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18화 (18/148)

#18

이예은

강유나와의 만난 다음 날.

김세준은 이해진을 찾아가 자신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알렸다.

“유나랑 다시 듀엣을 하고 싶다?”

“네. 말을 번복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을까요?”

조심스러운 김세준의 표정에 이해진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지. 당장 무슨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말이야 충분히 바뀔 수 있지. 근데 갑자기 왜 생각을 바꾼 거야?”

“유나가 그러더라고요. 급하게 가지 말라고.”

‘오호.’

비록 한 마디 말이지만 이해진은 그 말의 뜻을 깊이 이해했다.

자신 또한 김세준에게 하고 싶었던 조언.

‘나도 욕심이 생겼지.’

김세준의 재능을 알기에 스스로도 욕심을 부렸다.

어쩌면 김세준은 조금 서둘러도 될지 모른다고.

‘유나도 보통은 아니야.’

귀여움넘치는 후배.

하지만 여간내기가 아닌 강유나를 떠올리며 이해진이 방긋 웃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우리도 찬성이야. 한 번 말했지만 난 이번 기회가 너한테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그러면...”

김세준이 눈을 반짝였고, 이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키엔측이라 이야기를 해봐야겠지만 일단 추진하는 걸로 알고 있어.”

“감사합니다!”

“뭘.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리고... 슬슬 연꽃은 활동 중단하고.”

“아...”

김세준이 아쉬운 마음에 탄식을 내뱉었다.

현재 ‘연꽃’의 순위는 9위.

10위권 안까지 안착한 자신의 첫 데뷔곡.

데뷔곡인 만큼 많은 애착이 생겼지만, 김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연꽃’을 발표한 지 4개월.

이미 대중들에게 크게 낙인 찍힌 노래다.

굳이 활동을 안 해도 당분간 ‘연꽃’이 순위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으리라.

다만 결국엔 음악 차트 1위를 찍어보지 못했다는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아쉬워?”

그런 김세준의 속마음을 짐작한 듯 이해진이 살짝 웃었다.

김세준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켜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좀 아쉽네요. 1등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욕심 날 만한 행보였지. 근데 지금 너한테 더 중요한 건 대중들한테 너라는 가수를 인식시켰다는 점. 그게 중요한 거야.”

이해진이 그를 위로하듯 어깨를 두들겼다.

“너처럼 개성 넘치는 애들은 한 번 대중들이 인식하면 쉽게 잊지 않아. 그러니까 유나가 했던 말처럼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오히려 신인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발군에 활약이었으니까. 아직 이르지만, 만약 유나랑 듀엣까지 잘 되면... 신인상도 꿈은 아니다.”

“...!”

연말에 다양한 가요제가 있지만, 가수에게 시상하는 곳은 딱 한 곳이다.

한국음악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가며 아시아 국가 간에 문화 교류의 장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시상식.

아시안 K-POP 어워드.

그 규모답게 매년 엄청난 공연 스케일을 보이며 개최지도 한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서울, 마카오.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 등 해외에서도 개최되는 대규모 시상식.

그런 곳에 자신이 올라설 수 있다는 생각에 김세준의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상상만 해도 소름 돋지?”

“네. 엄청날 거 같은데요.”

대학 축제에서 공연하는 것도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곳에서 공연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가히 상상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쉬움은 미뤄두고 앞으로의 일에 집중해. 신인상을 타려면 유나하고 듀엣도 연꽃만큼 성공해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아쉬웠던 감정도 잠시, 김세준은 온몸에 활력이 도는 듯했다.

“그래. 일단 키엔이랑도 스케줄을 맞춰봐야 하니까. 당분간은 좀 쉬어. 쉬라고 해도 한 2주? 그 정도밖에 안 되겠지만.”

“네? 2주나요?”

김세준의 맥빠진 목소리에 이해진이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쉴 수 있을 때 잘 쉬어둬. 유나랑 듀엣 들어가게 되면 쉬고 싶어도 못 쉴 테니까. 미리 하고 싶은 거 다 해두고. 그때 가선 하고 싶어도 못해.”

