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리메이크
김세준이 작곡한 이번 곡의 메인 세션은 여전히 가야금이었다.
가상 악기 툴(Tool)로 만든 간단한 메인 멜로디와 코드가 들렸다.
복잡하지 않은 멜로디와 코드.
하지만 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거기에 더해 중간중간 들리는 바이올린의 부드러운 연주.
가야금과 바이올린이라는 신선한 조합이 이해진의 귀를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진짜... 어이가 없네.’
이런 곡을 고작 일주일만에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것도 무려 두 곡이나.
가끔 영감이 와서 30분 만에 곡을 완성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해진 본인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으니까.
불현듯 악상과 멜로디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쾌감 넘치는 순간을.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우연의 산물이다.
한 곡 정도는 그런 하늘의 선물이 내려와 가능할지 몰라도, 두 곡을 만들어 낼 순 없다.
적어도 자신의 주변에서 그런 경험을 했다는 가수는 본 적이 없었다.
‘즉, 이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김세준의 실력이란 말이겠지.’
아직 듣지 못했음에도 이해진은 두 번째 곡도 첫 번째 곡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믿었다.
오픈 마이크에서 들었던 곡. 그리고 지금 듣는 곡. 이미 두 번이나 자신의 귀를 호강시킨 김세준의 실력.
세 번째라고 크게 다를까.
첫 번째 곡이 끝나자 김세준이 이어서 두 번째 곡을 틀었다.
이해진이 마른 침을 삼켰고, 그의 얼굴은 어느새 기대감 넘치는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다음 노래를 듣고 싶다는 욕망이 그의 마음에 가득했다.
천천히 흘러나오는 인트로(Intro)와 함께 노래가 시작됐고, 이해진은 자신의 직감이 맞아떨어졌음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지어지는 미소.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는 쾌감 때문인지, 아니면 김세준의 노래가 주는 쾌감 때문인지 알 순 없어도 그의 가슴이 흥분으로 잔뜩 채워졌다.
아까와 다른 경쾌한 멜로디.
가야금 대신, 어쿠스틱 기타가 메인 멜로디를 잡고, 드럼과 피아노가 그를 받쳐준다.
‘이건 무슨 악기지?’
그리고 마치 베이스처럼 묵직하게 노래의 중심을 잡아주는 한 소리.
알 수 없는 악기의 소리에 슬그머니 눈을 떴고, 김세준이 그의 마음을 읽은 듯이 싱급 웃으며 입 모양으로 알렸다.
‘거문고.’
“...!”
거문고를 베이스처럼 쓸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베이스랑은 사뭇 느낌이 달랐다.
묵직한 저음으로 노래를 받쳐주는 건 똑같지만, 베이스보다 한층 더 연하고 부드러운 음색이 그의 귀를 간질간질하게 만들며 속삭였다.
그렇게 3분 40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노래에 빠져 있던 이해진이, 노래가 끝나자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그런 이해진을 보면서 김세준은 자신의 마음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자신은 있었다. 그러기에 패기 넘치게 제안을 했던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살짝 콩닥거리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어떻습니까?”
김세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이해진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런 사람이 아직도 무명이라는 것.
그리고 음악 천재라는 자신의 별명이 얼마나 허망한지.
“여기 있어요. 계약서 가지고 올 테니까.”
***
아레스 뮤직은 건실한 중견 매니지먼트로 소속된 연예인은 가수, 그것도 대부분 싱어송라이터인 기획사 및 소속사다.
음반 유통, 홍보, 컨텐츠 기획, 신인 발굴 및 육성 등 매니지먼트에 관련된 전반적인 모든 것들을 포괄하여 제작하는 곳.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아레스 뮤직도 처음부터 튼실한 회사는 아니었다.
제법 이름값 날리던 가수와 그 가수의 매니저가 합심하여 설립한 회사.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회사가 파산할 뻔한 순간도 수차례였다.
그런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며 결국 아레스 뮤직을 중견 매니지먼트로 만든 두 사람.
이해진과 한때 그의 매니저였던 하동준이었다.
