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35화 (35/148)

#35

새해

12월 31일.

새해가 밝기 하루 전, 김세준은 정말 오랜만에 본가를 찾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찾아뵙지 못했던 부모님.

아무리 그래도 일 년에 하루 정도는 찾아 뵈어야지, 안 그러면 어머니 성격상 서울로 직접 행차하실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모님의 집에 도착한 시간은 땅거미 져 하늘 어둑해질 때쯤이었다.

차에서 내린 김세준이 기지개를 피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

하지만 서울처럼 텁텁하지 않은 상쾌한 공기가 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랜만에 맡는 상쾌한 공기와 냄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소나무가 제일 먼저 눈에 띄고, 잘 정돈된 잔디밭과 자갈들.

그것들을 지나쳐 문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어이구. 공사다망한 아들내미가 웬일로 집을 다 왔어? 얼굴 보려면 우리가 콘서트장까지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

“하하... 죄송합니다. 내년엔 좀 더 자주 올게요. 엄마.”

“부모인 게 죄지. 얼른 들어와. 안 그래도 밥 다 됐다.”

어머니인 박진숙의 살가운 인사를 들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그의 아버지인 김창용이 거실에서 난을 정리하고 있었다.

“왔구나.”

“네. 아버지.”

“그래. 자주 좀 들려라. 네 엄마 성화에 내가 못산다.”

“당신.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죠. 당신이 저한테 닦달한 게 얼만데. 맨날 세준이한테 전화해서 내려오라고 이야기 좀 하라고 그렇게 난리를 쳤으면서.”

박진숙의 이실직고에 김창용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난을 다듬었다.

부모님의 모습에 김세준이 코끝을 찡그렸다.

‘아레스 뮤직 콘서트’가 불과 몇 달 전.

그때 자신의 집에서 같이 자고 다음 날 내려가셨던 두 분이다.

그런데도 좀 더 자신을 자주 보고 싶어 하는 부모님의 마음에 부응하지 못한 자신이 죄스러웠다.

“얼른 와요. 밥 다 됐어요.”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박진숙이 둘을 불렀고, 김세준과 김창용은 식탁으로 다가갔다.

“엄마... 이거 언제 다 먹어요?”

밥상 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호화로운 식탁이었다.

육해공이 총출동한 식탁은 군침이 돌 지경이었지만, 어마어마한 양에 무서움도 동시에 엄습했다.

“연예인들은 살 뺀다고 밥도 제대로 못 챙긴다며. 이럴 때라도 잘 먹어야지.”

“전 굳이 그런 건 안 해도 되는데. 어찌 됐든 잘 먹겠습니다.”

박진숙의 사랑이 가득 담긴 음식은 입에 넣는 순간, 녹아 없어질 정도로 뛰어났다.

“그래서 내년 계획은 뭐 할 생각이야?”

박진숙이 불고기 하나를 집어 들며 물었고, 그 눈빛엔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혹시. 뭐 심청가 같은 거 한 곡 더 낼 생각 없니? 아빠 말고 혹시 엄마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던 지.”

“크크크.”

박진숙의 말엔 김창용에 대한 시샘이 가득했고, 김창용의 어깨가 한없이 올라가 있었다.

그의 어깨가 서슬 퍼런 박진숙의 눈빛에 금세 수그러들긴 했지만.

“어머니의 사랑도 좋죠.”

“그래! 막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이야기. 노래로 만들면 얼마나 좋아! 응? 우리나라 지폐에도 들어간 인물인데.”

진심 가득한 박진숙의 말이었지만 김세준이 고개를 저었다.

“내년에 앨범 작업 들어갈 건데, 이미 앨범 구상은 끝난 상태에요. 그 노래는 다음에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볼게요.”

박진숙이 말한 컨셉.

김세준이 생각하기에도 괜찮았다. 위인들의 이야기를 한 번 노래로 만들어보는 것도 썩 즐거운 작업이 될 거 같았다.

“그래? 내년 앨범 컨셉은 뭔데?”

