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영국에서 일어난 쿠데타 (2)
런던으로 돌아간다면 로버트 데버루는 문책을 피할 수 없기에, 런던으로 돌아갈지 고민했으나, 일단 런던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런던으로 귀환한 후 곧바로 여왕을 찾지 않고 런던 외곽의 저택에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들과 비밀리에 회합을 했다.
“여자가 나라를 통치하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난했다.
그는 후들러 후작으로 한때 여왕의 신임을 얻었으나 능력 부족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눈 밖에 난 뒤 노골적으로 여왕을 비난해왔던 인물이다.
에식스 백작의 비밀 저택에 모인 이들은 모두 여왕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렇소이다. 여왕이 나라를 다스리니 다른 나라들이 모두 우리 영국을 우습게 여기고 있소이다. 나라가 엉망이오. 엉망.”
저택에 모인 귀족들은 하나같이 여왕을 심란하게 비판했다.
여왕이 철권통치로 왕권을 튼튼히 한 것은 사실이나, 영국 귀족 중에는 여왕의 강경한 통치 방식에 불만이 있는 자들이 꽤 있었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권력에서 소외된 자들이었기에 더욱 여왕에 대한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저택에 모인 이들이 하나같이 여왕을 비난하자, 로버트 데버루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여왕 폐하께서 우리 영국을 망쳐놓고 있어요. 여기 모인 귀족들께서 이렇게 한결같이 나라를 걱정해주시니 우리 영국에 아직 희망이 있는 것 같소이다.”
누구보다 여왕의 총애를 받던 에식스 백작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여왕을 맹비난했다.
그에게 베푼 여왕의 은혜를 모르는 눈치였다.
“아일랜드 문제만 해도 그것이 어떻게 에식스 백작의 책임이라 할 수 있겠소이까. 여왕 폐하께서 군대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소. 그나마 백작께서 강화조약을 체결했기에 사태가 원만히 해결된 것인데…. 여왕 폐하께서는 그것도 모르고 백작을 문책하겠다고 하니….”
후들러 후작이 로버트 데버루를 문책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며 그를 두둔하자, 데버루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후들러 후작도 한때 잘 나가다가 실수를 하여 여왕의 눈 밖에 난 적이 있기에 로버트 데버루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여왕이 나라를 말아먹는 꼴을 더는 볼 수가 없소. 이참에 왕을 갈아 버립시다.”
여왕을 비판하던 그들은 이제 여왕을 쫓아내고 새로운 왕을 내세우자는 반란까지 모의하는 지경이 되었다.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방면으로 접어들자 로버트 데버루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흐음. 그러나 여왕을 쫓아내기에는 여왕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모든 군권을 여왕과 그 측근들이 다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여왕을 우리가 쫓아낼 수 있소이까?”
여왕에 반기를 들기로 한 귀족들은 분위기에 취해 당장 여왕을 갈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으나, 다소 신중한 성격의 제임스 남작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여왕을 치는 것은 사실상 어렵지 않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로버트 데버루가 입을 열었다.
“제임스 경의 말이 일리가 있소. 여왕이 군권을 가지고 있으니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니 단숨에 여왕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려야 할 것이오.”
“흐음. 그럴만한 기회가 있겠소?”
귀족들이 로버트 데버루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귀족들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흐음. 좋은 생각이구려. 그때가 좋겠구려. 경비도 삼엄하지 않을 것이니….”
로버트 데버루의 말을 들은 귀족들은 미소를 지으며 모두 그의 계획을 마음에 들어 했다.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와 그와 뜻을 같이하는 귀족들은 오랜 시간 동안 모여 여왕을 제거할 반란을 모의했다.
***
“여보! 폐하께서 많이 야위신 거 같아요.”
여왕을 뵙고 나온 경혜 공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남편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이에요. 레스터 백작이 세상을 떠난 슬픔이 가시지 않은 것 같아요. 게다가 아일랜드마저 골치를 썩이니…. 더 수척해지신 것 같소.”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도 여왕이 걱정되었다.
평생의 연인 레스터 백작이 떠난 후 여왕은 삶에 대한 의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게요. 여왕 폐하가 마음을 굳건히 하여야 할 것인데….”
공주가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여왕 폐하께서 요즘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같으니. 당신이 자주 궁을 찾아가 말동무를 해줘요. 그래도 폐하께서 당신을 보면 밝게 웃으며 좋아하지 않소.”
제임스는 공주에게 울적한 여왕의 말동무를 해주라고 말했고, 공주는 제임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어요.”
“이제 곧 여왕 폐하의 생신인데, 이번에는 좀 더 화려하게 파티를 열어 여왕 폐하께서 기분 전환이 될 수 있도록 해야겠소.”
제임스는 곧 다가오는 여왕의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열어 여왕의 울적한 기분을 전환해 주리라 생각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공주 부부는 런던에 오랫동안 머물렀고, 공주는 수시로 여왕이 있는 궁을 수시로 방문해 울적해하는 여왕을 위로했고, 공주와 함께하며 여왕은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
햄프턴 궁전
“폐하! 에식스 백작께서 오셨습니다.”
아일랜드와의 굴욕적인 강화조약 체결 후 런던으로 소환된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가 마침내 여왕을 찾아왔다.
“들라 하라!”
엘리자베스 여왕이 차분한 목소리로 백작을 들어오라 했고, 집무실 밖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로버트 데버루가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왕 폐하!”
로버트 데버루가 경색된 표정으로 여왕을 바라보았다.
