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형제의 나라 (2)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이항복을 비롯한 이조참의가 문을 바라보았고, 이항복이 눈짓을 하자 그를 호위하던 정후청 요원이 문 쪽으로 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오스만 제국의 군복을 입은 우락부락하게 생기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장수 한 명과 서너 명의 병졸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오?”
정후청 요원이 오스만 제국의 장수를 보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대한제국에서 온 사절단을 보자고 하시오.”
오스만 제국 장수도 귀찮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오시오.”
그들이 오스만 제국의 황실에서 온 것을 확인한 정후청 요원은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대감! 오스만 제국 황실에서 온 자들이옵니다.”
“흐음. 황실에서 무슨 일이요?”
이항복이 그들이 온 연유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우락부락하게 생긴 오스만 제국의 장수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대한제국에서 온 사절단을 보고자 합니다.”
오스만 제국의 장수는 이항복이 지체 높은 귀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좀 전과 다른 태도로 겸손하게 그가 찾아온 연유를 밝혔다.
“흐음. 알겠소. 곧 황제 폐하를 찾아뵙겠다고 전하시오.”
이항복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오스만 제국 장수를 바라보았다.
“알겠사옵니다.”
오스만 제국의 장수는 이항복을 향해 예를 갖춘 후 자리를 떠났다.
“이조참의! 어떠한가? 황제가 우리를 만나 줄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좀 전까지의 근엄한 모습은 어느덧 사라지고, 이항복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이조참의를 바라보았다.
“그…. 그러게 말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스만 제국의 황제가 자신들을 안 만나줄까 봐 가슴을 졸이고 있던 이조참의가 멋쩍은 듯 웃음을 지었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이네. 그동안 푹 쉬었으니 우리가 할 일을 해야겠지.”
이항복은 뜨거운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창을 열고 숙소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톱카프 궁을 바라보았다.
이항복은 숙소에서 며칠을 더 머무른 후 이조참의와 함께 마침내 메흐메트 3세가 머무르고 있는 톱카프 궁을 향해 갔다.
***
영국 런던
침대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힘이 쭉 빠진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믿었던 에식스 백작의 반란이 있고 난 뒤, 여왕의 기력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왕권을 위협하는 대신들을 휘어잡고, 스페인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우던 여걸 같은 여왕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평범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참으로 세상이 허무하구나.’
여왕은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 같았다.
“폐하! 스코틀랜드에서 경혜 공주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흐음. 그래? 어서 들라 하거라!”
여왕이 병환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경혜 공주가 부랴부랴 런던으로 달려왔고, 침대에 축 늘어져 있던 여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주를 맞이했다.
“공주! 일도 바쁠 것인데, 어찌 이렇게 또 찾아온 것이오?”
여왕은 공주가 반가우면서도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폐하께서 이렇게 누우셨다 하는데, 걱정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괜찮으신 것이옵니까?”
공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왕을 바라보았다.
“하하하. 나이가 들면 몸이 고장 나는 것이야 자연의 섭리이거늘…. 공주! 걱정할 필요 없소.”
여왕이 미소를 지으며 공주를 바라보았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속히 쾌차하셔서 왕국을 이끄셔야 하옵니다.”
“흐음.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오. 난 이미 늙었어요. 이제 우리 왕국도 젊고 패기가 넘치는 새사람이 이끌어야 하는 것이오.”
“폐하!”
여왕이 계속 나약한 소리를 하자, 경혜 공주는 그녀가 안쓰러운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공주는 한동안 런던에 머물며 여왕을 보살폈고 공주의 정성스러운 간호 덕분인지 여왕은 잠시 기력을 되찾았으나, 여왕은 다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점점 악화하였다.
***
“궁의 규모가 어마합니다.”
톱카프 궁에 들어선 이조참의 박성광이 엄청난 궁전의 규모에 놀라며 말했다.
“하하하. 대제국이 아니오. 황제가 사는 궁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비록 대한제국의 황성에 비하면 작은 규모이기는 하나, 오스만 제국의 황제가 사는 톱카프 궁도 제법 제국의 황성답게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이항복과 이조참의 박성광 일행은 어느덧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 메흐메트 3세를 알현했다.
“어서들 오시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이다.”
커다란 황금빛 옥좌에 앉은 메흐메트 3세는 거만한 자세로 이항복과 이조참의 박성광을 내려다보았다.
오스만 제국 또한 대한제국과 도자기, 신대륙의 진귀한 물품 등을 교류하기는 하였으나, 그동안 사절단이 오고 가거나 한 적은 없기에 메흐메트 3세는 대한제국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일전을 앞두고 있는 대한제국이 사절단을 보낸 이유를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는 그는 이미 스페인과 대한제국을 치기로 밀약을 맺었기에 대한제국의 사절단이 별로 반갑지 않았다.
허나 대한제국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기에 일단 사절단을 보기로 한 것이었다.
“폐하께서 성대하게 대해주셔서 소신 편하게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항복이 황제에게 예를 표한 후 황제를 잠깐 보았다.
거대한 제국을 이끄는 황제여서 그런지 오만하기 그지없었으나, 아둔해 보이고 욕심이 많은 관상이었다.
“폐하! 저희 황제 폐하께서 보내주시는 선물이옵니다.”
이항복은 이삼평이 정성스럽게 만든 청화백자와 채색 자기를 메흐메트 3세에게 바쳤다.
“흐음. 이렇게 귀한 것을…. 대한제국의 자기는 참으로 아름답소. 어찌 이런 자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지….”
대한제국의 도자기는 오스만 제국에서도 엄청나게 귀한 것이다.
