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고전
김세준이 미튜브에서 발견한 건 그가 구독한 채널에서 만든 특별한 음악 영상이었다.
영상은 수채화로 그려진 여인만 있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 뱃머리 앞에 서 있는 한 여자였다.
“편곡 괜찮네...”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김세준이 미소를 띠었다.
국악기로 편곡한 노래.
원곡은 일본의 대중가요라는 걸 댓글이 알려줬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또 다른 댓글.
영상과 음악에 조화로 인해 한 캐릭터가 떠오른다는 댓글이었고, 그 댓글을 본 김세준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졌다.
***
“고전이요...?”
“응. 고전.”
고전.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대부분 듣고 자란 스토리다.
김세준이 한 번 침을 꿀꺽 삼킨 뒤 재차 말을 뱉었다.
“심청가 어때요?”
“심청가라고?”
강유나와 차태규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동시에 되묻는 둘의 얼굴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역시.’
그런 그들의 관심에 김세준의 입가가 곡선을 그리며 말아 올라갔다.
“심청이와 심봉사의 이야기. 그 둘의 이야기를 컨셉으로 잡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심청이, 오빠가 심봉사로 듀엣을 하자는 말이네요?”
강유나가 눈빛을 반짝이며 되물었고, 차태규 또한 삐딱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새롭긴 한데?”
입맛을 다시며 차태규가 머릿속으로 그동안 강유나의 곡을 떠올렸다.
강유나가 발표했던 수많은 곡.
그 곡 중에서도 이런 컨셉을 가진 노래는 없었다.
‘게다가 폭넓은 팬층을 확보할 수도 있겠어.’
강유나의 주요 팬층은 20대와 30대.
아쉽게도 40대 이후의 삼촌 팬들 사이에선 비교적 화력이 약한 그녀다.
하지만 이런 노래라면 삼촌 팬들 사이에서도 제법 통할법 했다.
자녀를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노래였으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강유나도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심청이라. 매력적인 캐릭터네요?”
“수백 년 동안 사랑받은 캐릭터니까. 고전이 사랑받은 이유가 있는 법이지.”
“게다가 대중들에게 이만큼 친숙한 캐릭터도 없고요.”
“그렇지!”
강유나의 말에 김세준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이미 많은 대중에게 사랑받고, 다양한 매체로 퍼져나가고 있는 이야기다.
“판소리는 물론, 오페라나 뮤지컬로도 제작된 캐릭터야. 가요로도 만들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그렇죠!”
강유나도 김세준을 따라 손가락을 마주치고,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강유나는 가요를 부르며 다양한 여인을 연기했다.
비련하고 비탄에 빠질 때도 있었고, 풋풋한 학생이 될 때도 있었다.
우울한 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여인에서, 그 누구보다 빛나는 스타의 삶까지.
하지만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소녀가 되어본 적은 없었다.
“전 좋아요. 재밌을 거 같아요!”
강유나가 활짝 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최태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컨셉 자체는 찬성. 근데 심청가면 내용이 방대해. 그걸 4분짜리 노래로 다 풀 수 있겠어? 판소리도 몇 시간을 부르는데.”
차태규의 의문은 그럴듯했고, 김세준은 이미 적절한 답안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기승전결로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익숙한 이야기인 만큼, 심청가에 한 장면만 보여줘도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겁니다.”
“오호...”
차태규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감탄을 내뱉었다.
‘맞는 말이야. 제목을 심청가로 정해놓고, 한 장면만 들려줘도 사람들은 쉽게 감정이입 하겠지.’
“생각해둔 게 있나?”
막힘없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뱉는 김세준.
그런 김세준을 바라보는 차태규의 시선이 어느새 호의적으로 변했다.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처음과 달리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김세준이 속으로 웃곤 답했다.
“아무래도 그 장면이 제일 인상 깊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장면?”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이죠. 유나가 인당수에 빠지기 직전 심청이, 저는 그런 심청이를 보며 한탄하는 심봉사. 괜찮지 않습니까?”
“좋네. 좋아.”
“좋네요...”
김세준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는 둘이었다.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그림이 그려진다.
그리고 동시에 차태규는 한 가지 의문점이 더 떠올랐다.