“흐음... 네. 알겠습니다.”

이해진의 충고에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밖으로 나왔다.

쉴 때 쉬어라...

근데 뭐하면서 쉬지?

***

“아... 심심하다.”

자신의 집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김세준이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휴식.

회귀하고 난 뒤로 바쁘게 달려오긴 했다.

아레스 뮤직에 입사하고, 곡을 만들고, 데뷔하고, 방송에 나가고, 공연을 다니기까지.

“하아. 아직도 일주일이나 남았네.”

일주일 동안은 제법 나긋하게 쉬며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었다.

하지만 아직도 일주일이나 빈둥거려야 된다는 생각에 김세준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세준은 전생에서도 쉼 없이 달려나가는 인생이었다.

누군가 떠밀어서가 아닌 그가 좋아서 달려나갔던 길.

가야금을 뜯는 게 업이자 취미인 그였다.

“아, 버스킹이나 구경 갈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금요일.

금요일 밤이니만큼, 많은 버스킹이 열리겠지.

“그리고 이예은도 다시 볼 수 있겠고.”

자신을 덕질의 세계로 인도했던 그녀.

오랜만에 그녀의 모습을 볼 생각을 하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결심을 마친 김세준이 바깥으로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

5월은 저녁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기분 좋은 날씨였다.

덕분에 많은 이들이 길거리고 쏟아져 나왔고, 김세준 또한 버킷햇(벙거지모자)를 푹 눌러쓴 채 바깥으로 나왔다.

그동안의 활동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위장은 필수였다.

‘번거롭지만, 지금처럼 내가 연예인이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도 드물지.’

피식 웃곤 김세준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처음 회귀했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네.”

그때도 지금처럼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10월이었다.

벌써 회귀한 지가 7개월이나 지났다는 사실에 김세준은 자신이 쉼 없이 달려왔다고 느꼈다.

“이쯤이었지?”

그가 이예은의 무대를 발견한 곳.

그리고 이곳에서 단숨에 자신의 귀를 사로잡으며, 자신을 아레스 뮤직에 입사하게 만든 계기를 만들어준 곡.

그 곡을 들었던 자리가 이쯤이다.

하지만 그때처럼 이예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김세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오디션 프로그램이 방영할 때가 아닌데... 장소를 바꿨나?”

기대했던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김세준이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주변을 서성이며 다른 버스킹을 구경할 때, 한 여성이 키보드를 낑낑거리며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예은!’

자신의 절반만 한 키보드를 간신히 들며 자리에 도착하자, 긴 숨을 내뱉으며 이마에 땀을 닦는 그녀.

그가 찾던 이예은이었다.

그녀가 자리를 잡자 김세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그녀의 앞에 재빨리 자리 잡았다.

검은색 긴 머리에, 쌍꺼풀 없이 긴 눈.

누군가는 그녀의 눈을 보고 동양의 미라고 칭송했었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나도 저 눈에 홀렸지...’

무대에서 공연하면 매력적인 눈웃음을 짓던 그녀의 모습에 김세준은 단숨에 그녀의 팬이 됐었다.

그리고 그동안 그녀에게 반한 사람이 김세준뿐만은 아닌지, 제법 많은 이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무대를 기다렸다.

기대감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동안 꽤 인기가 생긴건가?’

무대하기도 전부터,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김세준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가치가 점점 세상에 빛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안녕하세요... 이예은입니다...”

세팅을 마친 이예은이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들리는 사람들의 박수.

이예은이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부를 노래는...”

뒷말은 마이크가 끊겨 들리지 않았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그녀가 키보드 건반에 손을 올렸고, 버스킹이 시작됐다.

김세준은 천천히 눈을 감고 그녀의 노래를 음미했다.

“연꽃이 피는 날에, 그대를 처음 봤죠.”

‘어라?’

싸구려 엠프를 통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와 키보드 소리.

그 소리에 김세준이 재밌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연꽃이네.’