아쉽긴 하지만, 자신이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일.

박진숙이 체념하며 물었고, 김세준이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아직 비밀. 나중에 들어봐요.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요. 그나저나 두 분은 요즘 별일 없죠?”

김세준의 질문에 둘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 생겼다.

“별일 없기는 요새 네 사인좀 받아달라고 주변에서 성화다. 있다가 사인 한 50장만 부탁하마.”

“나도 50장.”

김창용과 박진숙.

잘 키운 아들 하나. 딸 열이 필요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가수 중 하나.

주변에서 그의 아들인 걸 알고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 중이었다.

뿌듯해 보이는 둘의 얼굴에 김세준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해드려야죠.”

“그래. 그 뭐야 대승이 알지? 걔가 무려 다섯 장이나 부탁했다.”

“... 대승이 아저씨가요?”

전혀 의외의 인물이 김창용의 입에서 나오자 김세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대승. 김창용의 친구로 김세준이 삼촌이라 부르는 인물이었다.

‘허. 대승이 아저씨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아버지인 김창용과 마찬가지로 국악에서 제법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

하지만 자신들과 다르게 꽉 막힌 구석이 있는 인물이었다.

국악이야말로 한국의 노래라며 국수주의적 성격을 짙게 가지던 사람이었는데.

회귀하기 전, 자신에게 아버지만큼 큰 기대를 하고 있던 사람이 박대승이었다.

그런 만큼 자신을 증오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래. 대승이가 아주 너를 깜찍하게 여기더라. 그 뭐야 일본 놈들 앞에서 공연한 거 보고 아주 자지러지던데. 왜놈들한테 한국의 얼을 알려줬다고.”

“전 대승이 아저씨가 절 싫어할 줄 알았어요.”

“싫어하기는. 오히려 좋아해. 요새 너 때문에 국악 배우려 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고.”

‘아...’

자신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효과.

그를 보며 가야금의 매력을 깨우친 아이들.

그 아이들이 국악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씨앗이 될 거라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했다.

“혹여 국악계에서 너를 안 좋게 보고 그럴 거란 생각이었으면 접어둬라. 다들 널 자랑스럽게 여기니까.”

김창용의 따뜻한 한마디.

김세준이 지고 있던 거대한 마음의 짐이 사르르 풀리는 순간이었다.

***

가족들과 함께 재야에 종소리를 듣고, 이틀 후 김세준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뭐 그리 급히 가냐는 어머니의 한풀이가 있었지만, 지체할 수 없었다.

오늘은 첫 앨범에 대한 회의가 있을 예정이었으니까.

들뜬 마음을 가진 채 사옥으로 향했고 회의실에 들어서자 익숙한 세 남자가 그를 반겼다.

이해진과 하동준. 그리고 송대준.

이해진과 하동준과 반갑게 새해 인사를 나누고 송대준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네요.”

“네. 잘 지내셨죠? 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송대준.

옛날에 사소한 트러블이 있었지만, 자신의 도움 뒤로 잘 지내는 중이다.

그가 자신을 은인처럼 여기는 게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송대준이 여기 있다는 건... 송대준이 이번 내 앨범 프로듀서라는 건가?’

뭐, 나쁘지 않다.

송대준이면 실력도 괜찮고, 자신에게 마음의 부담도 있으니 최선을 다해주겠지.

“다 왔으니까 그럼 시작해볼까. 일단 세준아. 이번 앨범 정규로 갈래? EP로 갈래? 네가 원하는 대로 맞춰줄게.”

정규앨범과 EP 앨범.

흔히 1집, 2집이라 불리며 그 가수의 활동량을 보여주는 징표로도 사용되는 앨범.

최소 8곡 이상은 들어가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다.

반면 EP 앨범은 미니앨범이라고도 불리며 정규앨범보단 적은 4곡에서 5곡 정도가 들어가는 게 보편적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긴 했지만, 이해진은 김세준이라면 당연히 정규앨범을 원하리라고 생각했다.