“잠깐만. 근데 세준씨를 폄훼하는 건 아니지만, 가능하겠어? 딸을 잃게 만드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부르는 거? 나도 자식이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자식이 자신을 대신해 죽는 걸 바라보는 심정, 이거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닌데.”
심봉사의 감정.
고작 이제 스무 살 중반인 남자가 이해하기엔 벅찬 감정이었다.
‘내 딸이 나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해 보자... 와이씨...’
차태규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상상도 하기 싫은 감정.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고 찢어지는 듯했다.
아니 어디 그뿐인가. 삶이 지옥이 되겠지.
강유나도 차태규의 말을 듣곤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김세준을 바라봤다.
심청이를 불러야 하는 자신의 감정도 쉽진 않겠지만, 김세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오빠, 가능하겠어요?”
굳은 얼굴로 묻는 강유나.
제법 진지해진 둘을 보며 김세준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 할 자신 있습니다.”
***
김세준과의 회의가 끝나고, 그가 떠나자 강유나와 차태규는 사무실에 남아 이야기를 나눴다.
“세상에서 제일 잘 할 자신이 있다라... 근자감인가?”
“진짜 자신 있나 보죠. 근데 이제 사장님 제안은 안 되는 거 아시죠?”
반신반의하는 차태규에 비해 강유나는 김세준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이어서 그를 놀리듯 뒷말을 길게 끌었다.
그런 강유나의 말에 차태규의 얼굴이 찌푸려지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피쳐링은 포기. 듀엣으로 가. 곡의 컨셉으로 봤을 때 피쳐링은 무리니까.”
“그니까 진작에 듀엣으로 갔으면 지각할 일도 없고 좋았잖아요.”
“임태현이면 몰라도, 신인이 너랑 듀엣하면 효운 그룹에서 무조건 말 나온다. 피쳐링 정도가 적당했다고.”
듀엣과 피쳐링.
얼핏 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단어지만 실상은 달랐다.
듀엣은 같이 만들어나가는 노래라면, 피쳐링은 보조자의 개념에 가깝다.
당연히 피쳐링이 아닌 듀엣이라면 강유나의 비중이 줄어들 게 확실했고, 자신의 회사를 인수한 효운그룹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임태현이라면 그들도 이해했겠지만, 김세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음반이 흥하긴 했지만, 강유나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런 가수 때문에 강유나의 비중을 줄인다?
벌써 효운 그룹 임원진의 무수한 욕설이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다.
그들을 설득하는 건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물론 그들이 자신처럼 이해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를 일.
“후우. 또 말씨름하러 가야겠군.”
차태규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난감을 표했고, 강유나가 그를 물끄러미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도 같이 가요. 도와드릴게요.”
“오. 진짜로? 평소엔 그런 장소 가기 싫다고 그렇게 말하더니. 이번엔 왜?”
차태규가 강유나의 말에 반색했다.
그녀가 동행한다면 그들을 설득하는 일도 한결 쉬워질 게 분명하니까.
그의 말에 강유나가 웃으며 답했다.
“이번 곡. 진짜 재밌을 거 같거든요. 어떻게든 허락받아야죠.”
***
가야금 명인이던 김세준에게 ‘심청가’는 매우 익숙한 매체다.
가야금을 뜯으며 판소리의 한 대목을 따다가 부르는 가야금 병창.
가야금 명인이던 김세준도 자주 선보였던 공연이었다.
심청가 중 ‘심봉사 황성 가는 대목’은 가야금 병창에서도 손꼽히는 대목이었고, 김세준도 자주 부르던 창(唱)이다.
“즉, 이미 수없이 많이 심봉사가 되어봤다는 뜻이지.”
아레스 뮤직 연습실에서 자신의 가야금을 어루만지며 김세준이 미소지었다.
그가 강유나와 최태규에게 주저 없이 자신 있다고 말할 수 있던 근거였다.
자식 잃었던 심봉사의 심정을 수두룩하게 연기해봤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공연을 본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까지 안겨줬던 경험이 있다.
“감정은 문제없어. 오히려 문제는 곡...”
이번 곡은 엄밀히 따지자면 자신의 곡이 아니다.
강유나의 곡에 자신이 듀엣으로 참가하는 것.
곡의 개입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먼저 나서는 것도 모양새가 이쁘지 않다.
