 스스로 만들던 그였으니까.
“네. 사장님이 곡을 주시면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내뱉는 그의 말에 이해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한 번 해볼게. 봄이라... 재미는 있겠네.”
이해진의 눈빛에 강한 흥미가 생겼다.
지금까지 모두가 실패했던 1위 탈환.
자신이 한 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그리고 대준씨. 대준씨도 혹시 곡 하나 만들어줄 수 있어요?”
“네? 저도요?”
“네. 저는 곡 2개에만 집중하려고요.”
송대준의 얼굴이 묘하게 상기됐다.
자신에게 부탁한다는 건, 자신의 실력을 믿는다는 뜻이니까.
‘송대준이면 괜찮은 실력자지.’
음원 차트 1위를 차지한 ‘연꽃’을 작곡한 프로듀서다.
그 실력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네. 한 번 해볼게요.”
송대준의 대답에 김세준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제 그가 맡아야 할 곡은 2곡.
물론 절반으로 줄었음에도 시간이 촉박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나하고 대준이 곡은 당연히 수록곡일 거고. 타이틀 곡은 네가 만들게?”
이해진의 질문에 김세준이 겸연쩍게 웃었다.
“타이틀이야 좋은 곡이 타이틀이 되는 거 아닙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이해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고, 김세준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마음엔 어떤 곡이 타이틀 곡이 될지 확고히 정해져 있었으니까.
“옛날에 말했던 것처럼 타이틀 곡은 예은이랑 듀엣으로 정한 거야?”
이해진의 말에 김세준이 난감한 듯 뺨을 긁적였다.
“사실,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타이틀곡으로 정해둔 게 듀엣보단 솔로가 낫겠더라고요.”
“흐음. 그럼 예은이는 빼고?”
“아뇨. 다른 한 곡은 예은이랑 듀엣으로 해보려고요.”
“괜찮네.”
고개를 끄덕이는 이해진과 다르게 하동준의 표정은 곤혹스러워 보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김세준이 묻자 하동준이 별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 아냐. 예은이가 어디서 주워들었나 봐. 다음 네 앨범 타이틀 곡 같이 듀엣 하는 걸 알고 있더라고. 그래서 엄청나게 연습에 매진 중인데 얘가 실망할까 봐 조금 걱정되네. 뭐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니까.”
“흐음...”
이해진은 신음을 흘렸고, 김세준은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제가 회의 끝나고 잘 이야기해볼게요.”
“그래. 연습실에 있을 거야.”
***
향후 일정을 대략 정리한 회의가 끝나고, 김세준은 연습실로 향했다.
‘실망했겠지.’
타이틀 곡에서 단순한 수록곡으로.
가수라면 단연코 아쉬운 마음이 크리라.
멘탈이 개복치 급인 이예은이면 얼마나 더 아쉬워할지.
김세준이 살짝 긴장되는 마음으로 연습실에 들어섰고, 이예은의 노래가 귓가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크으. 녹는다. 녹아.’
자신처럼 허스키한 보이스.
하지만 여성 특유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잔뜩 가미되어 있어, 부드러운 느낌도 물씬 풍긴다.
“아, 안녕하세요.”
김세준의 존재를 눈치챈 이예은이 노래를 멈추고, 몸을 돌려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네. 오빠도 잘 지내셨죠?”
이예은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고, 김세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뭐라고 말해야 상처를 덜 받을까.
고민을 해봐도 나오지 않았고, 그의 경험상 이럴 땐 애매하게 둘러대는 것보다 직설적으로 뱉는 게 더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 예은아.”
“네. 오빠.”
“사실 내 앨범 있잖아. 네가 타이틀 곡에 함께 못할 거 같아.”
“역시... 제가 감히 어떻게 오빠 노래에 참여하겠어요...”
‘응?’
큰 오해를 하는 듯한 그녀의 말을 들은 김세준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 앨범에 참여를 안 하는 건 아니야. 타이틀 곡 말고 수록 곡 중에 네가 참여할 거거든.”