김세준의 곡 욕심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추론.

하지만 김세준은 그의 예상관 상반된 답을 꺼냈다.

“전 이번에 먼저 EP를 하고 싶습니다.”

“응? 진짜로?”

하동준도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고, 이해진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정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처음엔 그랬는데, 시간을 생각하면 EP가 맞을 거 같습니다.”

그가 생각한 곡의 컨셉.

정규하고 안 맞는다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최소 그가 원하는 시간 내에 정규앨범을 내긴 불가능했고, 자신의 이번 앨범 컨셉은 타이밍을 놓쳐선 안 됐다.

‘그리고 정규앨범으로도 생각한 컨셉이 있고.’

정규앨범은 나중에 제작하면 된다. 지금은 시간이 중요할 때였다.

“흠. 네 생각이 그렇다면 우리도 반대는 안 해. 원래 정규 내기 전에 EP를 내는 게 좀 더 보편적이기도 하고. 근데 시간이 중요하단 건 무슨 말이야?”

하동준의 질문에 김세준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이번 앨범 봄에 내고 싶습니다.”

유독 봄을 강조해서 내뱉는 김세준.

“봄?”

“네. 벚꽃이 만개했을 때.”

“너 설마?”

“세준씨. 그건 아니에요...”

김세준의 생각을 읽었는지 하동준과 송대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봄.

가수들의 지옥.

어떤 곡을 내도 1위는 불가능한 계절.

수많은 가수가 도전했지만, 좌절을 겪고 눈물을 삼켰다.

이해진이 깍지를 끼며 김세준을 바라봤다.

“일단 세준이 네 생각을 확실하게 듣고 싶네. 5월에 내고 싶다는 이유가 봄 때문이라는 거지? 계절을 노리겠다?”

“네. 맞습니다.”

새로운 계절이 다가오면 그 계절에 맞는 곡들이 쏟아진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팡팡 터지는 노래.

가을에는 쓸쓸하고 외로움이 터지는 노래.

겨울에는 자신의 곡을 꺾고 1위를 탈환한 크리스마스를 노린 노래처럼.

그리고 봄.

몇 년 전에 나온 대박 히트곡.

한 평론가는 그 곡을 이렇게 칭했다.

먼 훗날, 환경오염으로 봄이 사라진다면, 내 자식에게 봄은 이런 느낌이었다고 들려주고 싶은 곡.

“알고 있지? 그거 엄청난 도전이라는 거.”

“네 알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대답한 김세준이 이어서 말을 뱉었다.

“원래는 곡 컨셉을 사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감성을 실려 준비하려 했어요. 근데 그렇게 하기보단 그냥 봄에 집중해서 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았습니다.”

“왜 굳이 봄이야. 왜 굳이 계절이고. 물론 네가 만들면 좋은 곡이 나오겠지만 솔직히 그 곡은 대한민국에서 앞으로 10년은 더 화자 될 곡이야.”

하동준의 말에 김세준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10년은 무슨.

20년 뒤에도 봄만 되면 연금 타가던데요.

사람들이 좀비보다 더하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지.

하동준과 송대준이 난감함을 표시할 때. 이해진은 고뇌에 빠졌다.

분명 김세준의 제안은 큰 도전이다.

‘하지만 들어보고 싶단 말이지...’

가야금을 비롯한 국악으로 연주하는 봄의 감성.

어떤 느낌일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던 김세준의 역량.

한 번 도전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잘 할 수 있겠어?”

이해진의 물음에 김세준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 물론입니다. 아직 곡은 만들어둔 게 없지만.”

“4달 남짓이라. 시간이 촉박한데. 이번 앨범 타이밍 못 맞추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네. 어떻게든 완성하겠습니다.”

확신에 찬 김세준의 대답.

“좋아. 한 번 해봐. 이번 세준이 곡 컨셉 봄으로 간다.”

이해진의 말에 김세준이 책상 아래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나도 연금 한 번 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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