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영국에서 일어난 쿠데타 (3)
연회나 무도회가 열리는 마블 홀의 바닥은 값비싼 고급스러워 보이는 대리석이 깔려있었고 층고가 높은 천장과 벽은 아름답게 조각된 목재로 꾸며져 있었다.
영광스러운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여왕을 향해 대신들은 쉼 없이 손뼉을 치며 그녀의 생일을 감축했다.
“여왕 폐하 만세!”
“대영 제국을 위하여!”
그녀를 위한 귀족들의 열렬한 환호에 여왕은 감격스러운 듯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유년 시절의 힘겨움을 이겨내고 헨리 8세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여자의 몸으로 유럽을 호령하던 대제국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화려한 대영 제국의 기반을 마련한 그녀였으나, 그녀는 여자로서 개인적인 행복을 모두 희생해야만 했다.
여왕의 삶은 고독한 것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그러한 고독감과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으나, 나이가 들고 사랑하는 연인 레스터 백작까지 세상을 떠나자, 여왕은 그 상실감에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그녀가 유년 시절을 보낸 궁에서 성대한 생일 파티가 열리니 여왕은 여러 가지 복잡 미묘한 감정에 와락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흐음. 이렇게 늙은 여왕을 위해 모여 주어서 고맙소이다. 이번 생일 파티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소.”
“여왕 폐하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제국의 기반을 닦으셨습니다. 여왕 폐하의 위대한 이야기는 영원히 후손들에게 전해져 전설이 될 것이옵니다.”
잉글랜드 왕국의 명재상이자 여왕의 최측근으로 정치 권력의 실세인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이 여왕을 찬양하는 멘트를 날렸다.
벌리 남작은 본래 귀족 출신이 아닌 젠틀맨 계급 출신으로 크나큰 공로를 인정받아 여왕에게서 남작의 작위를 수여 받은 인물로, 여왕이 죽을 때까지 여왕의 두터운 신뢰를 받아 한 번도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지 않은 여왕의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여왕 폐하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이 잔을 높이 들자, 귀족들이 하나같이 포도주가 가득 든 잔을 높이 쳐들며 여왕의 만수무강을 외쳤다.
“고맙소이다. 고맙소. 이렇게 핫필드 궁전에 오래간만에 오니 여러 가지 생각이 나는군요. 마음은 아직도 이곳에서 뛰어놀던 어린아이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늙은이가 되어 있으니, 참으로 세월이 빠른 것 같소이다.”
여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왕 폐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폐하께서는 앞으로도 100년은 더 이 나라를 통치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여왕이 회상에 젖어 말하자, 귀족들이 뻔한 아무 멘트를 날리며 여왕을 위로했다.
“100년이라 하하하. 아무튼 오래간만에 이곳에 오니 기분이 무척 좋구려!”
우울해했던 여왕이 핫필드 궁전에서의 생일 파티에 만족하며 오래간만에 웃음을 되찾자, 이를 지켜보고 있는 경혜공주도 마치 자기 일인 양 미소를 지으며 여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경혜공주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여왕 옆에서 여왕의 시중을 들었고, 여왕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귀족들은 출산했음에도 여전히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경혜공주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여왕과 한참 대화를 나누던 경혜공주가 어느 순간 시종에게 눈짓했고 잠시 후 시종들이 하얀 천으로 둘러싸여 있는 커다란 무엇인가를 끌고 나왔다.
“폐하! 여왕 폐하의 생신을 맞이하여 저희 부부가 마련한 작은 선물이옵니다.”
경혜공주가 미소를 지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 것이 무엇이냐!”
여왕은 공주의 선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한 듯 말했다.
“한번 풀어보소서!”
이번에는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가 입을 열었다.
“허허. 참…. 무슨 선물이기에….”
여왕은 더는 사양치 않고 조심스럽게 하얀 천을 열었다.
“아…. 아니. 이것은….”
하얀 천이 내려지고 공주 부부의 선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여왕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은 여왕의 초상화였다.
“아…. 대…. 대단해!”
여왕뿐만 아니라, 거대한 여왕의 초상화를 본 귀족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초상화에 나타난 여왕은 현재의 여왕보다 훨씬 아름답고 젊어 보였고 제국을 이끄는 여제에 걸맞게 권위가 살아 있었다.
여왕은 드레스와 망토를 입고 있었는데 망토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눈과 구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며, 여왕의 오른손에는 무지개가 들려 있었고, 그 위에 ‘non sine sole iris’, 즉 ‘태양이 없으면 무지개도 없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초상화는 여왕을 영원히 지지 않는 태양으로 표현했고, 마치 초상화에서 여왕이 뛰쳐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여왕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초상화를….”
여왕은 경혜공주가 선물한 초상화에 깊은 감동을 하였는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초상화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귀족들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여왕 폐하! 이 초상화는 여왕 폐하의 권위를 상징하는 초상화입니다. 이렇게 아름답게 여왕 폐하를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도 감격스러운지 경혜공주가 선물한 여왕의 초상화를 극찬했다.
귀족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초상화에 경의를 표하며 손뼉을 쳤다.
“어떻게 이런 초상화를…. 너무 과분한 선물이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여왕 폐하께서는 곧 국가와 같은 존재이십니다. 여왕 폐하께서 굳건하게 나라를 통치하시니, 모든 백성들이 여왕 폐하를 우러러볼 것이옵니다.”
경혜공주가 여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흐음. 고맙기 그지없구나.”
여왕은 경혜공주의 손을 덥석 잡으며 고마움을 표시했고, 공주의 남편 제임스는 이를 뿌듯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여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화려한 파티는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다.
