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왜구 소탕 (5)
‘백성들이 이제 왕을 따르지 않겠구나…. 백성을 버린 군주를 군주라 할 수 있겠는가….“
대학사 심리는 궁궐을 불태운 이가 왜구가 아닌 백성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 혼자 살겠다고 백성을 버리고 도주하니, 백성은 더는 왕을 섬기려 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왕을 저주할 것이다.
대학사 심리는 그러한 자연스러운 섭리를 알지 못하는 충선왕을 더는 섬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하! 어서 떠나시옵소서! 황제께서 오만한 왜구들을 소탕할 것이옵니다. 그리되면 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왕이 불타는 궁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자, 대신들이 왜구들이 왕을 추격해온다며 어서 떠날 것을 재촉하였고, 충선왕은 눈물을 훔치며 다시 길을 나섰다.
***
“주군! 왕이 도망친 것 같습니다.”
“한심한지고! 어찌 왕이라는 자가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칠 수 있다는 것이냐…. 그러고도 왕이라고 할 수 있는지….”
주영락이 이끄는 남명의 대군을 격파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5만 대군이 마침내 남명의 왕도 남경에 입성했다.
그러나 남명의 왕은 이미 도주하였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와키자카는 김이 빠진 듯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백성을 버리고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영주를 본 적이 없는 와키자카는 충선왕의 도주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왕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이냐?”
“저희가 파악한 첩보에 의하면 대한제국 국경을 넘으려 하는 것 같다고 하옵니다. 대한제국 황제에게 원병을 요청하려 하는 모양입니다.”
“무엇이라! 대한제국으로?”
충선왕이 국경을 넘어 대한제국으로 향하려 한다는 소리를 들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수!
그 원수를 언젠가는 반드시 갚아 주리라 다짐하고 다짐했던 와키자카였다.
허나 왜국과 명국을 정벌한 대한제국의 기세가 강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그는 지금 대한제국과 상대하기가 버겁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 대한제국이 충선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남명을 구원한다면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러하옵니다. 주군!”
“흐음. 왕이 대한제국 국경으로 도주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추격대 5천을 줄 것이니, 국경을 넘기 전에 왕을 당장 사로잡아 와라! 사로잡기 힘들면 죽여도 좋다!”
“존명!”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충선왕이 국경을 넘기 전에 사로잡아야 한다고 여기고 추격대를 보내 왕을 뒤쫓게 했다.
그리고 남은 병력은 왕이 떠는 도성을 철저히 약탈했다.
모든 건물에 불을 지르고, 남명군이 버리고 간 화포와 활 등 무기와 군량미를 노획하였으며, 남아있는 은과 금 비단 그리고 값비싼 도자기 등을 약탈했다.
“사…. 살려주세요!”
“으…. 악!
눈에 보이는 자들은 어린아이, 어른과 상관없이 모조리 살육하였으며, 욕정에 사로잡힌 왜구들은 궁궐에 숨어있던 궁녀들과 나인들을 찾아내 겁탈했다.
남명의 왕성 남경은 약탈과 방화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왜구들의 약탈은 일주일이 넘게 지속되었고 한때 찬란한 영광을 누렸던 남경은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백성들의 시신의 즐비하게 쌓인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한편 고된 행군 끝에 충선왕 일행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보낸 추격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대한제국 땅을 밟았다.
긴장한 모습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던 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서경(북경)
“폐하! 남명의 병부상서 입시이옵니다.”
내관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남명에서 병부상서가 왔다고 외쳤다.
“들라하라!”
이균이 들라 하자, 남명 병부상서 이영락이 다급히 들어왔다.
한때 중원을 지배했던 명나라 황제가 제국을 통치하던 황궁을 이렇게 다시 오게 되니 이영락의 마음은 복잡 미묘했다.
이영락은 온몸을 바닥에 깔아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그래! 병부상서가 무슨 일로 이렇게 다급히 온 것이요?”
이균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으나 모르는 척 물었다.
“황상 폐하! 저희 남명이 왜구의 침략을 받아 사직이 풍전등화와 같사옵니다. 부디 남명을 구원하시옵소서!”
병부상서 이영락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왜구가 남명을 공격했다는 것이냐?”
이균은 이미 정후청을 통해 왜구들이 남명의 동남해 해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주영락 장군이 이끄는 남명 주력군을 격파하고 남경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여전히 모른척했다.
“그…. 그러하옵니다! 황상 폐하! 와키자카 야스하루라는 왜군 출신 장수가 지휘하는 왜구들이 동남해 일대에 상륙해 이를 토벌하기 위한 근왕군을 전멸시킨 후 왕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부디 황은을 베푸시어 남명의 사직을 보전해주소서….”
이영락이 왜구의 침략을 상세히 황제께 아뢰며 원군을 보내 남명을 구원해달라며 황제에 간청했다.
“허허! 어찌 노략질이나 하는 왜구 따위에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다는 것이냐!”
이균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병부상서를 바라보았다.
“폐하! 비…. 록 그들이 왜구라 하나. 모두 한때 왜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수하로 있던 자들로 그 군세가 정규군과 버금가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명군이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이었나이다.”
이영락이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허허! 그래도 바다를 떠도는 왜구가 아니더냐! 참으로 딱한지고…. 그래 왕은 왕도를 지키고 있는 것이냐?”
“폐하! 왜구들이 왕도 코앞에 들이닥친 급박한 상황이기에 전하께서는 사직을 보전하기 위해 급히 몽진을 떠나셨나이다.”
