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8화 (8/148)

#8

연꽃

‘애송이라니. 과거로 회귀하니 별말을 다 듣네.’

송대준의 말에 김세준이 이이없다는 듯 속으로 웃었다.

송대준의 명백한 무시였지만, 그런 무시에 일일이 발끈하기엔 김세준의 관록은 태산처럼 묵직했다.

“앞으로 종종 뵙겠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송대준 프로듀서님.”

“네. 뭐...”

웃는 낯으로 악수를 청하는 김세준이 얼떨떨한지 송대준이 마지못한 모습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한테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묘하게 적대적인 그의 모습에 김세준이 의아해했다.

분명 오늘이 초면이다.

앞으로 한솥밥을 먹게 될 사이인데 왜 이러는 걸까.

“그럼 이야기들 나누고 있어. 난 일이 있어서 먼저 올라갈 테니까. 세준이 너는 이야기 끝나면 회사 좀 구경하고 있어. 금방 일 마무리하고 마저 소개해줄게.”

“네.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진아랑 대준이랑 잘 이야기 해봐. 둘 다 지금은 감을 못 잡는데 원래 곡 잘 쓰던 애들이니까.”

김세준의 어깨를 툭 치곤 하동준이 발걸음을 돌려 작업실을 나갔다.

하동준이 나가자 어색한 분위기가 작업실을 맴돌았다.

“사장님께 말씀 들었어요. 곡을 잘 만드신다고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이진아가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이진아님 보다는 아닙니다. 저번에 발매하신 아프다라는 곡. 듣고 진짜 감탄했어요. 직접 작곡, 작사하신 노래 맞죠?”

“어머! 그 노래 알아요? 그거 홍보도 별로 안 해서 금방 묻힌 곡인데. 제 흑역사를 알 줄이야.”

김세준의 말이 의외였는지 이진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화들짝 놀랬다.

이진아라는 유명 가수라 해도, 모든 곡을 성공할 순 없는 법.

김세준이 말한 ‘아프다’라는 곡도 냉정하게 보면 흥행 실패에 가까운 노래였다.

“우연히 듣게 됐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아직 흑역사라고 단정 짓긴 이르지 않을까요? 사람들 입소문 타면 역주행도 가능할 노래라고 생각하거든요.”

김세준의 위로가 고마웠는지 이진아가 눈을 반짝였다.

“고마워요. 말 편하게 해요. 같은 회사 식구인데 님이라고 부르는 건 너무 정 없잖아요?”

한층 부드럽게 변한 이진아의 시선과 말투에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아는 내가 참여하는 걸 부정적으로 보진 않는 거 같고.’

좋든 싫든 데뷔를 위해서라면 한동안 가깝게 지내야 할 인문들이다.

이왕 같이 지낼 거 서로 친하게 지내면 나쁠 게 없었고, 그런 면에서 이진아하고는 앞으론 잘 지낼 수 있을 거 같았다.

‘문제는 저놈인데.’

자신과 이진아의 대화를 아니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송대준.

김세준의 추측으론 자신이 끼어드는 게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극혐까지 하는 수준은 아닌 게 다행이려나?’

불만 있는 모습이긴 하지만 사장인 이해진과 부사장인 하동준이 계획한 일이니만큼 받아들이긴 하는 모습이었다.

‘뭐 아레스 뮤직의 프로듀서정도면 공과 사는 구분하겠지.’

실력으로 찍어누르면 그만.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한 그를 보며 김세준이 눈을 빛냈다.

‘내가 싫어도, 내가 만든 곡은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줄게.’

***

“부사장님한테는 뭐라고 이야기 들었어요?”

“그냥 편곡이 까다로워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정도만 들었습니다.”

“정확히 들으셨네요. 저나 여기 송대준 프로듀서님이나 생각해둔 방향은 있는데... 에휴..”

답답하고 막막한지 설명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는 이진아였고, 송대준이 그런 이진아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저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진아씨.”

“그니까 그냥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면 안 돼요?”

“네. 절대로 안 돼요. 이진아씨랑 그건 안 맞아요.”

“진짜 고집불통!”

이진아가 송대준의 단호함에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불만을 표했지만, 송대준은 끝까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둘의 대화를 김세준은 이해할 수 없었고, 의아한 표정으로 이진아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아. 프로듀서님 커피 드실 거죠? 세준씨에게 설명할 겸, 같이 커피 사가지고 올게요.”

“네. 아아 부탁드립니다.”

“가요. 세준씨. 걸으면서 어떤 상황인지 알려줄 테니까.”

이진아가 김세준의 소매를 붙잡았고, 김세준은 영문도 모른 채 그녀에게 끌려 건물 밖으로 나왔다,

따스한 태양 빛이 내리쬐고, 눈부심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이진아가 천천히 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송대준 프로듀서랑 저랑 의견 차이가 있어요. 곡 작업이 느린 건 그 때문이고.”

“혹시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절대 송대준 프로듀서랑 사이가 안 좋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지금도 뭐 세준씨에게 송대준 프로듀서 뒷담화 하려는 그런 것도 아니고. 무슨 말인지 알죠?”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진아가 살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 곡이 보통 곡은 아니잖아요? 아무래도 배진구 선생님의 곡이다 보니까 회사에서는 안전하게 가길 바라나 봐요.”

“아, 그래서 프로듀서님이 처음부터?”

김세준의 물음에 이진아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아레스 뮤직은 아티스트들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주는 곳.

곡의 구성단계부터 프로듀서가 붙는 경우가 흔치 않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가요계의 원로가수이자 존경받는 대선배인 배진구의 곡.

이진아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숙달된 프로듀서인 송대준을 붙여 좀 더 완벽한 곡을 만들려고 했던 게 아레스 뮤직의 속내였다.

