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황제의 분노 (3)
“폐하! 그리하시옵소서. 황상 폐하의 충성스러운 군대가 반드시 서반아 왕을 응징할 것입니다.”
대신은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흐음. 그리고 짐이 직접 친정에 나서 서반아 왕의 목을 칠 것이오.”
황제가 직접 멀리 스페인까지 친정에 나서겠다고 하자, 대신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술렁거렸다.
“어찌 폐하께서 몸소 먼 길을 나서겠다는 것입니까. 폐하의 옥체가 상할까 염려되오니, 충성스러운 폐하의 군대에 맡겨 주시옵소서.”
율곡이 앞에 나서 친정에 나서겠다는 황제의 뜻을 거두어 달라 간청했다.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 나가는 험난한 바닷길이라 아무리 황제라 하도 그 목숨을 보장할 수 없기에, 그 위험천만한 길에 황제를 보낼 수 없었다.
“폐하! 그리하시옵소서. 그 험난한 바닷길에 어찌 폐하께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대신들은 일제히 친정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했다.
“저 오만불손한 서반아 왕의 마지막 모습을 짐이 직접 볼 것이오. 더는 반대치 마시오.”
그러나 서반아를 치기 위한 전쟁에 직접 나서겠다는 이균의 뜻은 바뀌지 않았다.
“폐하! 서반아는 먼 길이옵니다. 그리되오면 황성을 오래 비워야 할 것인데…. 폐하께서 황성을 그리 오래 비우시면 백성들이 불안해할 것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우의정 류성룡까지 앞으로 나아가 급구 만류하며 황성을 지켜 달라 간청했다.
“영상의 마음은 알겠소. 그러나 황성은 황태자가 지킬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친정에 나서겠다는 짐의 뜻을 더는 꺾으려 하지 마시오.”
“폐…. 하!”
이균이 뜻을 굽힐 생각이 없음을 거듭 밝히자, 황제의 고집을 알고 있는 대신들도 더는 이균을 만류하지 못했다.
“즉시 서반아에 사자를 보내 최후통첩을 할 것이며, 육군과 해군은 병력을 소집해 전쟁을 준비하라 하시오.”
“그리하겠나이다! 황상 폐하!”
황제의 명에 따라 곧 사자가 정후청 요원들이 개척한 길을 따라 서반아를 향해 출발했고, 육군과 해군의 각 부대에 황제의 명이 전달되었다.
***
황제가 서반아를 치기로 했다는 소문은 황도에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황제께서 서반아를 치기로 했다는 소문은 들었나?”
황도의 백성들은 삼삼오오 모여 전쟁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들었네. 서반아 왕이 황제 폐하의 사위를 죽였다고 하지 않나. 배은망덕한 놈이 아닌가! 황제 폐하께서 노여워하실 만도 하지….”
스페인이 그들의 존경하는 황제 폐하의 사위를 살해하는 데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성들은 마치 자기 일인 양 스페인을 향해 적대감을 표출했다.
“그렇지. 황제 폐하께서 경혜 공주님을 얼마나 아끼셨나! 그러한 공주님의 사위에게 그런 처참한 짓을 했으니. 폐하의 상심이 얼마나 크겠는가!”
백성들은 사위를 잃은 황제가 얼마나 큰 슬픔에 빠져 있을지 공감했다.
“그럼 또 서반아와 큰 전쟁이 벌어지겠구먼!”
“아마도 그러겠지. 폐하께서 그렇게 노하셨다고 하니 서반아를 가만두려 하지 않을 것이네.”
백성들도 황제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이균이 스페인과 또다시 전쟁을 치를 것이라 여겼다.
“서반아 왕은 바보가 아닌가? 매번 전쟁에서 지면서도 이번에도 쓸데없는 짓을 하니….”
“그러게 말이야. 이번에는 폐하께서 절대 서반아 왕을 용서하지 않으려 하실 것인데….”
곧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 여겼지만, 이미 여러 차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경험이 있기에 백성들은 두려움은커녕 이번 전쟁에서도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제국은 또다시 전란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게 되었다.
일부 백성들은 또다시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것이 두렵기도 하였으나, 이미 수많은 전쟁을 겪었던 그들이기에 그들은 이번에도 황제를 지지했다.
***
해군 사령부
“제독님! 황도에서 사자가 왔습니다.”
“들라 하라!”
이순신은 차분한 목소리로 황도에서 온 사자를 집무실에 들어오게 했다.
“제독님! 황제 폐하께서 황도로 올라오시라는 황명을 내리셨습니다.”
“결국! 폐하께서 서반아와 전쟁을 결정하신 것이냐?”
이순신은 이미 황제가 스페인과 전쟁을 하기로 정한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무표정한 모습으로 사자에게 이를 확인했다.
“그러하옵니다!”
“흐음. 결국…. 알겠네.”
전란의 조짐이 보이니 이를 대비하라는 류성룡의 서신을 받아 황도의 상황을 이미 알고 차분하게 서반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이순신이었기에 이순신은 사자의 방문이 놀랍지 않았다.
“어 장군. 드디어 황제 폐하께서 서반아와 전쟁을 하기로 하였소.”
이순신은 황도로 올라가기 전에 2함대 사령관 어영담 장군과 해변을 거닐며 담소를 나누었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황제 폐하께서 사위를 잃고 격노하셨다고 들었는데…. 폐하의 성정이 불같으니…. 그렇게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어영담 장군도 스페인과의 전쟁을 이미 예견이라도 한 듯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그렇소이다.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요. 허나 이번 전쟁은 이전까지의 전쟁과 차원이 다를 것이오. 폐하께서 서반아 왕국 본토를 직접 노리고 있으시니….”