김세준이 이해진과 계약을 체결한, 그날 늦은 밤.
이해진과 하동준은 단둘이 모여 회포를 풀고 있었다.
당연히 그 회포의 주인은 오늘 자신들의 새로운 가수가 된 김세준이었다.
“어때?”
이해진의 핸드폰에서 울려 퍼지던, 노래가 끝나자 이해진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비록 가수는 아니지만 한 매니지먼트의 부사장. 게다가 음악 천재라던 이해진의 매니저였던 사람이다.
음악평론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진이 누구보다 신뢰하는 자였다.
이해진 반대편에 앉아 팔짱을 낀 채로 앉아 있던 근육질의 중년인 하동준이 감상에 잠겨 있다가 이해진의 질문에 감았던 눈을 뜨곤 슬그머니 웃었다.
“좋은데? 거짓말 안 하고 두 곡 다 좋아. 당장 데뷔해도 손색없겠어.”
“맞지? 형? 게다가 제법 담력도 좋아. 아까 말해줬지? 다짜고짜 핸드폰 내밀었다고. 잘 키우면 크게 될 놈이야. 그리고 그때 오픈 마이크에서 불렀던 노래도 좋아. 이 두 곡 정도로.”
“어떤 놈인지 궁금하네. 그 노래는 나중에 들어보면 되고. 그런데 벌써 계약했다고?”
하동준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동준은 아티스트의 기질이 남아 있는 이해진과 달리 철저하게 사업적인 측면만 따지는 인물이다.
노래가 아무리 좋다고 한들, 상품성이 없으면 그건 실패한 가수라는 사고방식과 좌우명을 가지고 있는 그였기에, 이해진의 판단을 섣불리 지지할 순 없었다.
“어. 놓치는 순간 후회할 거 같았거든.”
“너무 성급한 거 아니냐? 아직은 아마추어야. 연습생 출신도 아니고, 바로 계약한 건 너무 급했어. 적어도 나랑은 상의했었어야 한다고 본다.”
“형이 요즘 워낙 바빠야지. 어쩔 수 없었어. 형이랑 상의했다가 놓치기라도 하면 평생 후회할 거 같았으니까.”
“음...”
하동준도 자신이 오늘 그와 전화 한 통 하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는 걸 인정했기에 신음만 삼켰다.
“곡의 퀄리티를 봐. 만약 YH엔터나 스토리엔터에서 김세준을 발견했다고 치자. 가만히 있었을까? 언젠간 세상에 드러날 놈이야. 우리가 아니었으면 다른 곳에서 채갔다고.”
이해진은 확신하는 말투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고, 하동준은 반박하지 못했다.
이해진의 말대로 곡 자체로는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보컬 녹음과 세션 녹음은 안 한 상태다.
여기에 세션들을 불러 녹음하면 곡의 깊이와 감정이 더해지고 보컬까지 녹음하면 곡의 분위기까지 살려준다면 어떤 곡이 탄생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해진의 생각도 이해가 간 하동준이 김세준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노래는 어때?”
“나쁘지 않아. 솔직히 말하자면 가창력은 평범한 수준이야. 근데 음색이 상당히 유니크해.”
“그건 좋네.”
노래 잘 부르는 개성 없는 가수와 노래는 범하게 부르지만 독특한 가수.
둘 중 하나를 고르자면 하동준은 후자였다.
가요계는 이미 노래 잘하는 명품 가수들로 포화상태.
지금 와서 노래만 잘하는 가수가 데뷔해봤자 그런 명품들의 짝퉁 소리만 들을 뿐이다.
하지만 그럴듯한 개성이 있으면 나름대로 상품성은 있는 법. 김세준이 그나마 상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하동준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일단 계약까지 했으니 어쩔 수 없고. 근데 언제 데뷔시키려고? 우리 내년 상반기까진 계획 잡혀 있다. 걔 늦어도 내년 하반기에 데뷔하는 거야.”
보통 매니지먼트에서 같은 소속사의 가수들을 비슷한 시기에 음반 활동을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약육강식만큼 이쪽 생태를 잘 설명하는 말도 없다.