“흐음. 왔구려?”
여왕이 싸늘한 표정으로 로버트 데버루를 바라보았다.
“그대를 런던으로 소환한 이유를 알고 있소?”
엘리자베스 여왕이 마음을 가라앉히려는지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폐하! 그….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아일랜드 반란군들의 전력이 생각보다 강했기에 우리 군이 그들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저…. 그래서…. 강화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여왕이 이제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여왕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엘리자베스의 분노가 가득한 눈빛에 로버트 데버루는 제압당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변명을 했다.
에식스 백작의 몸은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지금 그대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마저 물리쳤던 우리 군이 아일랜드의 형편없는 반군들보다 못하다는 것이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로버트 데버루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구차한 변명을 하자, 여왕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고, 그녀는 노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백작을 나무랐다.
“폐…. 하! 그…. 것이 아니오라…. 아일랜드 반군들이 스페인군의 지원도 받고 있어. 상황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강화조약을 체결해 시간을 버는 수밖에….”
“이……런. 백작! 어찌 그렇게 나약한 말을 하는 것이오. 내가 대신들의 반대에도 그대를 아일랜드 총독으로 보낸 것은 반란군을 제압하라고 보낸 것이지 나약하게 그들에게 항복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거늘….”
여왕은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는지 에식스 백작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폐…. 폐하!”
백작은 애써 그녀의 눈빛을 피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레스터 백작의 아들인 그대를 얼마나 믿었는데, 그따위 짓을 할 수 있는 것이오. 그대의 굴욕적인 강화조약은 레스터 백작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오. 당장 돌아가 처분이 있을 때까지 근신하고 있으시오.”
엘리자베스 1세는 로버트 데버루를 강하게 질책했다.
“그…. 그리하겠습니다.”
결국 에식스 백작은 제대로 된 변명 하나 하지 못하고 여왕의 노여움만 산 채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흐음. 오늘따라 레스터 백작이 그리워지는구나.”
여왕은 먼저 세상을 떠난 연인 레스터 백작이 그리워졌다.
그녀는 이미 식어버린 밀크티를 마시며, 노여움을 달랬다.
“데버루가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인데….”
비록 아일랜드의 반란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온 로버트 데버루를 강하게 질책했으나, 그녀는 평생의 연인 레스터 백작의 양아들인 그를 내칠 생각은 없었다.
인간이란 존재가 완벽하지 않기에 에식스 백작도 한 번쯤은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더욱이 그녀는 연인이었던 레스터 백작의 양아들인 로버트 데버루를 여전히 특별히 아꼈기에 에식스 백작이 더 잘 되라는 의미로 질책하였을 뿐이다.
“제기랄! 네년이 왕 노릇을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여왕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는 에식스 백작은 여왕에게 모욕당했다 여기고 씩씩거리며 궁 밖으로 나왔다.
아일랜드 사태에 대해 여왕으로부터 강하게 질책을 받은 로버트 데버루는 곧 여왕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끊을 것으로 생각했고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며 계획했던 모반을 더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
핫필드 궁전
잉글랜드 남동부 하트퍼드셔에 있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고색창연한 궁전에 여왕을 태운 황금마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여왕은 창가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궁전을 다시 오게 될 줄이야….”
그녀는 감회가 새로운 것 같았다.
붉은 벽돌로 지어져 붉은빛을 내는 이 오래된 궁전은 여왕이 어린 시절을 보내던 궁이었기에 그녀의 유년 시절 추억이 그대로 간직된 궁전이었다.
헨리 8세와 엔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한동안 왕과 왕비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라났으나 그녀의 유년 시절은 그렇게 행복한 편은 아니었다.
엔 불린이 왕국을 이어받을 왕자를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그 실망감에 엔 불린뿐만 아니라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에 관한 관심을 두지 않았고,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게다가 어머니 앤 불린은 남편의 사랑은 물론 백성의 사랑도 받지 못했고, 결국 어머니는 참수형에 처해졌고, 엘리자베스 1세는 졸지에 작위와 계승권을 잃고 왕궁에서 쫓겨나는 불우한 신세가 되었다.
그런 불우한 엘리자베스가 유년 시절을 외롭게 보내던 궁전이 핫필드 궁전이었기에, 그녀는 오래간만에 찾은 고색창연한 궁전을 보며 어린 시절의 기억이 추억처럼 스쳐 지나갔다.
울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여왕을 위로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제임스 국왕은 그녀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핫필드 궁전에서 여왕의 생일 파티를 열기로 했다.
잉글랜드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을 태운 마차가 속속 궁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작고 오래된 궁전은 잉글랜드의 귀족과 왕족들로 북적거렸다.
이윽고 여왕을 태운 황금마차는 성대한 여왕의 생일 파티가 열릴 마블 홀에 멈추어 섰고, 여왕은 경혜 공주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 감회에 젖은 눈빛으로 마블 홀을 향해 들어섰다.
화려한 드레스와 오색 찬연한 빛을 내는 보석이 가득 박힌 티아라를 쓴 여왕이 마블 홀 안으로 들어서자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던 귀족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왕 폐하! 생신을 축하드리옵니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여왕을 향해 큰 소리로 생일을 축하드린다고 외치며 경의를 표했다.
귀족들이 그녀를 열렬히 환대하며 박수를 치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공주와 함께 마블 홀 중앙으로 향했다.
수많은 귀족들 사이에는 여왕에게서 호된 질책을 당했던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여왕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