“...진짜요?”
김세준의 말에 이예은이 고개를 살짝 들어 물었다.
“응. 진짜로.”
그의 말에 이예은이 작게 미소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아요...”
“타이틀 곡 아니어도 괜찮아?”
생각보다 별 탈 없는 그녀의 반응에 김세준이 재차 확인했지만, 그녀의 대답은 똑같았다.
“네. 그냥 오빠 곡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괜한 걱정이었나.’
“오히려 오빠는 괜찮아요? 제가 들어가는 거?”
김세준이 한시름 놓을 때, 이예은이 역으로 물었다.
뭔가 불안한 듯한 그녀의 표정.
멘탈이 약한 그녀인 만큼 괜한 불안감을 가진 모양이었다.
자신이 무리해서 그녀를 도와주는 건 아닐까 하는.
“예은이 네가 버스킹할 때부터 듀엣 해보고 싶었어.”
“...!”
김세준의 말이 진한 감동이었는지 이예은의 눈가가 그렁그렁해졌다.
“고마워요...”
“고맙긴. 나중에 예은이 너 잘되면 나도 듀엣으로 불러줘.”
“제가요?”
“응. 너도 나중엔 곡 만들어서 앨범 내고 그럴 거 아니야.”
“아, 당연히 그럴게요. 오빠가 원하면 언제든지.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요.”
먼 미래의 일이자 감히 꿈꿔볼 수도 없는 일.
김세준의 말을 장난으로 여겼는지 이예은이 피식 웃었다.
그런 이예은을 보며 김세준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예은의 곡.
탐나는 곡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회귀하기 전부터 듀엣으로 불러보고 싶은 곡이 얼마나 많았는데.
예은아. 나중에 말 바꾸면 안 돼.
인생은 낙장불입이야.
***
김세준의 이번 앨범에 들어갈 곡은 총 네 곡.
그중에서 2곡을 이해진과 송대준이 맡기로 했으니 그가 작업해야 할 곡은 총 2곡이다.
자신이 생각해둔 타이틀 곡과 이예은과의 듀엣곡.
“일단 타이틀 곡의 주제는 꽃놀이.”
봄이라면 빠질 수 없는 주제.
꽃놀이.
예로부터 조상들도 즐겼던 행사다.
“국악으로 즐겨보는 꽃놀이. 진짜 선비들의 풍류다.”
김세준이 흐뭇한 미소와 함께 씨베이스(Cbase)를 켰다.
이미 어느 정도 구상은 해놓은 상태다.
인트로(Intro)에 어떤 소리가 들어갈지, 메인 멜로디와 코드까지도.
가상 악기 툴(Tool)을 이용하여 자신이 생각했던 악기들을 집어넣는다.
“흠...”
스피커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간략한 가이드를 들으며 김세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찮은 거 같은데...”
나쁘지 않지만 무언가 아쉬운 느낌.
김세준이 머리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건, 집 근처 편의점이었다.
오늘도 밤을 꼴딱 세어야 할 느낌이었다.
***
일주일 후.
“진짜 이럴 땐 무명이 좋았어...”
김세준의 앓는 소리에 이주성이 피식 웃었다.
요즘 한참 작곡에 빠진 그.
하지만 김세준의 일과는 작곡에 열중할 수 있을 정도로 한가롭지 않았다.
한국문화 진흥원.
그들과의 계약으로 인해 광고 촬영을 나온 그였고, 한참 열중하던 그는 여기 올 때까지도 아쉬운 티를 팍팍 냈었으니까.
“고생했네.”
김세준을 향해 홍성원이 다가와 노고를 위로했고, 김세준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번 방송 반응이 너무 좋았어. 다들 난리였다네. 덕분에 나도 요즘 살맛이 나.”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하는 홍성원이 이내 김세준을 향해 뒷말을 이었다.
