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황제의 분노 (2)
“폐하! 이렇게 되면 여왕이 후사가 없으니 프레드릭이 잉글랜드 국왕 자리까지 차지하지 않겠습니까?”
마테오 바스케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펠리페 2세를 바라보았다.
“흐음.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겠지…. 그렇게 되면 영국은 완전히 대한제국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냐.”
펠리페 2세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 된 후 잉글랜드마저 집어삼키려는 욕심으로 그녀에게 청혼했으나, 보기 좋게 퇴짜를 맞은 아픈 기억이 있었는데, 그런 영국과 혼인 동맹을 맺은 대한제국이 섭정을 빌미로 영국을 통째로 차지할 수 있다고 여기니 펠리페 2세는 자신도 모르게 배가 아파져 왔다.
“그러하옵니다. 왕비가 섭정하게 되니 대한제국의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흐음. 골치 아프구나.”
가뜩이나 네덜란드 문제 등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 펠리페 2세는 근심거리가 하나 더 생겼기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폐하…. 저. 그나저나 영국에서 일어난 반란에 우리가 관여한 사실을 알면 사위를 잃은 대한제국 황제가 그냥 두고만 보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것 또한 걱정이옵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무엇이 걱정이라는 것이냐. 대한제국 황제 놈이 또 난동이라도 부릴 것이냐는 것이냐?”
펠리페 2세는 심기가 몹시 불편한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제국 황제는 그에게 있어 원수와 같은 자였다.
그러하니 대한제국 황제라는 말만 나와도 펠리페 2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폐하! 하지만, 대한제국 황제는 무서운 자가 아니겠습니까! 반란이 일어나 사위가 죽었으니…. 그 반란에 우리가 개입한 사실을 알면 반드시 보복하려 할 것입니다.”
마테오 바스케스는 영리한 비서였다.
그는 스페인이 영국에서 일어난 반란에 개입한 사실을 알면, 대한제국 황제가 반드시 보복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보…. 복이라! 보복을 하려면 하라고 해라! 이번 기회에 지난번에 진 빚을 몽땅 갚아 줄 것이니….”
분노가 치미는지 펠리페 2세는 두 주먹을 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럽과 신대륙 그리고 아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이룩했던 그였는데, 번번이 대한제국에 패하며 방대한 영토는 줄어들었고 제국은 만성적인 재정난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펠리페 2세는 대한제국 황제가 도발해온다면 이번에는 반드시 복수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지중해 함대와 호위 부대를 통해 스코틀랜드의 군권을 완전히 장악한 경혜 공주는 본격적으로 섭정을 시작했다.
일부 지방의 영주들이 공주의 섭정에 반기를 들기도 하였으나, 공주의 섭정을 반대하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가택 연금을 당하고 사병까지 몰수당했기에 반기를 든 영주들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곧 공주에 굴복했다.
황제를 가장 빼닮은 공주는 제법 영리하게 왕국을 통치했다.
모턴 백작을 비롯한 공주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귀족들을 중용하면서도, 공주를 반대했던 귀족들을 설득해 그들이 마음을 바꾸도록 했다.
섭정을 통해 공주는 재정을 안정시켰고, 잉글랜드 왕국의 여왕 엘리자베스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대한제국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는 공주는 나폴리에 있는 대한제국 무역관을 통해 신대륙의 식민지에서 오는 물품을 저렴하게 구해 이를 되팔아 이문을 남겼고 백성들은 공주를 적극 지지했다.
“마마! 왕국이 이제 안정이 된 것 같습니다.”
모턴 백작이 오래간만에 공주가 머물고 있는 홀리루드 궁전을 찾아왔다.
공주는 모턴 백작을 반갑게 맞이했다.
“백작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소.”
공주가 홍차를 마시며 백작을 바라보았다.
“제가 무슨 도움이…. 다 마마의 빠른 결단력 덕분입니다. 지중해 함대 병력이 재빠르게 상륙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어려울 수 있었습니다.”
모턴 백작은 빠르게 정국을 장악한 공주의 결단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순수한 외모에 가려져 있던 여장부 같은 공주의 본 모습이 드러났고, 그런 공주는 젊은 시절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흐음.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소이다. 동양 여자가 섭정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귀족들이 아직 제법 있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허나 난 이제 대한제국의 공주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왕국 사람이라는 것을 귀족들이 알아주었으면 하오.”
“알고 있사옵니다. 마마. 대다수 귀족들은 이미 마마의 섭정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일부 반대하는 귀족들도 곧 마마의 진심을 알 것이옵니다.”
모턴 백작을 만난 공주는 오랫동안 그와 정사를 논했다.
***
“한음! 여기네. 여기!”
이항복이 커피 하우스에 들어오는 이덕형을 보자 활짝 웃으며 손을 들어 그를 맞이했다.
“필운! 오랜만이요.”
이항복을 발견한 이덕형도 오래간만에 보는 친구가 반가운지 미소를 지으며 이항복이 앉아 있는 자리로 갔다.
“이게 얼마 만인가? 참으로 얼굴 보기가 힘들구만.”
“그러게 말이에요. 다들 이렇게 바빠서야.”
이항복과 이덕형은 커피를 시켜 놓고 오래간만에 만난 회포를 풀었다.
“필운! 좌의정으로 승차한 것 축하하오.”
이덕형이 좌의정이 된 이항복을 축하했다.
“축하는 무슨. 할 일만 는 것인데…. 이제 좀 쉬고 싶소.”
이항복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커피를 마셨다.
“참. 이제 재상이 된 것이 아니오. 재상이 되었으니 가문의 영광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이항복이 엄살을 부리자, 이덕형이 핀잔을 주었다.
