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천재
귀엽고 재능 넘치는 후배.
배진구가 이진아에 대해 내리는 평이다.
수십 년이나 나는 나이 차이와 경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에게 곰살맞게 굴고, 다 늙은 자신에게 살갑게 대하는 그녀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리고 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거라곤 믿기지 않을 시원한 성량과 겉모습에 어울리는 청초한 음색.
인성도, 재능도 뛰어난 그런 그녀를 흡족해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
지금도 자신의 토크에 잘 맞춰주며 잘 따라오고 있었다.
“진아씨의 노래가 노래방에서 여성 분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래요. 알고 있었어요?”
“어머? 잘 몰랐어요. 감사하네요. 진짜 영광이에요.”
“진아씨가 생각하기에 진아씨의 노래가 노래방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그의 말에 이진아가 잠시 고민에 빠진 후,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음... 아마 고음이 많으니까, 제 노래를 잘 부르면 약간 그런 거 있잖아요. 제 입으로 말하긴 쫌 그렇지만.”
“아. 이 노래 부르면 노래 좀 한다? 그렇게 과시할 수 있다는 뜻인 거죠?”
“헤헤. 네. 그렇죠. 약간 그런 의미에서 많이들 좋아하시지 않나 싶어요. 노래 잘 부르는 여자, 매력적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또 진아씨가 노래방에서 부르기 좋은 신곡을 하나 내줬죠? 여기 계신 분들도 이미 다 알고 계시겠지만.”
배진구가 의자를 돌려 방청객들을 바라보며 말하자, 방청객 사이에서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게다가 저한텐 또 이 곡이 특별하거든요. 제 곡을 무려 리메이크해서 만들어주셨는데, 또 원작자로서 이 곡을 안 들어볼 수가 없죠.”
“이걸 또 선배님 앞에서 부르려고 하니까 되게 부끄럽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적어도 이 방송을 보시는 시청자들도 저보다 진아씨가 노래 더 잘하는 건 다 알고 있으니까. 너무 잘 부르면 제가 민망해지는 거 알죠?”
“그럼 평소보다 더 잘 불러야겠네요?”
이진아가 웃으며 대답하자, 방청객들이 호응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 좋습니다. 한 번 제대로 망신당해보죠. 그럼 이진아씨의 연꽃. 바로 가보죠.”
배진구의 말과 함께 스피커에서 무대를 가득 채우는 MR이 흘러나왔다.
부드러운 눈으로 이진아를 바라보는 방청객들.
배진구 또한 이번에는 한 방송의 진행자가 아닌, 방청객들과 같은 심정으로 그녀의 노래를 기다렸다.
“연꽃이 피어날 때, 그대를 처음 봤죠.”
“연꽃을 보러 갔지만, 왜 내 눈동자엔 그대만 담길까요.”
청아하다.
부드럽게 울려 퍼지는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에 배진구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이런 호사가 또 있을까.’
재능 넘치는 후배가 자신의 곡을 리메이크하여 라이브로 부르는 걸 직접 듣는 순간.
‘이만한 사치가 없지.’
게다가 원작자로서 자신의 곡과 비교하며 들으니 듣는 맛이 있다.
자신의 곡은 80년대 당시 유행하던 포크송과 발라드를 적절하게 섞었다면 이진아는 서정적인 발라드로 바꿨다.
“그때의 기억과 추억은, 모두 다 버려놓고.”
그리고 아련한 이진아의 얼굴.
자신은 슬픔보단, 원망을 표현했던 구절이다.
‘진아는 이렇게 해석했군.’
자신의 곡을 재해석해서 부르는 이진아의 모습에 배진구의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갔다.
‘잘하네. 우리 진아.’
마치 손녀를 보는 할아버지처럼 흐뭇한 표정을 절로 지어지고, 이내 노래가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생각했죠.”
“연꽃이 지는 날에 그대가 떠나네요.”
애절한 목소리와 함께 브릿지(Bridge)를 부르는 이진아의 모습에 방청객들 사이에서 감탄이 터져 나온다.
