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25화 (25/148)

#25

공감

9월 18일. 강유나와 김세준의 음반 발표 날.

핸드폰을 바라보자, 쓴웃음이 나왔다.

음원 차트 꼭대기에 굳건히 적힌 이름.

1위. 임태현&루나- 너의 모든 것.

일주일 먼저 발매한 임태현의 곡은 단숨에 1위를 차지했다.

발표한 지 삼 일만에 1위를 차지한 그들의 노래.

견고한 철옹성처럼 굳건히 그 자리를 유지 중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강유나의 곡.

엄지손가락으로 차트를 쓰윽 내리자 제목이 보였다.

12위. 강유나&김세준- 심청가.

나쁘지 않은 초반 행보다.

개인적으론 만족스러웠다.

연꽃에 비해 훨씬 순조로운 출발이니까.

다만 강유나의 얼굴이 떠오르자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강유나는 지금 순위에 만족 못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

“이번엔 기필코 한다.”

김세준이 주먹을 말아쥐며 굳게 다짐했다.

자신의 첫 곡 ‘연꽃’.

그 곡으론 이루지 못했던 목표.

이번엔 무조건 이루리라 마음먹었다.

***

음반 발매를 시작한 주 금요일.

김세준은 ‘심청가’의 첫 음악방송을 위해 SBC방송국을 찾았다.

여의도에 있는 방송센터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무대 대기실 복도.

그곳에 도착한 김세준은 정신이 아찔했다.

‘여기가 천국일까...’

아이돌 진성 삼촌 팬이던 그의 혼을 쏙 빼놓게 만드는 아이돌의 향연.

휘익.

고개를 한 번 오른쪽으로 돌리고.

휘익.

다시 왼쪽으로 돌려도.

아이돌로 가득찬 대기실 복도.

김세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콘서트는 수두룩하게 다녔어도, 싸인회 같은 건 단 한 번도 간 적 없는 그였다.

정확히 말하면 당첨된 적이 없는 거지만.

당연히 이렇게 코앞에서 아이돌을 볼 기회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샤인걸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이번에 노래 진짜 너무 좋아요! 팬이에요!”

그뿐인가.

몇몇은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웃는 낯으로 팬이라고 칭한다.

김세준의 광대가 승천할 기세다.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오빠. 왜 그렇게 멍청하게 웃고 있어요?”

김세준이 행복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을 때, 강유나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약간의 물기가 남아 있는 손이 화장실에서 나온 듯했다.

“어? 유나야.”

강유나가 복도에 나타나자 가수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됐다.

질투와 시샘.

동경과 존경.

가지각색의 감정이 담긴 그들의 눈빛.

‘여기서도 독보적인 클라스.’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모인 이곳에서도 그녀의 위치는 공공연했다.

감히 넘 볼 수 없을 탑클래스.

“오늘 방송 잘 할 자신 있죠?”

싱긋 웃으며 말하는 그녀였고, 김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첫방인데.”

김세준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강유나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생각보다 침울해하진 않네.’

금요일이 된 지금.

그들의 곡 순위는 8위.

약간의 상승은 있지만, 임태현하고의 거리는 제법 멀었다.

의아한 듯한 김세준을 보며 강유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그러더니 깨달은 게 있는지 짧은 탄성을 뱉었다.

“아! 설마 내가 1등 못했다고 우울해하는 줄 알았어요?”

핵심을 찌르는 그녀의 말에 김세준이 움찔했다.

“오빠. 우리 아직 곡 발표한 지 일주일도 안 지났어요. 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죠.”

강유나가 살짝 미소지었고, 김세준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에 생각보다 그녀는 약하지 않았다.

“하아암... 저 먼저 대기실로 들어갈게요. 잠을 못 잤더니 조금 피곤해서요.”

강유나가 긴 하품을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이내 대기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김세준도 발걸음을 돌렸다.

자신의 대기실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그때.

그의 눈에 차가운 미소를 짓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따갑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으니까.

‘임태현...’

“안녕하세요. 김세준입니다.”

비록 훗날엔 범죄자가 되지만, 지금은 선배 가수다.

김세준이 먼저 그에게 인사했고, 임태현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초면이죠?”

부드러운 목소리.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이 인간은 축복받았다는 걸.

그리고 코앞에서 바라본 그의 얼굴.

김세준의 인상이 티내지 않게 찌푸려졌다.

‘빌어먹게도 잘생겼네.’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저런 충만한 재능을 가지고도, 스스로 자멸한 그에게.

하지만 동시에 강한 동정도 느꼈다.

결국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니까.

“네. 초면입니다. 죄송하지만, 무대를 준비해야 돼서...”

김세준이 감정을 숨긴 채 무뚝뚝한 말투로 답했다.

같은 공간에 있어서 좋을 게 없었다.

“그래요.”

임태현이 작게 웃었고, 김세준이 그를 지나쳐 지나가려 할 때.

임태현이 얼굴을 들이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근데,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선배님.”

굳이 듣고싶진 않지만, 거절하는 것도 어색했다.

김세준의 대답에 그가 시종일관 웃던 얼굴을 지웠다.

“독특한 컨셉으로 밀고 나가는 거, 적당히 해요, 꼴 보기 싫으니까. 실력 없다는 거 티내지 말고. 그런 실력으로 가수 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요? 가야금 조금 할 줄 안다고, 잘난척하지 말라고.”

“...!”

말투 하나하나에 적의가 가득했다.

‘뭔데 갑자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비난.

임태현의 감정을 알 리 없던 김세준이 순간 벙찐 표정을 지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말을 들어야 할까.

놀란 눈으로 그를 바로바자, 임태현의 얼굴엔 비웃음 가득했다.