왕실을 대표하는 왕족과 귀족들은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왁자지껄하게 파티를 즐겼고, 여왕도 오래간만에 기분이 좋은지 술을 곁들이며 귀족들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만은 예외였다.
아일랜드의 반군 진압에 실패하여 여왕에게서 강한 질책을 받은 로버트 데버루는 웃고 떠드는 다른 귀족과 달리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연신 독한 위스키가 가득한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빌어먹을 늙은 여왕에게 저따위 초상화를….’
에식스 백작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후들러 후작, 제임스 남작 등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져 여왕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던 귀족 무리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여보! 여왕 폐하께서 좋아하셔서 다행이에요!”
경혜공주가 남편 제임스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여왕이 어린 시절을 보낸 궁에서의 생일 파티와 그녀의 초상화를 좋아할지 다소 걱정을 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여왕이 좋아하니 공주는 자기 일인 것처럼 기뻤다.
“하하하. 그러게 말이에요. 여왕 폐하께서 오래간만에 활짝 웃는 모습을 보이시니 나도 기분이 좋구려. 다 당신 덕분이구려.”
제임스도 연인 레스터 백작이 떠난 후 침울하게 있던 여왕이 웃음을 되찾자 기분이 좋았다.
우울해하는 여왕의 기분 전환을 위해 여왕이 어린 시절을 보낸 궁에서 생일 파티를 열고 초상화를 선물하자고 한 공주의 제안은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소?”
그런데 갑자기 제임스가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인지?”
한참 즐거운 생일 파티가 성공리에 진행 중인 순간에 제임스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자, 경혜공주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에식스 백작 주위를 보시오!”
“에식스 백작이요?”
남편이 에식스 백작 주위를 보라 하자, 공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술을 마시고 있는 로버트 데버루를 바라보았다.
“아니. 저자들은….”
“그렇고 로버트 데버루 주위에 후들러 후작, 제임스 남작 등 평소 여왕에 불만이 많은 이들이 모여 있지 않소.”
제임스는 에식스 백작 주위에 여왕의 눈 밖에 나 권력에서 소외된 귀족들이 몰려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에식스 백작이 왜 저런 자들과 함께 있는 거죠?”
그제야 남편 제임스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지 알아차린 경혜공주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저자들이 좀 전부터 무슨 작당이라도 하려는지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고 있소이다. 무엇인가 일을 꾸미려 하는 것 같은데….”
“일을 꾸민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모반이라도 꾸민다는 거예요.”
경혜공주가 화들짝 놀라며 남들이 들을세라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소. 저자들은 평소에도 여왕 폐하께 불만이 많아 요주의 인물들이었소. 그런데 저자들이 저렇게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 분명하오.”
제임스는 여왕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모여 무엇인가 작당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여보. 하지만 에식스 백작은 여왕 폐하께서 가장 신뢰하는 귀족이잖아요. 게다가 레스터 백작의 양아들이기도 하고….”
공주는 남편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흐음. 그러게 말이에요. 허나 에식스 백작은 여왕 폐하께 호되게 질책을 당한 이후에 사람이 변한 것 같소. 여보. 아무래도 불길해요. 당신을 호위하기 위해 온 대한제국군이 지금 어디에 있지요?”
“저…. 그것이 궁 외곽에 머무르고 있어요.”
공주를 호위하기 위해 공주와 함께 온 대한제국 정예군은 항상 공주와 함께하였으나, 여왕의 생일날 궁에 갑사들을 들이는 것이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이라 여겨 공주는 그녀의 호위 부대를 궁 밖으로 물렸고, 대부분은 스코틀랜드에 머무르고 있었고 그 숫자는 채 800명이 되지 않았다.
“흐음. 이거 낭패로군. 공주. 어서 사람을 보내 외곽에 있는 호위 부대를 급히 궁으로 불러들이시오. 그리고 지금 즉시 여왕 폐하를 몰래 피신시키시오.”
“알…. 알겠어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제임스는 공주에게 즉시 그녀의 호위 부대를 궁으로 불러들이라 했고, 공주도 불길한 기운을 눈치채고 몰래 그녀의 시종을 불러 궁 외곽에 있는 호위 부대를 복귀시키려 했다.
그리고 그녀는 여왕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술에 만취한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가 비틀거리며 여왕의 곁으로 왔다.
“여왕 폐하! 생…. 신 축하드리옵니다. 생신을 맞이하여 여왕 폐하께 소신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에식스 백작이 혀가 꼬부라져 말했다.
“흐음. 백작.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신 것이오. 그래 백작의 술을 받아야지.”
여왕이 미소를 지으며 잔을 내밀었고, 로버트 데버루는 비틀거리며 여왕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여왕은 여전히 에식스 백작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그녀가 그를 호되게 나무란 것은 그가 더 잘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오는 채찍질 같은 것이었다.
에식스 백작이 직접 와인을 따라 주니 여왕은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로버트 데버루는 이내 여왕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왕 폐하! 만수무강하셔야 합니다. 오래오래 행복하셔야 하옵니다.”
“흐음. 백작! 고맙소. 그런데 술을 너무 많이 마셨구려. 그렇게 술을 마시면 몸이 상하는 법이오.”
여왕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옵니다. 소신은 멀쩡합니다…. 그런데 여왕 폐하…! 왕 노릇을 너무 오래 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제 왕위에서 내려오셔서 편안한 삶을 사시옵소서!”
에식스 백작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오자, 왁자지껄하던 연회장은 순식간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고, 귀족들의 시선은 여왕과 에식스 백작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