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10화 (10/148)

#10

선택

김세준이 아레스 뮤직 사옥을 들린 다음 날.

이해진과 하동준 그리고 이진아와 송대준은 이른 아침부터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회사에서 밤샌 송대준이 이른 아침부터 그들을 작업실로 불러모았고, 그들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에 쾌감이 깃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이해진이 눈웃음을 지으며 송대준의 어깨를 두들겼다.

“고생했어. 난 완전 마음에 든다.”

이해진의 말에 동의하는지 하동준과 이진아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저도 진짜 완전 좋아요! 피디님 대박! 어떻게 하루 만에 곡이 이렇게 변해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호들갑을 떠는 이진아의 모습에 송대준이 피곤에 찌든 눈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좋네. 이 정도면 곡은 문제없겠어. 사장님.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하동준도 송대준의 노고를 위로하고는 이해진에게 슬쩍 눈빛을 보냈다.

그의 눈빛을 읽은 이해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진아와 송대준만 자리에 남겨둔 채 밖으로 나갔다.

“후우. 이거 나름대로 골치 아프게 됐는데?”

“그러게. 갑자기 송 피디가 곡을 완성할 줄 누가 알았어.”

“이거 진아한테 그냥 세준이 피쳐링 시키라고 할까?”

“아까 진아 표정 못 봤어? 곡에 아주 홀딱 빠졌더만. 좋은 곡에 대한 욕심은 우리 회사 최고인 애야. 결사반대할걸. 세준이가 곡도 안 만들었는데 턱이나 받아주겠다. 내가 봤을 땐 턱도 없어 지금.”

“아이씨.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네. 그러면 세준이한테 데뷔를 늦춰야 된다고 말해야 하나?”

이해진이 인상을 찌푸렸고, 하동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밖에 없지. 괜히 세준이 설레게 만들어서 미안하긴 한데. 최대한 빨리 데뷔시켜준다고 말하는 수밖에.”

“하아... 아까운데. 너무 아까워.”

“나도 아깝다. 세준이 저거 데뷔하면 진짜 대박 칠 놈인데. 그렇다고 진아 의견을 묵살할 수도 없잖아. 진아가 우리 회사에 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그것도 그렇지. 일단 알겠어. 세준이한테는 내가 따로 이야기해볼게.”

“그래. 부탁할게. 부사장인 나보다는 사장인 네가 말하는 게 낫긴 하겠다.”

이야기를 끝마친 둘이 동시에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해결책을 내긴 했지만, 아쉬움만 가득 남는 해결책이었다.

***

송대준은 힘없이 발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밤을 꼬박 셌다는 피곤함이 엄습했지만 스스로 생각했을 때 자신이 힘없는 건 고작 수면 때문이 아니었다.

밤새는 거야 이 일을 하면서 수두룩하게 겪어봤으니까.

‘너무 치졸한 거 아니냐. 대준아.’

김세준.

그에게 빚진 마음의 짐이 너무 컸다.

자신의 곡을 완성할 수 있게 해준 사람.

그 결과 자신은 그의 도움을 받아 곡을 완성했지만, 그는 데뷔가 늦어지게 됐다.

심지어 김세준은 자신이 그를 경계하고 견제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를 처음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본심.

‘애송이’라고 중얼거린 자신을 보며 희미하게 웃던 그의 얼굴.

모욕적이고, 굴욕적이었을 텐데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고, 자신의 데뷔가 늦어질 걸 감수하면서까지 준 도움.

실로 대인배가 따로 없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이건 아닌 거 같아.’

최소 그가 곡에 도움을 줬다고 솔직하게 말을 내뱉어야 했다.

그가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쩌면 그도 피쳐링에 참가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결심했는지 송대준이 숨을 깊게 들이쉬곤 발걸음을 돌렸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자 아레스 뮤직의 사옥이 보였다.

송대준이 침을 꿀꺽 삼키며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어? 송대준 피디님?”

“세준씨?”

김세준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밤이라도 샜는지 눈이 퀭했고, 피곤함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밤샌 건가? 근데 왜?’

피곤함에 절여 있는 그의 모습.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기쁨과 상쾌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잠깐 흐르고, 김세준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그의 인사에 답한 후 송대준이 떠뜸거리며 물었다.

“어쩐 일로?”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질문이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이었다.

리메이크에 참여 못 하게 됐다는 걸 알려주려고 사장이 부른 거 아니겠나.

그걸 당사자 앞에서 직접 말하다니.

자신의 멍청함에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려 할 때, 김세준의 입에서 의외에 말이 나왔다.

“아, 오늘 들려드릴 노래가 있어서요.”

“노래요?”

자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김세준을 보며 송대준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직 이야기를 못 들은 건가.’

“세준씨. 그 리메이크곡은 이미 완성했어요. 어제 세준씨 도움으로.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송대준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고, 그의 귓가에 김세준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역시. 어제 밤새길 잘했네.”

“네?”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축하드립니다! 곡 완성하셨다니. 아직 못 들어봤지만, 진짜 좋겠죠. 처음 들을 때부터 느낌이 딱 왔거든요.”

그의 축하해도 송대준은 기쁘지 않았다.

부끄럽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느낌.

“고마워요. 그리고 진짜 미안해요...”

송대준의 거듭된 사과에 김세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 곡 만드는데 도움 주셨는데 오히려 피쳐링엔 빠지게 됐잖아요. 너무 미안해서.”

그의 말에 김세준이 상관없다는 듯 밝은 웃음을 지었다.

“아아.. 괜찮아요. 솔직히 그건 도움이라고 볼 수도 없죠. 아마 제 도움 없었어도 피디님이 혼자서 해결하실 문제였을 겁니다. 다만 저는 그걸 빨리 해결할 수 있게 도와드린 거죠.”