‘하... 어이가 없네.’

뜬금없는 그의 독설에 김세준이 속으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명백한 도발.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 있지만.

송대준 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젊은 사람의 치기 어린 시샘을 웃어넘길 수 있는 연륜이 있지만.

남자라면 유치한 면도 어느 정도 있는 법이니까.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며 김세준이 임태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잠깐만요.”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재수 없는 웃음이 가득한 얼굴.

그 얼굴을 보며 김세준이 차갑게 웃었다.

딱 한 마디를 곁들이면서.

“자수하세요. 태현씨.”

“...!”

비웃음 가득하던 임태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그게 무슨 뜻이지?”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 그.

“늦지 않았어요. 자수하세요. 형량이라도 낮춰야죠.”

싱긋 웃으며 말하는 김세준.

웃음이 곁들어져 있지만, 확신에 찬 말투다.

임태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

그런 임태현을 보며 김세준이 고개를 숙인 뒤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임태현은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아가리라.

그의 약점.

절대로 가볍게 볼 수 있는 범죄가 아니었다.

마약사범.

그것도 대중죄인 마약유통범이기도 한 임태현이었다.

***

“오빠.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무대 뒤편.

다음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대기하던 강유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딘가 불편해보이는 듯한 그의 표정.

“응? 아니. 아무 일 없었어.”

김세준이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살짝 웃었다.

기분이 썩 편치 않았다.

임태현의 마지막 표정.

산산이 부서진 그의 얼굴.

누군가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것.

그것도 상대방의 모든 걸 무너트릴 수 있는 약점.

썩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그를 보며 강유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나씨! 세준씨! 무대 들어갈게요!”

스텝의 말에 둘이 발걸음을 옮겼다.

고운 한복을 입고 넓은 무대로 올라갔다.

김세준은 측면에 배치된 가야금 앞으로 가 앉았고, 강유나는 무대 중앙으로 향했다.

살짝 고개를 돌려 김세준을 바라보는 그녀.

김세준이 그녀의 시선에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유나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이내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시작은 강유나의 파트.

그 파트에 맞춰 김세준이 가야금을 뜯었다.

부드럽고, 잔잔한 멜로디.

산조대금과 태평소의 음색.

거기에 김세준이 연주하는 가야금의 선율이 합쳐졌고, 순식간에 다채로운 음색으로 무대가 채워졌다.

국악의 소리.

그 소리를 강유나가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로 덮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당신이 떠오르죠.

당신은 눈을 감아도 저를 떠올리지 못하시겠죠.

더듬거리며 제 얼굴을 어루만지던 당신의 손길이

너무 따뜻하여 하염없이 눈물 흘렸죠.

‘크으. 음색 좋고.’

난생처음 남의 목소리를 위해 뜯어주는 가야금.

하지만 이런 목소리라면 뜯어줄 가치가 충분했다.

자신을 낼 수 없는 청아한 목소리와 부드럽고 유려한 가야금 선율.

실로 찰떡궁합이 따로 없다.

‘가야금 뜯는 맛 나네.’

악기 전공자들이 왜 밴드를 구성하는지 이해되는 기분이다.

만족스러운 기분을 한껏 느끼며, 김세준이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이번엔 그의 차례였다.

볼 수 없어도 마음으로 보았고.

알 수 없어도 느낄 수 있었는데.

빛이 없어도 난 너를 알아봤는데.

빛이 있어도 넌 나를 모르는구나.

그렇다면 빛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탁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때리며 울려 퍼졌다.

절규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맞춰 강유나가 고개를 돌려, 아련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마치 진짜 아비를 보는 듯한 그녀의 얼굴.

김세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갔다.

당신의 딸이라서 행복했어요.

네가 내 딸인 게 행복이었다.

못난 아비라 항상 미안했었다.

당신의 사랑은 항상 충분했죠.

이제 제가 당신의 빛이 될게요.

너는 이미 나만의 빛이었단다.

서로를 마주 본 채 부르는 노래.

번갈아 가며 부르는 둘의 표정은 애틋함을 넘어서 절절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무대를 구경하던 가수들.

그 가수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자 가수들 사이에서.

“야! 울지마! 화장 지워지잖아... 크흥...”

한 걸그륩 리더로 보이는 여성의 말.

하지만 다른 여성들은 여전히 훌쩍거렸다.

“씨이... 아빠 생각나잖아...”

“아... 왜 저딴 노래 부르고 난린데...”

어린 나이에 사회에 달려든 그녀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고개를 위로 쳐들고 어떻게든 눈물을 안 쏟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들이었고.

그런 행동은 다른 여자 가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이를 가리지 않고, 코를 찡긋거리며 어떻게든 울음을 참으려고 하는 그녀들.

“아. 진짜... 노래라도 못 부르던가... 감정전달력이 쓸데없이 좋아서... 히잉...”

칭찬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는 말.

울음바다가 되어가는 대기실이었다.

***

김세준과 강유나의 무대.

방송에 나가자마자 엄청난 파급력을 불러일으켰다.

실시간 검색어를 순식간에 점령했고, 인터넷은 그들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반응 좋고.”

그런 인터넷을 보며 김세준이 콧소리를 흥얼거렸다.

제법 만족스러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한 번 탄력받은 인터넷의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큰 파도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요의 큰 관심이 없었던 40, 50대 가장들.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그들이 ‘심청가’의 존재를 눈치채기 시작했다.

-듣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한동안 대화 없던 딸과 오랜만에 대화했습니다.

-제 딸은 세 살인데... 그런 딸아이의 죽음을 생각하니 눈물만 나오더군요.

그들의 공감을 깊이 산 노래.

잠잠했던 음원 차트가 무섭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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