“혹시 내가 도울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게. 내 힘이 닿는 대로 도와줄 테니까.”
“아, 감사합니다.”
홍성원이 이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사라졌고, 김세준은 홍성원의 말을 되씹었다.
그의 도움.
지금 당장은 필요 없을지 몰라도 나중엔 그의 힘이 도움 될 때가 있으리라.
홍성원이 멀어지고, 김세준이 고개를 돌려 이주성을 바라봤다.
“주성아.”
“네. 형님.”
“요새 예은이는 어때?”
“아, 사실 저도 얼굴을 못 본 지가 오래돼서... 집에도 잘 안 들어오고 연습실에서 사는 거 같습니다.”
“음.”
이주성의 걱정 가득한 말.
김세준이 예상했다는 듯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USB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이거 예은이 갖다줘. 메신저로 보내려고 했는데, 너도 요즘 바쁘잖아. 이 핑계로 얼굴 한 번 보고 와.”
“네? 이게 뭡니까?”
김세준의 말에 이주성이 진한 감동을 받았고, 동시에 의문을 가졌다.
“나하고 예은이 듀엣 할 곡. 완성된 건 아니고, 가이드만 잡힌 거지만 연습에 도움이 될 거야. 감정선 잡는 것도 편할 거고.”
무덤덤하게 뱉는 그였지만 이주성은 어이가 없었다.
몸이 2개라도 되는 걸까?
자신이 듣기론 타이틀 곡도 완성이 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 곡은 또 언제 만든 건가 싶었다.
“왜?”
“형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피곤한 듯 하품을 길게 내뱉는 그를 보며 이주성이 우려를 표했고, 김세준이 피식 웃었다.
“연예인이 피곤하다는 건 좋은 거잖아.”
피곤하고 싶어도, 관심이 없기에 피곤할 수 없는 이들이 수두룩한 곳이 이곳 아닌가.
그런 와중에 피곤을 느끼는 자신의 현 상황이 김세준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가자. 오늘은 스케줄 더 없는 거지?”
“네. 형님.”
김세준이 목을 돌리며 발걸음을 차로 향했고, 이주성이 그의 뒷모습을 따랐다.
***
이예은은 이주성이 건네준 USB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김세준이 건네줬다는 USB.
그녀가 이번에 김세준과 함께 듀엣 할 곡의 가이드라고 했다.
‘어떤 곡일까...’
비록 가이드지만 그녀가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뿜는 첫 곡.
섬섬옥수 같은 고운 손으로 USB를 컴퓨터와 연결하고, 안에 들어 있는 파일을 확인했다.
‘봄비.’
두 글자가 적힌 파일 하나.
두근대는 마음으로 파일을 틀었고, 이내 재생되는 음악.
가늘게 내리는 빗소리로 시작되는 인트로.
그리고 김세준의 시그니처인 가야금이 천천히 울린다.
‘와...’
비 소리와 어우러지는 가야금의 선율에 이예은이 입이 살며시 벌어졌고, 탄성이 흘러나온다.
봄비 내리는 어느 날, 작은 정자에서 가야금을 뜯는 듯한 기분이다.
처마를 두들기는 비의 소리와 그 소리에 맞춰 가야금을 연주하는 듯한 느낌.
머릿속으로 저절로 이미지가 그려졌다.
‘자연의 소리...’
이어서 거문고가 합류하고 대금이 그 뒤를 받친다.
‘천재란 이런 거구나...’
귀를 포근히 감싸는 선율의 조화에 이예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동시에 드는 의문.
“이게 타이틀 곡이 아니라고?”
자신이 듣기엔 타이틀 곡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하지만 김세준은 이 곡을 타이틀 곡이 아닌 단순한 수록곡으로 지정했다.
이예은의 눈빛에 강한 기대심이 서렸다.
단순한 수록곡이 이 정도라면...
타이틀 곡은 얼마나 아름다운 곡일지,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