인기가 없으면 묻히고, 적자를 보고 활동을 접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
그런 치열한 사회에서 같은 식구끼리 1등이라는 목표를 두고 싸우는 건 비합리적인 일이었다.
대형 기획사들이야 종종 활동을 동시에 펼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럴 때도 타겟층은 확연하게 다른 편이었다.
보이그룹과 걸그룹을 동시에 활동시키는 것처럼.
그것도 그들은 대형 기획사라 회사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지가 가능하기에 할 수 있는 일.
그들보다 비교적 작은 규모인 자신들은 동시에 활동하는 가수들을 전부 다 보살피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동준의 말에 이해진이 고개를 저었다.
“1년은 너무 길어. 내 생각엔 내년 하반기가 딱 적당할 거 같은데.”
“나도 비슷한 생각인데, 진이랑 재현이는 어떡하고? 걔들도 지금 당장 내년 활동 바라보면서 열심히 작업 중인데.”
“후우. 이럴 땐 그냥 생각 없이 음악 할 때가 좋았다.”
푸념을 내뱉는 이해진을 보며 하동준이 쓰게 웃었다.
아티스트들을 위한 회사를 차리고 싶다며 재계약을 거부하고 매니져였던 자신을 설득한 젊은 시절의 이해진.
그의 열정과 패기에 반해 자신 또한 잘 다니던 대형 기획사를 때려치우고 그를 따라 나왔다.
“뭐, 네가 고생해야 애들이 편한 걸 어떡하냐.”
“형이라도 알아줘서 고마워.”
하동준의 위로에 이해진이 위안이 됐는지 작은 미소를 지었다.
“피쳐링 밖에 없겠네.”
이해진이 찰나의 고민 후 신음을 내뱉듯이 말을 뱉었다.
피쳐링. 다른 가수의 연주에 참여하는 조연 같은 역할.
아직 무명인 김세준이 이름을 알리기에도 적합한 시도였다.
하동준도 피쳐링이란 방법을 생각 못 한 건 아닌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애들이 받아들일까?”
“그게 문제지.”
이해진의 한 번 파인 미간이 다시 깊어졌다.
내년 하반기에 활동하는 이진아나 고재현, 둘 다 노래의 욕심이 적지 않게 있는 자들.
무명 신인의 피쳐링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내가 봤을 땐 재현이보단 진아 피쳐링 시키는 게 낫다고 봐. 그나마 진아가 재현이보단 합리적이잖아.”
“애는 착해. 욕심이 많아서 그렇지.”
이해진의 말에 하동준이 쾌활한 웃음을 터트렸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 누구보다 이진아를 좋은 아티스트라고 인정하는 건 이해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근데 진아, 걔 지금 곡 작업하는 것도 완성 안 되지 않았나? 요새 보니까 꽤 골머리 썩는 거 같던데.”
“리메이크가 쉽지 않잖아. 게다가 원곡이 워낙 좋은 곡이기도 하고. 계속 노력하는 거 같은데 잘 안되는 거 같더라. 최악의 경우 리메이크를 그냥 포기할 수도 있어.”
하동준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고, 이해진도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툭툭 건드렸다.
포기하긴 아까운 곡이다. 자신이 리메이크를 허락받기 위해 원작자인 배진구에게 얼마나 간곡한 부탁을 했던가.
욕심 같아선 자신이 직접 리메이크를 하고 싶을 정도.
게다가 들리는 소문으로는 다른 엔터에서도 그의 곡을 탐내고 있다는 말이 종종 들리기도 했다.
만약 자신들이 포기했다간 다른 곳에서 냉큼 주워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흐음... 그건 안되는데...”
무심코 중얼거린 혼잣말. 그리고 불현듯 떠오른 한 생각.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지만 괜찮은 아이디어아닌가.
시종일관 어두웠던 표정이 밝아졌고, 하동준이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질문을 던졌다.
“왜? 갑자기 좋은 방법 있어?”
“형. 그 리메이크 세준이에게 맡기는 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