병부상서 이영락이 충선왕이 왕도를 버리고 도주한 사실을 아뢰자 이균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무어라 했느냐? 왕이란 자가 저 혼자 살겠다고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이냐!”
이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호통을 쳤다.
한나라의 왕이 전란이 발생했다고 하여 백성을 버리고 도주한다는 것은 이균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것이었다.
“저…. 워낙 다급하여.”
이균이 호통을 치며 나무라자 이영락이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왕이 도주했다는 것을 못마땅해 하리라는 것을 짐작은 했지만, 저렇게 노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것을 말이라 하는 것이냐. 백성을 버린 왕을 어찌 군주라 할 수 있겠느냐!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자가 원군을 요청할 자격이 있느냐!”
병부상서 이영락의 구차한 변명이 더욱 이균을 노하게 했다.
생각 같아서는 저 혼자 살겠다고 도주한 충선왕을 갈아 치우고 새로운 왕을 내세우고 싶은 정도였다.
“황상 폐하! 부디 왜구의 침략에 존망이 위태로운 남명을 구원하소서! 대한제국이 원군을 보내주지 않으시면 남명은 망할 것이옵니다. 부디….”
병부상서 이영락이 황제에게 원군을 보내달라고 눈물로 간청했다.
기댈 곳은 대한제국밖에 없기에 이영락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제에게서 원군을 받아내야만 했다.
원군을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자신이 처량하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참으로 한심한 작자들이구나.’
이균은 왜구 따위를 물리치지 못하고 원군을 요청하는 남명의 행태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고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주군으로 섬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결한 이후 바다를 떠돌다 왜구를 규합하여 남명을 망하기 직전까지 몰아넣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절대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균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병부상서 이영락은 황제가 무슨 말을 할지 걱정하며 긴장된 표정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이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후국이 왜구의 침략을 받아 나라의 존망이 위태롭다고 하니 대국으로서 당연히 원군을 보내 제후국을 도울 것이다. 허나 왕이라는 자가 백성을 버리고 저 혼자 살자고 도주한 것은 참으로 치욕스러운 일이로다.”
“폐….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가 군대를 보내 왜구를 토벌하겠다고 하자, 병부상서 이영락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거대한 제국 대한제국의 군대가 남명 땅을 밟아 곧 왜구들을 토벌할 것이라 생각하니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이균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왜구들이 동남해 해안 일대를 떠돌며 남명의 상선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등 유럽의 상선들도 무차별 약탈하여 무역망을 흔들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어 조만간 왜구들을 소탕할 생각이었다.
무역로를 가로막는 왜구의 준동은 대한제국으로서도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런 찰나에 왜구들이 남명을 쑥대밭으로 만드니 백성을 버리고 도주한 충선왕이 행태가 어처구니가 없기는 하지만, 이참에 왜구들을 모두 소탕하고자 하는 것이 이균의 뜻이었다.
***
“전하! 황제께서 원군을 보내주시기로 하셨나이다!”
병부상서 이영락은 기쁜 소식을 가지고 다급히 충선왕의 곁으로 갔다.
“그…. 그것이 사실이냐.”
병부상서에게서 황제가 원군을 보내주기로 했다는 말을 듣자, 충선왕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왜구들의 발호에 도성을 내주고 도주하여 대한제국에 몸을 맡겨 황제의 결정만 기다리던 신세였는데, 황제께서 원군을 보내주기로 했다니 그것은 광명을 찾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황상 폐하께서 10만 명의 대군을 보내 왜구를 소탕하겠다고 하셨나이다!”
병부상서 이영락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상 폐하의 황은을 어찌 갚아야 하는지…. 흑흑. 이제 곧 왕도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충선왕은 10만의 대군을 보내주겠다는 황제 폐하의 은혜에 깊은 감동을 먹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자결하게 하고 중원을 차지한 대한제국 황제이건만, 그는 그런 생각조차 없는지 오로지 황제께서 대군을 보내준다는 사실 자체를 감격스러워 했다.
참으로 한심한 작자였다.
그러한 자가 한나라의 왕으로 있으니, 남명의 백성들이 가여울 뿐이다.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께서 대군을 보내준다고 하니 그들도 이제 살았다고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
서경(북경)
“10만의 군사를 내어줄 것이니. 속히 남명과 바다를 혼란스럽게 하는 왜구를 소탕하시오.”
이균은 권율 장군에서 10만의 병력을 내주며 왜구를 소탕하라 명했다.
이순신, 신립 등 적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명장이 많으나 노략질이나 하는 왜구를 소탕하는 데에는 권율 장군으로 족하다는 것이 이균의 생각이었다.
“폐하. 소신 신명을 다해 왜구를 토벌하고 남명을 구원하겠나이다.”
권율 장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균을 바라보았다.
명문가의 자제로 본래 문과를 지원했으나 번번이 낙방한 권율은 진로를 바꾸어 무관의 길을 택했고, 무관이 된 이후에는 그것이 적성에 맞는지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장군을 믿겠소이다. 왜구들이 준동하면 무역로가 막히게 되니, 이번 기회에 왜구들을 모조리 토벌하여 발본색원하도록 하시오.”
“그리하겠나이다. 왜구들이 다시는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모조리 토벌하겠나이다.”
권율 장군이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왜구를 모조리 토벌하겠다고 하자, 이균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권율은 곧 10만 대군을 이끌고 남명 땅으로 향했다.
대한제국이 자랑하는 수천 문의 화포와 조총 부대, 기마대 그리고 실전 경험이 풍부한 보병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군악대의 장엄한 음악 소리에 맞추어 행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