감정을 자극하는 듯한 목소리와 표정, 손짓과 시선까지.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이진아를 보며 무대 뒤에서 구경하던 김세준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단해. 프로는 프로구나.’
확실히 다르다.
아직 자신은 할 수 없는 숙련된 예술가의 무대였다.
그걸 증명하듯 이진아의 무대가 끝나자 방청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와... 이거 제대로 망신 받았네. 너무 잘 부르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선배님 앞에서 후배가 재롱부리는 수준이죠.”
배진구의 칭찬과 이진아의 겸손이 섞이며 다시 둘의 대화가 이어졌다.
“여기 오신 여성 분들은 이제 노래방에 애창곡이 하나 추가됐네요. 다들 진아씨 만큼 잘 부를 수 있죠?”
배진구의 물음에 여성 방청객들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배진구가 다음 멘트를 뱉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진아씨만 제 곡을 리메이크한 게 아니죠?”
“네. 사실 이 친구는 리메이크에 참여할 계획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참여하게 됐어요.”
이진아의 말에 방청객이 술렁거렸다.
이번 주 월요일.
혜성처럼 등장한 한 신인.
몇몇 이들은 영문 모른 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김세준의 노래를 들어봤던 이들은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이진아와 배진구의 입을 쳐다봤다.
“오. 갑자기 참여한 거 치고, 곡이 상당히 좋던데. 게다가 진아씨랑 답가라는 컨셉이잖아요. 전 그런 컨셉 되게 좋아하거든요. 스토리가 이어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화답하는 느낌.”
그의 말에 동의하듯 듣고 있던 방청객들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사실 이 친구가 갑자기 참여하게 된 것도 곡이 너무 좋아서에요. 갑자기 곡을 만들어왔는데, 제 곡이랑 이 친구 곡이랑 회사나 저나 못 고르겠는 거에요.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두 곡 다 발표하자. 그렇게 된 거죠.”
“오오! 곡이 너무 좋아서 발표해야만 했을 수준이다. 그런 말이네요. 그런 수준이긴 해요. 곡이 진짜 너무 좋거든.”
“어떻게 제 곡보다 더 좋아하시는 거 같은데요?”
이진아가 장난스럽게 샐룩거리고 배진구가 당황한 척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아니죠. 그런 뜻은. 둘 다 너무 좋다는 뜻이죠.”
짜여진 각본대로 행동하는 둘의 모습은 마치 진짜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이 답가라는 컨셉도 이 친구가 제안한 거에요.”
“와... 음악적 감각이 남다른 분이네요.”
침을 삼키면서 말을 멈춘 그가 방청객들의 기대감 어린 표정에 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더 이야기하면 방청객분들이 화내실 거 같네요. 오늘 특별 초청 가수입니다. 김세준씨! 나와주세요!”
“지금! 지금 나가시면 됩니다!”
배진구의 말과 함께 김세준의 옆에 있던 스텝이 그에게 소리쳤다.
‘가자!’
떨리는 발걸음을 떼고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갔고 그가 등장하자 방청객들이 박수치며 환영했다.
슬쩍 이진아를 보니, 이진아가 입 모양으로 ‘미소’라고 말했다.
‘표정이 굳어 있나?’
자신도 모르게 딱딱해진 표정을 풀고, 김세준이 살짝 미소지었다.
“뭐야. 얼굴은 생각보다 평범하네.”
“그러게. 사진이랑 너무 다른 거 아니야?”
“이 방송 보는 저 사람 팬들. 오열하겠다.”
애써 미소짓는 김세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못난 얼굴은 아니지만, 수많은 여성 팬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진과는 달리 제법 평범해 보이는 마스크.
실제로 김세준의 모습을 본 몇몇 팬들은 탄식을 내뱉으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 어서 오세요. 김세준씨. 먼저 시청자분들한테 인사 한마디 부탁드릴게요.”
“네. 안녕하세요. 신인 가수 김세준이라고 합니다.”
그를 찍는 카메라를 향해 김세준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야 신인인데 노래를 어쩜 그렇게 잘해요? 이번에 노래가 너무 좋던데. 게다가 자작곡이고. 전혀 신인답지 않은 분이네요.”