이진아가 부른 게 아닌, 자신이 부른 ‘연꽃’.

그 노래를 이예은이 부르자 김세준은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이런 기분이구나.’

남들이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기분.

회귀하기 전, 항상 남들의 노래를 부르던 김세준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묘했다.

뿌듯하면서도 가슴 가득 설레는 감정.

게다가 그 곡을 부르는 게 이예은이라니.

‘좋네. 좋아.’

김세준의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갔다.

휴식이라고 별 게 있나.

‘이게 휴식이지.’

기분 좋은 날씨와 좋아하는 가수가 부르는 자신의 노래.

더할 나위 없는 휴가였다.

***

“하아... 감사합니다.”

‘연꽃’에 이어 제법 많은 곡을 불렀던 이예은이 마지막 곡을 부르고 숨소리와 함께 인사하자 김세준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보람이 있었다.

‘실력이 훨씬 늘었네.’

그가 처음 그녀의 노래를 들었을 때보다 일취월장했다.

호흡이나 발성은 물론이고, 긴장 가득했던 그때의 모습보다 한층 여유가 생긴 모습.

‘오디션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슬슬 그때의 실력이 나오나?’

이해진을 사로잡았던 이예은의 포텐.

그 포텐이 발휘하기 직전의 느낌이다.

‘곧 한 식구가 되겠... 잠시만.’

그녀와 같은 소속사 식구가 될 거라는 생각과 함께 발걸음을 돌리려던 김세준이 멈칫했다.

‘굳이 방송까지 기다려야 할까?’

김세준이 자신의 입술을 손으로 훑으며 생각에 잠겼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건 앞으로도 약 1년 뒤.

그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를 굳이 지켜봐야 할까?

차라리 아레스 뮤직에 입사해 좀 더 실력을 쌓는 게 나은 방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회귀하기 전보다 더 좋은 가수가 될 지도 몰라.’

비록 자신이 캐스팅 관련 직책은 아니지만, 이해진에게 추천 정도는 할 수 있다.

‘사장님이면 보고 바로 계약하겠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그녀를 몹시 탐내하던 그다.

단순 오디션이라고 그 반응이 다를까.

게다가 오디션 프로그램이든, 직접 오디션을 보든 비슷한 과정 아닌가.

‘좋아. 한 번 시도는 해보자,’

생각을 마친 김세준이 흡족한 미소를 짓곤 이예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저기요.”

“...네?”

이예은이 김세준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더니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차.’

버킷햇으로 얼굴을 가린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건다.

스스로 생각해도 겁먹을 만한 상황이었다.

떨리는 눈동자엔 자신을 향한 불안감이 가득 실려 있다는 걸 눈치 챈 김세준이 급히 모자를 벗었다.

“아, 수상한 사람은 아니고요. 저는...”

이럴 때 명함이 없다는 게 아쉽다가도, 얼굴이 명함이 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김세준인데, 아..아시죠?”

내 노래를 부른 만큼 얼굴은 알고 있겠지.

“...! 김...김세준님!”

그의 생각이 틀리진 않았는지 이예은이 비명 섞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

“어..어떻게!”

얼굴을 푹 숙이더니 손으로 얼굴을 덮었고, 손 틈새로 보이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저,,저기요? 예은씨?”

“네에...”

놀랍고 부끄러운 지 죽어가는 목소리로 답하는 그녀였고, 김세준이 한쪽 뺨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았나?’

개복치로 유명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의 상상이상으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노래 잘 들었어요.”

“감...감사합니다...”

그의 말에 더욱 더 얼굴이 빨개지는 이예은이었고, 김세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진심이에요. 제 노래를 이렇게 잘 커버할 줄은 몰랐어요. 커버해줘서 고마워요.”

한치의 거짓 없는 진심.

그의 말에 이예은의 귀가 더욱 시뻘게졌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부족한 실력인데...”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

하지만 이어진 김세준의 말에 그녀의 목소리가 쨍하게 울렸다.

“저희 회사에 오디션 볼 생각 없어요?”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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