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왜구 소탕 (3)
“왜구들이 어디까지 와 있느냐?”
주영락 장군이 항저우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장군 이성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50여 리 앞까지 와있는 것 같사옵니다.”
“50여 리라! 왜구들의 기세가 참으로 무섭구나. 어찌 왜구 따위가 왕성을 위협하는 지경이 된 것인지......”
왜구들이 항저우 인근 50여 리 앞까지 도달했다는 보고를 받은 주영락 장군은 다시금 왜구들의 기세가 무섭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왜구 따위에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작금의 남명군의 모습이 한심하다고 느껴졌다.
“왜구들은 단순한 해적이 아닙니다. 웬만한 나라 정규군의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허나 이성민 장군은 동남해 해안을 따라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는 왜구들이 단순히 노략질이나 하는 왜구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쇠락한 남명은 그들을 막기 어려울 것이라 여기며 절망하고 있던 참이었다.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느니라! 대한제국과의 전쟁에서 진 패잔병 출신들이 아니더냐.”
“그러하옵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데다 해적질을 하며 노획한 신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어 화력 또한 대단하옵니다.”
“흐음. 아무리 그래도 해적질이나 하는 왜구가 아니더냐. 그런 왜구 따위에게 이렇게 제대로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밀리고 있으니.......어찌 우리 대명국이 이 지경이 되었다는 말이냐….”
대한제국에게 패배하여 남쪽으로 밀려난 신세가 되었으나, 그래도 한때는 중원을 지배했던 강대국 명나라가 해적질이나 하는 왜구 따위에 밀려 나라의 존망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이 주영락은 서글퍼졌다.
주영락 장군이 왜구에 밀려 왕도를 코앞에 두고 있는 항저우마저 위태로워진 것을 강하게 질책하자, 이성민 장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 왜구의 숫자가 얼마나 된다고?”
“족히 5만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라? 어느새 왜구들이 5만이 되었다는 것이냐?”
왜구들이 2만여 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던 주영락은 이성민 장군의 입에서 왜구들이 5만에 이른다는 말을 듣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장군! 왜구들을 이끄는 와키자카라는 자가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자가 동남해에 떠돌고 있는 왜구들을 규합해 그들을 모두 참전시켰사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남해 일대를 떠돌고 있던 해적들을 모두 규합해 그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해적들을 통일한 해적의 왕이 된 것이다.
“흐흠…. 이런…. 그래서 왜구들의 기세가 그렇게 매서웠던 것이구나.”
“장군! 성에서 농성전을 하실 것이옵니까?”
이성민은 당연히 주영락 장군이 농성전을 벌일 것이라 여겼으나, 확인하는 차원에서 물어보았다.
“성 밖으로 나가 왜구를 토벌할 것이다.”
그러나 이성민의 기대와 달리 주영락 장군은 성 밖으로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성민 장군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장군! 왜구의 기세가 너무 강합니다. 성 밖으로 나가면 왜구의 기세를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성에서 농성전을 해야 하옵니다.”
이성민은 성 밖으로 나간다면 화력과 모든 면에서 우세한 왜구를 이길 수 없다고 여겼다.
“알고 있다. 허나 우리가 성안에서 농성전을 벌인다면, 왜구는 이곳을 지나쳐 곧바로 왕도로 향할 것이다.”
주영락 장군도 성 밖으로 나가면 왜구의 기세를 당해내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나 왕을 사로잡고 왕도를 약탈하고자 하는 왜구들이기에 항저우 성에서 농성전을 하면 왜구는 분명 성을 지나쳐 곧바로 왕도로 향할 것이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성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장군! 그렇게 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왜구의 전력이 너무나 강합니다. 성안에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이성민 장군은 성 밖으로 나가면 싸워 이길 수 없으니 성안에서 농성전을 벌여야 한다며 성 밖으로 나가려는 주영락을 만류하였으나, 주영락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대의 생각이 옳다. 허나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농성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왜구가 도성으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성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장…. 군.”
군을 지휘하는 장수의 의지가 확고하니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기야 성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으면 목숨을 보전할 수는 있으나 주영락 장군의 말처럼 왜구는 항저우 성을 지나쳐 곧바로 도성으로 향할 것이기에 이성민은 주영락 장군의 계획을 따르기로 했다.
***
“주군! 이제 곧 황저우 성입니다!”
파죽지세로 남명군을 격파하고 북상 중인 수만 명의 왜구들은 어느새 항저우 성 코앞에 당도했다.
항저우 성 인근 마을 여러 곳을 이미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한 왜구들은 기세등등하고 사기가 높았다.
그들은 항저우 성마저 단숨에 공략해 전리품을 얻을 기대감에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어서 빨리 항저우 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하하. 드디어 항저우 성이구나. 이성만 넘으면 난징(남경)이 바로 코앞이구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남명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야망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가 모시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자 구차하게 바다를 떠돌며 노략질이나 하였으나, 어느새 왜구들을 규합해 남명 수군을 완파하고 왕이 사는 도성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그는 남명을 손에 넣고 대한제국 황제에 기필코 복수를 하겠다며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다.
“남명의 근왕군이 도착했다고 했느냐?”
“그러하옵니다. 도원수 주영락이 이끄는 6만의 병력을 이끌고 항저우 성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6만이라! 6만이라 해봤자. 오합지졸일 뿐이다! 남명군을 모조리 도륙한 후 도성으로 향할 것이다! 전투 준비를 갖추도록 하거라!”
“존명!”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전투 준비를 갖추라 명하자, 왜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한편 주영락이 이끄는 6만여 명의 병력도 성문을 열고 왜구를 향해 나섰다
주영락과 그의 군대의 표정은 비장했다.