“원곡이 워낙 좋았으니까요. 평소에 워낙 좋아하던 곡이라 리메이크할 때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이야... 그거 방금 상당히 건방지게 들린 거 알아요? 자신은 곡 쉽게 만든다. 이런 뜻이잖아요. 허세가 대단하시네요?”
놀리는 듯한 배진구의 말에 김세준이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그냥 진짜 배진구 선배님 팬이었거든요.”
“에이. 또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특이하게 가야금을 연주하시는데 오늘도 보여주시나요?”
“아, 물론입니다.”
“좋네요! 그럼 지금 바로 준비하고, 들어볼까요?”
그의 말과 함께 김세준이 무대 구석에 준비되어 있던 자신의 가야금을 들고 다시 그들의 옆으로 돌아왔다.
받침대에 올린 가야금의 현을 가볍게 한 번 뜯어보고, 준비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세준의 신호를 본 스텝들이 이어 MR을 틀었다.
방청객들의 박수와 함께 시작된 반주.
그들의 박수가 잠잠해지고 김세준의 독특한 목소리와 가야금의 청량한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연꽃이 피어날 때, 그대를 처음 봤죠.”
“연꽃보다 그대만 눈에 담고 왔죠.”
“...!”
첫 소절을 듣던 배진구의 눈이 커지고,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해진이 이 녀석...’
첫 소절을 듣자마자 알았다.
이해진이 대박 하나를 물어왔다는 걸.
이진아와는 색다른 매력을 가진 가수다.
허스키하면서도 개성 넘치는 목소리.
이진아가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로 청중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심금을 울리는 가수라면.
김세준은 개성 넘치는 목소리로 청중들을 홀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말없이 빠져들고, 멍하니 감상하게 만드는 가수,
‘게다가 가야금이 매력을 더해주는... 아니 곱해주는군.’
가야금이란 악기.
얼마나 매력적인가.
우리나라 전통 악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 있지만, 실상 들어본 자는 적은 악기.
허스키한 목소리와 신비한 악기가 합쳐 사람들이 말을 잃고 빠져들게 만든다.
“그날의 기억. 이제 잊고 싶은 그때.”
“연꽃이 지면, 난 그대를 떠날게요.”
곡의 코러스(CHorus).
곡에서 가장 인상 깊어야 하는 부분이다.
흔히 하이라이트라고 말하는 것도, 감정을 가장 잘 실어야 하는 것도 이때고.
그런 곡의 코러스(Chourus)에 다다르자, 청중들이 탄성을 내질렀고 배진구도 속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오호!’
배진구의 옆에 앉아 무대를 구경하던 이진아를 아련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김세준.
마치 실제 연인을 보듯 자연스러운 그의 우수에 젖은 표정과 눈빛.
그리고 동시에 스피커에서 절절하고 구슬픈 소리가 홀에 가득 울려퍼졌다.
‘이건 해금?’
배진구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소리에 귀를 쫑긋거렸고, 이내 그가 어이가 없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아. 기가 막히네!’
해금의 구슬프고 애달픈 소리와 그의 아련한 표정.
마치 동양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었다.
해금의 구슬프고 애달픈 소리가 청중들의 귀를 자극하며 감정을 고조시켰다.
‘음반으로만 들었을 땐, 감정전달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무대로 보니, 그의 천부적인 재능이 눈에 확 들어온다.
자연스러운 표정과 시선 처리.
그리고 그런 그의 감정을 더욱 몰입하게 만드는 해금이라는 악기.
‘음원보단 무대에서 빛을 발하는 스타일이네.’
김세준의 노래가 점점 끝에 다다를 때, 배진구가 그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기대했던 것 이상인데.’
첫 방송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무대.
실수 한번 없이 깔끔한 무대를 선보이는 그를 보며 배진구가 생각을 고쳤다.
‘기대 이상? 그런 게 아니야.’
노래가 끝나고 마이크로 김세준의 숨소리만 들려올 때.
배진구가 조용히 읊조렸다.
“가요계에 천재가 나타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