“잘 만들겠지. 강유나인데...”
약간의 우려.
하지만 강유나라는 걸출한 가수를 믿기에 김세준은 자신의 우려를 내려놓은 채, 연습에 빠져들었다.
***
강남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유명 술집.
수십 개에 방 가운데서도 가장 커다랗고, VIP들만 들어올 수 있는 방에서 젊은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뭐라고요? 다시 한번 말해봐요.”
양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오른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채 묻는 남자의 말에, 건너편에 앉아 있던 뚱뚱한 남자가 재빨리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 키엔 측에서 결국 거절했어.”
‘정확히는 강유나가 거절한 거라고 봐야겠지만.’
뒷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저 자존심 덩어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히 예상되니까.
“왜 거절했대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되묻는 그의 말에 스타인 엔터테인먼트 사장 박영호의 심장이 쫄깃해졌다.
그의 팬들은 저 얼굴도 퇴폐적이라고 깍깍거리겠지만, 자신은 안다.
남자 솔로 가수 중에서 독보적인 인기와 팬층을 가진 임태현.
지금 그가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는 걸.
“그게... 아무래도 이번 곡의 컨셉이...”
“한잔 받아요. 사장님.”
임태현이 박영호의 말을 자르면서 술을 건넸고, 박영호가 슬쩍 자신의 술잔을 쳐다봤다.
이미 양주가 가득 담겨 있는 자신의 술잔.
망설임 없이 박영호가 술을 단숨에 털어 넘기고, 술잔을 내밀었다.
“그럴 수 있죠. 그럴 수 있는데...”
임태현이 술을 따라주며 고개를 내밀었고.
그가 따라주는 술이 잔을 넘쳐 흐르며 박영호의 손을 적셨다.
“그동안 사장님은 뭐했어요?”
“....!”
비릿한 미소와 함께 묻는 말에 박영호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진짜. 이 새끼가...’
술잔을 내민 박영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음 같아선 저 시건방진 애송이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제기랄.’
하지만 안다.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걸.
임태현은 그의 회사에 속한 단순한 가수가 아니었으니까.
임태현의 뒤를 봐주고 있는 어마어마한 스폰서들.
그들의 입김 한 번으로도 자신의 회사는 태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휘청거리겠지.
“미안해. 태현아. 내가 이번 일은 너무 안일하게 했다. 다음부턴 안 그럴게. 내 스타일 알잖아?”
푹 숙였던 고개를 들곤, 박영호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그런 박영호의 모습에 임태현이 피식 웃더니 따르던 술을 거두고, 휴지를 뽑아 양손으로 박영호의 손을 닦았다.
“그러니까. 사장님. 제가 사장님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시잖아요? 왜 자꾸 저를 실망하게 만드세요?”
아까와 달리 싱긋 웃으며 자신의 손을 닦는 임태현을 보며 박영호는 그의 손과 휴지 한 장을 두고 맞댄 자신의 손에 두드러기가 나는 착각이 들었다.
‘이 싸이코패스 새끼.’
“자. 자. 한 잔 마셔요. 다음부터는 그렇지 않기에요?”
그의 말과 동시에 비어지는 술잔.
단숨에 술잔을 털어 넣은 뒤 임태현이 안주로 나온 과일을 씹어먹으며 물었다.
“근데, 그럼 강유나는 이번에 솔로로 나간다는 거에요?”
‘아... 제기랄.’
그의 질문에 박영호의 표정이 다시금 굳어졌다.
“그...그게 다른 가수랑 듀엣을 하는 거 같은데?”
순간 임태현의 온몸이 굳은 것처럼 멈췄다.
“하아... 나는 거절하고, 다른 가수랑 듀엣을 한다?”
어이가 없다는 듯 내뱉는 그를 보며 박영호의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누군데요?”
“어? 아, 김세준이라고. 그 아레스 뮤직에 있는 가수 있어. 그... 올해 초에 데뷔한 신인...”
쨍그랑!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임태현이 들고 있던 술잔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이 바닥을 수놓았고, 임태현의 싸늘한 목소리가 박영호의 귓가에 울렸다.
“하. 날 거절하고 신인이랑 한다? 누군지 알아봐요. 얼마나 잘난 놈인지 그 면상 한 번 궁금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