그들의 손에 남명이 운명이 달렸기에 그들은 죽기를 각오했다.
도성을 지키기 위해 나선 병력이었기에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주영락이 이끄는 병력은 기병대가 주축이었다.
갑주를 갖추어 입은 수만 기의 기병들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왜구들을 향해 나아가니 그 모습이 제법 군대 같아 보였다.
“장군! 왜구들이옵니다.”
항저우 성 인근 50여 리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5만 명이 넘는 왜구들의 기세는 듣던 대로 대단했다.
6만여 명이 넘는 그리고 기병이 주축이 된 남명의 근왕군이 왔음에도 주눅이 들기는커녕 당장이라도 남명군을 치려는 듯 함성을 지르고 북을 치며 남명군을 위협했다.
왜구들이 기세에 오히려 남명군이 주눅이 들었다.
“흐음. 듣던 대로 왜구들의 기세가 대단하구나!”
왜구들이 기세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해적 떼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주영락은 직접 왜구들을 직접 보고 나서야 그들이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정규군처럼 갑주를 갖추고 있었고, 노획한 수백 문의 최신형 컬버린, 그리고 조총으로 무장해 있었다.
그는 힘겨운 전투가 될 것이라는 직감했다.
“주군! 남명군이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진영도 방금 당도한 남명군을 보았다.
“흐음. 제법이로구나!”
주영락이 이끄는 남명군은 그동안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상대한 오합지졸과는 달리 제법 진을 잘 펼치고 있었고 군율도 엄격한 것 같았다.
“흐음.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전투를 해보겠구나.”
전장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였기에 본능적으로 그는 쉬운 싸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남명군을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은 여전했다.
“남명군을 모조리 도륙하고 도성으로 향하자!”
“와아아아아!”
왜구는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창검을 높이 쳐들고 깃발을 휘날리며 남명군을 위협하자, 남명군도 북을 치고 대각을 불고 함성을 지르며 맞대응했다.
양측의 팽팽한 대결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주영락 장군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창과 칼에 우리 대명국의 운명이 달렸다! 저놈들은 노략질이나 하는 왜구들에 불과하다. 대명국의 전사들이여! 오만방자한 오랑캐를 무찌르고 대명국을 지키자!”
“와아아아아!”
주영락 장군의 비장한 말에 남명 군이 함성을 지르며 전의를 불태웠다.
“공격하라! 왜구들을 모조리 죽여라!”
곧 주영락 장군이 칼을 빼 들고 공격하라는 명을 내렸고, 북소리와 대각 소리가 남명군 진영에 울려 퍼졌다.
명령이 떨어지자 1만기의 기병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왜구의 진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1만기의 기병은 기세 좋게 왜구를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이미 죽을 각오로 전장에 나섰기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순식간에 기병은 왜구 전위대가 있는 곳까지 당도해 보병 중심인 왜구들을 공격했다.
기병대에서 휘두르는 칼과 창에 왜구들은 죽어 나갔고, 말에 짓밟히고 창에 찔려 죽은 왜구의 시체가 어느덧 수북이 쌓였다.
“주…. 주군 전위대가 밀리고 있습니다.”
이제껏 승승장구하며 북상했던 왜구들은 남명군의 뜻밖의 기세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흐음. 생각대로 전투를 할 줄 아는 장수로구나. 전위대를 퇴각시켜라!”
“존명!”
선두에서 선 전위대가 남명의 기병대에 밀리자,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퇴각을 명했고, 왜구들은 일제히 퇴각했다.
“장…. 장군! 왜구들이 도주하고 있사옵니다.”
왜구들이 기병대에 밀려 퇴각하자, 남명군 진영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기병 1만기를 더 투입시켜라!”
“존명!”
보병 중심의 왜구들이 기병대에 밀리자, 승기를 확실히 잡으려는 듯 기병 1만기를 더 투입시키라 명을 내렸고, 곧 1만기의 기병들이 추가로 투입돼 도주하는 왜군들을 추격했다.
기병 1만 기가 추가 투입되어 왜구를 추격하자 명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고 명군은 왜구를 모조리 도륙하려는 듯 맹렬한 기세로 도주하는 왜구를 추격했다.
“윽…. 이게 뭐야!”
“진…. 진흙이야….”
그러나 기세 좋게 왜구를 추격하던 기마대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기마대에게 넓은 개펄 같은 진흙밭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하하하! 보기 좋게 걸려들었구나!”
기세 좋게 돌진하던 기마대가 펄밭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와키자카가 파놓은 함정에 주영락이 이끄는 남명군이 제대로 걸려든 것이었다.
그가 보낸 전위대 뒤쪽 갈대밭은 기마대가 제대로 진을 펼칠 수 없는 진흙밭이었다.
게다가 전날 폭우가 내렸기에 그곳은 진흙이 빗물과 섞여 완전히 곤죽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 곳곳에 웅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것을 인지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곤죽이 된 진흙밭 앞에 전위대를 보내 기마대를 유인하도록 한 것이었다.
백전노장 주영락 장군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그런 계책을 쓸 것이라는 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남명 기병대의 말들의 말 말굽은 진흙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지…. 금이다. 조총과 화포를 쏟아부어라!”
“존명!”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명이 떨어지자, 갈대밭 좌우에 매복하고 있던 수천 명의 조총병이 갑자기 나타나 허우적거리는 기병대를 향해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타타타 탕!-
갑자기 갈대숲 사이로 수천 명의 왜구가 나타나 조총을 퍼붓자, 남명 기병대는 사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