이순신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파도가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럴 것이옵니다. 비록 서반아가 우리 제국에 여러 번 패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대제국이 아니옵니까…. 그런 나라 본토를 쳐야 한다는 것인데…. 쉬운 전쟁이 아니겠지요.”
어영담 장군도 쉽지 않은 전쟁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비록 스페인이 대한제국과 크고 작은 전쟁에서 패하며 쇠락해가고는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미에 광대한 식민지가 있고 유럽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국이기에 결코 만만히 보아서는 아니 되었다.
“흐음. 이번 전쟁은 육군도 육군이지만, 왜국과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해전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 해군의 역할의 클 것이니 만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오.”
이순신은 이번 전쟁이 해전에서 판가름 날 것이라 여겼다.
대한제국과의 영국에 연거푸 패전하며 스페인 무적함대의 명성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스페인 해군의 전력이 무시당할 정도로 약화된 것은 아니었고 스페인 왕국은 반도국이었기에 반드시 바다에서 큰 해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독님! 철저히 준비할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장군이 있으니 든든하오.”
이순신은 거친 파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
“청장님 이제 들어가시지요? 밤이 늦었습니다.”
도자청장 이삼평의 수제자 박정흠이 밤이 늦도록 물레를 돌리고 있는 이삼평이 걱정되는지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만!”
새로운 도자기를 연구하는 데 여념이 없던 이삼평은 그제야 허리를 펴 어두컴컴해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청장님!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모양입니다. 군인들이 속속 황도로 집결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러게 말일세. 황제께서 서반아와 전쟁을 선포하셨다고 하지 않나. 서반아 놈들이 괜히 애먼 짓을 해서….”
오로지 도자기에만 미쳐 있는 이삼평이었지만, 그도 풍문 정도는 들었기에 제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청장님!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좀 쉬시면서 하시지요.”
박정흠은 오로지 도자기에 빠져 사는 이삼평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형형색색의 채색 자기를 만들어 내어 빅히트를 친 이삼평은 최근 다시 새로운 자기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작업실에 머무르며 연구에 몰두했다.
청화 백자 또한 여전히 잘 팔리고 있었으나, 채색자기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생산되기 무섭게 유럽과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고, 유럽 각국의 왕족들과 귀족들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채색 자기를 선점하려 했다.
수많은 상선이 강화도에 와 채색 자기를 가득 싣고 유럽으로 향했다.
이삼평이 만든 채색 자기 덕분에 대한제국은 더욱 큰 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삼평은 빅히트 친 채색 자기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도자기를 개발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말게. 쉬면서 하고 있으니. 도자기를 만지면 오히려 노곤함이 확 날아가 버리지 않는가.”
이삼평이 빙그레 웃으며 박정흠을 바라보았다.
“청장님도 참…. 그나저나 서반에서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자기 수출에도 영향이 있지 않겠습니까”
박정흠이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흐음. 어느 정도 영향은 있겠지만, 워낙 자기 수요가 많으니 큰 영향은 없을 것이네.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우리는 우리 일만 열심히 하면 되네.”
이삼평이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며 박정흠을 타박했다.
“아…. 죄송합니다. 청장님…. 그런데 유럽의 상인들이 도자기를 스스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흐음. 나도 그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네…. 자기가 워낙 고가에 거래되고 있으니 그들도 자기를 스스로 만들고 싶은 것이겠지….”
이삼평도 유럽의 각 명망 있는 가문들이 도자기를 만들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정후청장 김명원으로부터 네덜란드의 델프트 가문이 자기 남명이나 제국에 스파이를 보내 자기 기술을 몰래 빼가려 하니 특별히 주의하라는 말을 들었다.
도자기의 수요가 많고 워낙 고가에 거래가 되자 유럽은 자기를 직접 만들고자 했으나 형편없는 수준의 모방품에 불과했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은 도자기를 스스로 만들게 되면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유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도자기를 만들려 했으나 그들이 만든 도자기는 서아시아의 청화백자 모방품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또 다른 도전자는 네덜란드의 델프트 가문이었는데, 그들은 메디치 가문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자본과 시간을 투자해 도자기를 연구했고, 심지어 스파이까지 남명에 보내 도자기 기술을 빼가려고 시도했다.
온갖 노력 끝에 델프트 가문은 서아시아가 만들어 내는 수준의 도자기까지는 만들어 냈으나 여전히 대한제국의 청화백자나 채색자기의 수준에는 턱없이 질이 떨어지는 도자기였다.
유럽의 각 가문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 할 수 있는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대한제국이나 남명이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조잡한 수준의 도자기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뜨거운 온도를 견딜 수 있는 고령토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단하고 영롱한 백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1,300도가 넘는 고온에서 견딜 수 있어야 했는데, 고령토만이 그 온도를 견디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령토의 존재를 알지 못한 유럽의 가문은 무르고 형편없는 수준의 도자기를 만들 수밖에 없었고, 도자기를 단단하게 하려고 유리나 수정가루를 백색 흙에 배합하는 방식을 생각해 내기도 했지만, 그 역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집요한 메디치나 델프트 등 유럽의 각 가문이 도자기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으니 그 비밀이 유출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하니 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더욱 신경 쓰고, 또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네….”
이삼평은 유럽의 도전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더욱 질이 좋고 그들이 생각지 못한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 내어 그 수준차를 더욱 벌려야 한다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