“하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감사하지만, 어찌 됐든 데뷔도 늦어지신 거잖아요”

하동준의 말.

그 말에 김세준이 차갑게 웃었다.

“저 이번에 데뷔할 건데요?”

***

김세준은 송대준에게 약간의 힌트를 준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젠 시간이 없다.’

헤매고 있는 길의 이정표를 알려줬으니 송대준은 곧 제 길을 찾을 게 분명했다.

그러면 분명 곡은 순식간에 완성될 터.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또 없거든.”

미소와 함께 김세준이 책상 위에 검은 봉지를 올려놨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듯 책상과 부딪히며 묵직한 소리를 낸 봉지 안엔 캔커피와 에너지 드링크가 가득했다.

“일단 곡부터 만들어야지.”

자신의 피쳐링은 물 건너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좌절하고, 누워있을 수만은 없는 법.

자신만의 리메이크곡을 만들어 그들을 설득한다.

통할지 안 통할지 모르나, 일단은 시도래도 해볼 참이었다.

“길이 없으면 뚫어서라도 가야지.”

고작 이런 일로 멈춰있기엔 살아온 관록이 녹록하지 않았다.

단숨에 커피 캔 하나를 비우고 그가 컴퓨터 앞에 바로 앉았다.

익숙한 씨베이스를 키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입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손은 바삐 움직이고, 머리로는 자신이 생각한 ‘연꽃’의 이미지를 자꾸만 떠올린다.

전생에 한 사극 드라마에서 봤던 장면.

카메라의 시점이 경회루에서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연꽃을 비췄고 동시에 머릿속에 떠올랐던 악상들.

그때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려는 듯 끊임없이 생각하고, 당시 구상했던 컨셉을 기억해냈다.

늦어도 오늘 새벽 안에는 완료해야 할 일.

밤새야 하는 게 필연적이지만 김세준의 만면엔 미소가 가득했다.

너무 즐거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미소가.

***

하동준은 송대준의 노래를 듣고 난 후, 사무실로 올라와 일에 한참을 몰두했다.

김세준과 관련된 일은 이해진에게 맡겼으니 그가 알아서 잘 처리할 터.

서류의 서명을 하려던 그가 잠시 멈춘 건, 그의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 때문이었다.

“예. 사장님. 부사장 하동준입니다.”

“어. 형. 지금 어디야? 바빠?”

“해진아? 왜? 무슨 일인데?”

자신에게 전화를 건 건 이해진이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다급하고, 흥분해 보이는 목소리에 하동준이 핸드폰을 평소보다 귀에 더 가까이 댔다.

“아냐. 일 있는 건 아니고. 형 안 바쁘면 지금 빨리 작업실로 내려와 봐. 형한테 들려줄 게 있어.”

“들려줄 거? 노래야?”

“어. 진짜 빨리 와봐. 이거 나 혼자선 결정 쉽게 못 내려. 형도 내려와서 한 번 듣고 판단해봐.”

노래가 좋다는 데도 무언가 머리 아프다는 듯 말하는 그의 말을 하동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알겠어. 지금 내려갈게.”

지금 당장 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은 없기에 하동준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고, 거기엔 이해진과 송대준, 그리고 이진아와 김세준이 함께 있었다.

이번 리메이크 작업과 연관 있는 모든 자.

그런 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고, 하동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진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뭐야. 너. 세준이한테 제대로 말 안 했어?”

“그게 문제가 아니야. 세준이 사고 쳤다.”

“사고? 무슨 사고?”

그의 말에도 이해진은 대답 없이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들의 담화가 끝나자 다른 이들이 하동준을 보며 인사했고, 하동준은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김세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세준이 너 이야기 못 들었어?”

짐짓 심각하게 묻는 하동준의 말에 김세준이 덤덤히 답했다.

“들었습니다. 이진아씨 피쳐링에 제가 참가하지 못할 거라는 걸.”

“근데 왜 갑자기 이렇게 모여 있는 거야?”

“들려드릴 노래가 있어서요.”

그의 말에 하동준이 반색했다.

이 또라이 같은 작자가 또 얼마나 좋은 곡을 만들어왔을까.

“좋지. 좋아! 한 번 들어보자고!”

웃으며 하동준이 작업실로 들어갔고, 이내 다른 인원들도 그를 따라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제법 많은 인원이 들어와 약간 비좁았지만 다들 불평 없이 김세준의 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김세준이 노래를 틀었고 하동준은 팔짱을 낀 채 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소리를 감상했다.

‘가야금이네?’

인트로(Intro)부터 시작되는 가야금의 부드러운 선율.

그리고 이어서 많은 음악을 들었던 하동준에게도 낯선 악기 소리.

가슴을 절절하게 만드는 구슬픈 소리였고, 하동준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세준이 친절히 알려줬다.

“해금입니다.”

‘오호.’

확실히 대중가요에서 이런 악기가 접목되자 소리가 신선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래.

가야금과 해금을 필두로 드럼과 피아노의 소리가 어울려 이루 말할 수 없는 조화를 이룬다.

마치 퓨전 사극의 OST처럼 느껴지는 곡.

신선하고 개성 넘치면서도 너무 튀는 모습도 없다.

모든 노래가 끝나자 하동준이 감았던 눈을 뜨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친... 완전 좋은데?”

그리곤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게 무슨 문제라는 거야? 노래 진짜 좋은데? 너무 좋아.”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이해진이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형. 그거 연꽃 리메이크곡이야.”

“어?”

“그거 리메이크곡이라고. 그거랑 송피디가 만든 거랑 선택해야 돼. 형은 고를 수 있어?”

이해진의 말에 하동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낸 놀란 눈으로 떠듬거리며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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