게다가 대한제국 최고의 도자기 장인인 이삼평이 직접 만든 도자기는 과히 나라의 보물이라 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메흐메트 3세는 도자기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천하의 보물과 같은 도자기를 선물 받은 메흐메트 3세는 금세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이 사절단이 이 먼 곳까지 무슨 일이오? 귀한 자기를 선물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닐 것이고?”
메흐메트 3세는 한껏 기분이 좋았으나, 선물은 선물이고 대한제국 사절단이 온 연유를 물었다.
‘드디어 본게임이 시작되는구나.’
황제가 온 연유를 묻자, 이항복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희 폐하께서 위대한 오스만 제국의 황제 폐하께 드릴 청이 있기에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듣기로는 대한제국은 저 엄청난 땅덩어리를 가진 명나라와 왜국까지 정벌한 엄청난 제국이라 하던데, 그런 제국이 짐에게 청할 것이 무엇이 있겠소.”
메흐메트 3세는 대한제국의 사절단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럽게 말했다.
“폐하께서도 저희 대한제국이 오만방자한 서반아를 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흐음. 뭐 그렇다고는 들었소이다. 그대의 황제께서 스코틀랜드 국왕의 시해 사건에 스페인 국왕이 관련되어 있다고 여긴다고 하던데….”
“그러하옵니다. 스코틀랜드 국왕은 저희 폐하의 사위이옵니다. 서반아 국왕이 그런 배은망덕한 짓을 하고도 사과조차 하지 않으니 저희 황상 폐하께서는 오만방자한 서반아 왕을 반드시 응징할 것이옵니다.”
“뭐. 서반아 왕이 개입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 서로 앙숙이 되어 싸워서 좋은 것이 뭐가 있소. 대화로 해결하도록 하시오.”
이미 스페인과 밀약을 맺은 메흐메트 3세는 스페인이 스코틀랜드 국왕 시해 사건에 관여한 명백한 증거가 없으니, 서로 대화로 해결하라며 이항복의 청을 거절하려는 명분을 만들려 했다.
‘서반아와 오스만 제국이 서로 손을 잡았다는 정후청 요원이 말이 맞구나.‘
메흐메트 3세가 어정쩡한 반응을 보이자, 이항복은 그가 스페인과 이미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육군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반아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인 오스만 제국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기에 이항복은 물러설 수 없었다.
“폐하! 서반아가 영기리에서 일어난 반란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차고도 넘칩니다. 그런 서반아의 버릇을 반드시 고쳐 놓아야 할 것입니다. 서반아는 폐하의 오스만 제국과도 번번이 전쟁을 일으킨 골칫덩어리가 아닙니까? 저희 제국과 함께 서반아를 벌하소서!”
이항복이 함께 손을 잡고 스페인 제국을 응징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스페인에게서 막대한 양의 금과 은 그리고 식민지까지 받기로 한 메흐메트 3세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뭐! 우리 제국이 한때 스페인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오. 허나 이제 오스만 제국은 서반아와 화친을 맺기로 했으니 그대의 청을 들어줄 수가 없소.”
황제는 본인 스스로 스페인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폐하! 서반아 왕은 음흉한 자입니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천주교를 믿지 않는 자는 이교도로 간주해 멸하려 하는 자입니다. 서반아 왕은 음흉하게 오스만 제국을 이용하려 한 것입니다. 이용 가치가 없다고 여기면 서반아의 음흉한 왕은 다시 오스만 제국을 침략할 것이옵니다.”
이항복은 이교도를 격멸하는 펠리페 2세가 메흐메트 3세를 이용한 것으로 이용 가치가 없으면 다시 오스만 제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경고를 했다.
“서반아 왕이 짐을 이용하려 한다?”
펠리페 2세가 메흐메트 3세를 이용하려 할 뿐 이교도 국가인 오스만 제국을 칠 것이라는 이항복의 경고가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경고를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메흐메트 3세도 펠리페 2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이교도를 경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옵니다. 서반아 왕은 이슬람을 악으로 여기는 자입니다. 그런 자와 어찌 위대한 이슬람 세력의 수호자인 황제 폐하께서 손을 잡으려 하시는 것이옵니까?”
메흐메트 3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린 이항복은 지금이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화려한 언변으로 황제를 설득하려 했다.
“폐하! 우리 대한제국은 이슬람교를 적대시 하지 않습니다. 황도에는 수많은 이슬람 사원이 있으며, 종교의 자유를 널리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교도를 적대시하는 서반아를 믿자 마시옵소서.”
“흐음…. 그렇다 해도. 이미 스페인 국왕과 약조하였거늘…. 나라 사이의 약조를 쉽게 바꿀 수 있겠는가?”
메흐메트 3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으나, 엄청난 대가를 받고 스페인과 밀약을 한 것이기에 그것을 쉽게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쉽지가 않겠구나.’
메흐메트 3세가 마음을 바꿀 듯하면서도 계속 모호한 태도를 취하자, 이조참의 박성광은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좌의정 대감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러나 이항복은 여전히 무슨 자신감이 있는지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폐하! 서반아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나라이옵니다. 서반아를 믿자 마시옵소서.”
이항복은 거듭 스페인을 믿지 말라 읍소했다.
“스페인을 믿을 수 없다? 그럼 그대의 황제를 어찌 믿을 수 있겠소?”
메흐메트 3세는 그토록 스페인을 믿지 말라고 말하지만, 대한제국은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이항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항복이 황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 우리 대한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오래전부터 운명을 함께 해온 형제의 나라이옵니다. 형제의 나라를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형제의 나라?”
메흐메트 3세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항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