“하하하. 가문의 영광이라. 뭐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구만. 그런데 별로 영광스럽지 않은데 그것이 문제네. 이제 낙향해 유유자적 살고 싶다 이 말이네.”
좌의정으로 승차한 이항복이었지만 격무에 실상은 그다지 기쁘지 않은 것 같았다.
이균은 인사를 단행했는데, 율곡 이이가 영의정이 되었고, 류성룡이 우의정, 이항복이 좌의정, 권율이 병조판서, 이덕형이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런데. 필운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서 기방을 마다하고 이렇게 커피 하우스에서 보자고 한 것이오.”
여색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이항복이 기방에서 보지 않고, 커피 하우스에서 보자고 하자 이덕형이 놀리듯 말했다.
“하하하. 이보게 나도 이제 늙었네. 예전 같지가 않아. 술도 이제 잘 들어가지가 않는구만.”
이항복이 멋쩍은 듯 미소를 지었다.
“필운이 그런 말을 하니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소. 사람이 이렇게 변하다니….”
이덕형은 이항복이 그런 소리를 하자 재밌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오래간만에 보니 반갑구려!”
“그런데. 조만간 폐하께서 조회를 연다 하시는데 또 무슨 큰일이 있으려나 보오?”
이덕형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이항복을 바라보았다.
“흐음. 자네도 들어서 알고 있지 않나. 영기리에서 반란이 일어나 공주마마가 힘든 일을 겪으신 것을….”
이항복이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거야 들어서 알고 있지요. 서반아가 반란에 개입한 것을 알고 폐하께서 격노하셨다고 하던데….”
이덕형도 이미 영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경혜 공주의 남편인 스코틀랜드 국왕이 비명횡사한 사건을 알고 있었다.
백성들은 이미 영국에서 일어난 반란 소식을 들어 경혜 공주를 안쓰럽게 여겼다.
“그렇네. 영국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공주마마의 남편께서 전사한 것을 알고 황제 폐하께서 아주 심하게 화를 내셨네. 폐하께서 그렇게 격노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네.”
이항복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런데 그럴 만도 하지 않소?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공주마마를 얼마나 아끼셨소. 그런 공주마마께서 과부가 되게 생겼으니…. 황제께서 상심이 크실 만도 하지요.”
이덕형은 황제의 분노를 이해할 것 같았다.
“허허. 그러게, 말일세. 황후마마께서 눈물로 밤을 지새우신다고 하던데…. 황후 마마가 걱정이구만.”
이항복도 건강이 온전하지 못한 황후가 걱정되었다.
“그럼 폐하께서 서반아를 가만두지 않으려 하실 것인데?”
“그렇네.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 조회를 소집하는 것이네…….흐음. 또 큰 태풍이 불 것 같구만….”
“태풍이라면? 또 폐하께서 서반아와 전쟁이라도 생각한다는 것이오?”
이덕형이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꿀꺽 삼키며 이항복을 바라보았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폐하께서 서반아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네. 서반아가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빌지 않은 이상 폐하께서는 분명 서반아를 치려 할 것이네.”
오랫동안 도승지 생활을 하며 불같은 황제의 성격을 잘 아는 이항복은 반드시 이균이 영국에서 일어난 반란에 개입해 공주의 남편을 죽게 한 스페인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흐음. 또다시 한바탕 큰 소용돌이가 벌어지겠군요.”
“그럴 것이네. 서반아 놈들이 겁도 없이 황제 폐하의 사위를 건드렸으니. 당연히 이에 응당한 값을 치러야 할 것이네.”
이항복과 이덕형은 커피 하우스에서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
경복궁 근정전
마침내 조회가 소집되었고, 각 대신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근정전에 모여들었다.
조회가 소집된 이유를 알고 있는 대신들은 아무 말 없이 긴장된 표정으로 황제를 기다렸다.
대신들이 초조하게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황제는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황제 폐하 입시요.”
그리고 대신들이 다소 지쳐 갈 무렵 환관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황제의 등장을 알렸다.
근정전에 들어온 이균은 옥좌에 앉아 근엄한 표정으로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옥좌에 앉자, 대신들은 깊게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표했다.
“흐음. 오래간만에 이렇게 조회를 열게 되었소.”
이균은 여전히 노기가 가라앉지 않은 표정이었다.
“흐음. 경들도 알고 있듯이 영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공주의 사위가 목숨을 잃었소. 그런데 그 반란에 서반아가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요. 서반아 놈들이 어찌 이런 짐승 같은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이오?”
황제의 목소리는 차분하였으나, 분노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서반아 왕이 그런 오만불손한 짓을 저지르니 이는 우리 대한제국을 업신여기기 때문이옵니다. 마땅히 서반아 왕을 엄히 꾸짖어야 할 것이옵니다.”
“그러하옵니다. 황상 폐하!”
영의정 율곡이 앞에 나서 울분에 찬 목소리로 서반아 왕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대신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율곡의 의견에 동조했다.
대신들이 황제의 사위를 죽인 스페인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자, 이균은 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들의 생각과 짐의 생각이 같소이다. 오만한 서반아 왕의 망동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소이다.”
이균의 눈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공주의 남편을 죽인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 복수를 하고자 하는 황제의 의지를 누구도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서반아 왕을 반드시 벌해야 하옵니다.”
좌의정 이항복이 나서 말했다.
“폐하! 서반아 왕을 벌하시옵소서!”
그러자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펠리페 2세를 벌하라 간청했다.
대신들의 간청을 잠자코 듣고 있던 이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짐이 오만불손한 서반아 왕의 망동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으니, 서반아를 칠 것이오. 당장 군대를 소집하시오.”
황제가 곧바로 스페인과 전쟁을 하겠다고 말하자, 대신들은 잠깐 당황하는 듯했으나, 아무도 황제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