“근데 제 생각은 다르거든요. 배진구 선생님이야 저도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굳이 그런 걸 따지면서 곡을 작곡하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조금 모험적인 시도를 하려고 했던 거고, 프로듀서님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거고. 그런 차이인 거죠.”

“모험적인 시도요?”

“곡을 댄스곡으로 바꿔보려 하거든요.”

“네?”

이진아의 말에 김세준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고, 이진아는 피식 웃었다.

“안 어울리죠? 이진아라는 가수는 발라드만 부르던 가수니까. 그런 걸 탈피하고 싶었거든요. 그런 선입견.”

‘어떤 상황인지 대강 이해는 가는군.’

이진아의 상황에선 곡을 만드는 데 있어서 제약이 있는 셈이고, 송대준이 보기엔 이진아가 생뚱맞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그림이다.

둘의 입장이 다 어느 정도 공감은 가는 상황.

쉽사리 한쪽이 옳다고 말하며 흑백을 가리기엔 쉽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럼 있잖아요. 진아씨.”

“네.”

“만약, 댄스곡이 아니지만 진아씨 마음에 드는 리메이크면 어떡하실 거에요?”

넌지시 속내를 꺼내는 김세준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이진아가 살짝 웃었다.

“오. 세준씨가 만들어 보게요? 흠...”

눈웃음을 치며 고민에 빠진 그녀였고, 이진아의 고민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생각에 잠겨 있을 정도로.

“쉽지 않네요. 근데 만약 곡이 진짜 좋다면 받아들이겠죠.”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이진아가 한입 쪽 빨아먹은 후 그녀의 생각을 뱉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김세준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예상했던 대답이긴 했다.

그녀가 미래에 부른 ‘연꽃’은 댄스곡이 아니긴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의 대답은 그녀가 김세준이 만든 ‘연꽃’도 마음에만 든다면 부르겠다는 의사표명이기도 했다.

짧았던 산책이 끝나고, 다시 작업실로 돌아오자 송대준이 진한 담배 냄새를 풍기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워요.”

“고마우면 내 의견 좀 들어줘요.”

“아, 그건 절대 안 된다니까요. 진아씨. 너무 모험이에요.”

“진짜 고집불통.”

송대준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아먹으면서 답했고, 그의 단호함에 이진아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불만을 제기했다.

‘이진아가 이제 28살인가? 나이에 맞지 않게 귀엽네.’

그런 그녀의 귀여움에 김세준이 피식 웃곤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혹시, 제가 곡을 들어봐도 될까요?”

“어? 그럴래요? 피디님 괜찮죠?”

“네. 뭐...”

여전히 김세준이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송대준이였지만, 이진아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우스를 클릭했다.

이어서 컴퓨터와 연결된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음...’

김세준을 보며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이진아.

그런 이진아의 시선을 읽은 김세준이었지만 솔직한 심정으론 이 곡은 아니었다.

신선하긴 했다. 곡 자체도 나쁘지 않았고, 잘하면 이진아의 이미지를 탈바꿈할 수 있는 좋은 시도가 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너무 안 맞는데?’

하지만, 곡이 이진아의 이미지와 분위기와 너무 맞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고음을 비롯한 뛰어난 가창력이 이진아의 장기.

반면 이 곡은 브릿지(Bridge), 감정을 강하게 표출하는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도 고음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진아의 장점을 살릴 수 없는 곡이면서, 모험적인 시도만 가득한 곡.

‘내가 피디였어도, 이건 아니야.’

티 내지 않게 김세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이내 노래가 끝나자, 이진아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때요?”

솔직한 심정을 내뱉기에 그녀의 눈빛이 너무 순진무구했기에 김세준은 조심스럽게 에둘렀다.

“곡은 좋아요. 근데 아직 명확하게 뭐라고 말할 단계는 아닌 거 같아요.”

약간은 실망한 듯한 표정인 이진아였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직 간단한 멜로디와 코드만 입힌 거니까요.”

이진아의 자기 위안에도 김세준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곡을 수정한다고 바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심 마음이 놓였다.

자신의 곡이 더 빛이 날 거 같다는 생각에.

“아, 피디님. 피디님도 한 번 들려주세요. 피디님이 작곡하신 곡.”

‘응? 송대준도 곡을 만들었었어?’

이진아의 말에 김세준이 깜짝 놀랐고, 이진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희 둘이 같이 협업해도 모자를 판에 따로 놀고 있어요. 서로 각자 만든 곡이 더 낫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한 번 세준씨가 듣고 판단해 볼래요? 누구의 곡이 더 나은지.”

그녀의 말에 김세준이 고개를 돌려 송대준을 쳐다봤고, 때마침 송대준의 시선도 김세준을 향하고 있었다.

어색한 눈빛 교환 속에 송대준이 껄끄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들어볼래요?”

확실히 공과 사는 구분하는 인물인지, 넌지시 물어보는 제안에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듣고 싶습니다.”

“잠시만요.”

김세준의 대답에 송대준이 의자를 돌려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몇 번 마우스를 클릭하자, 노래 하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의 노래가 나오자, 송대준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고, 김세준은 그의 자신감에 작은 웃음을 지었다.

잘 만들어봤자, 얼마나 잘 만들었을까 하고.

하지만 김세준의 생각은 익숙한 인트로(Intro)가 들리자 멈췄고, 순식간에 표정을 굳어지기 시작했다.

‘어...? 설마?’

그리고 이어진 벌스(Verse).

아직 완벽하게 똑같진 않지만, 멜로디와 코드는 김세준에게 매우 익숙한 노래와 구성이 똑같다.

이진아가 미래에 부르는 ‘연꽃’하고.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오고, 김세준이 송대준을 말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노래... 너가 만든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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