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허균, 신대륙을 찾아! (1)
“폐하! 올바른 말씀이옵니다. 경국대전은 거대한 제국을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좌의정 율곡이 이균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말했다.
병조판서 류성룡, 도승지 이항복 등도 이제야 이균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하오나 나라의 근간이 되는 법 제도를 급격히 바꾸게 되면 혼란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중한 성격의 류성룡이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흐음. 병판의 걱정도 이해는 되나, 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법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소이다. 오히려 너무 늦었소. 경국대전 같은 낡은 법으로는 제국을 통치할 수 없소이다.”
“그리하시옵소서. 폐하! 제국의 위상에 걸맞은 법이 필요한 시기이옵니다.”
그러나 이균은 법 제도를 혁신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대부분 대신들은 이균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
“자. 민법상 권리 의무의 주체가 되는 것은 사람이다. 그것은 이제 알겠는가?”
“그……. 그러하옵니다. 폐하!”
법 제도를 근대적으로 바꾸기로 한 이균은 우선 제국의 관료들이 법의 기본개념을 알아야 하기에 법 개정 작업에 동참할 신진 관료들을 상대로 민법총칙 강의를 직접 했다.
생전 처음 듣는 외계어 같은 법률 용어에 난다 긴다 하는 행정고시에 붙은 신진 관료들도 크게 혼란스러워했다.
“자. 그럼 사람이 권리 의무의 주체가 된다고 했는데, 언제부터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저…….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갓 행정고시에 합격한 젊은 관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균을 바라보았다.
“자. 그래! 태아가 어미의 복중에 있을 때를 사람으로 보아야 하겠느냐. 아니면 태아가 울음을 터트리며 어미의 뱃속에서 나왔을 때를 사람으로 보아야 하겠느냐! 말해 보거라!”
이균이 재밌다는 듯 젊은 관료들을 바라보았다.
오래간만에 법에 대해 강의를 하니, 잘나가던 검사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저. 폐하! 태아는 이미 어미의 몸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체이니 그때부터 사람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젊은 관료가 용기 있게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그러자 이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흐음. 그래.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럼 어미의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를 사람으로 본다면 그 태아가 땅도 살 수 있고, 물건도 살 수 있고, 또 그 아비가 죽으면 상속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냐?”
“아……. 저 그것이…….”
그러자 방금 태아를 사람으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을 밝힌 젊은 관리가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렸다.
“폐하! 그렇다면 어미 몸에서 나와야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까?”
“흐음. 그래. 어미 몸속에 있을 때 태아를 사람으로 보게 되면 권리관계가 복잡해질 수 있으니, 태아가 어미 몸속에서 나왔을 때를 사람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그 태아가 어미 몸속에서 얼마나 나왔을 때를 사람으로 보는 것이 옳겠느냐? 머리만 나와도 사람이냐? 아니면 몸 전체가 나와야 사람이냐?”
이균이 또다시 알쏭달쏭한 질문을 하지 관료들이 혼란스러워했다.
“폐하! 어미 몸 밖으로 나왔으니 머리만 나와도 사람으로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폐하! 어미의 몸과 태아는 탯줄로 연결되어 있으니, 탯줄을 자르지 않으면 어미에게서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볼 수 없으니 탯줄을 잘라야 사람으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나와 울음을 터트리면 사람으로 봐야 합니다.”
신진 관료들은 서로의 의견을 밝혔고, 이균은 그들을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하하. 그대들의 말이 다 일리가 있다. 다만 일반적으로 그 태아가 엄마의 몸에서 전부 나왔을 때를 사람으로 보는 것이 맞다. 자 그래 민법상으로는 사람의 시기를 이렇게 보는데, 형법상으로는 어떻게 보는 것이 맞겠느냐? 자 우리가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이면 사형을 시키도록 법조문을 만들자고 했는데……. 그럼 어미 배 속에 있는 태아를 죽이면 살인죄가 되겠느냐?”
“저. 폐하! 방금 그 태아가 어미 뱃속에서 나와야 사람으로 볼 수 있다고 했으니, 살인죄로 다스릴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한 젊은 관료가 말하자, 대다수 관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 젊은 관료가 손을 번쩍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저. 폐하! 민법의 사람과 형법의 사람은 좀 달리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저놈이.’
젊은 관리가 민법과 형법의 사람의 시기를 달리 보아야 한다는 말을 하자, 이균이 그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그것이 무슨 뜻인지 말해 보아라!”
“폐하! 형법의 살인죄 처벌 규정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옵니다. 세상에 사람의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따라서 형법에서의 사람의 시기는 민법에서의 그것보다 좀 더 앞당겨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되옵니다.”
신진 관료는 황제의 앞임에도 불구하고 주눅이 들지 않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흐음. 저놈이 제법 레걸마인드가 있는 놈이구나.’
이균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소신 허균이라 하옵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허균이라 밝히자 이균은 흠칫 놀랐다.
명망가 자제로 태어났으나 당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서얼, 중, 기생 등과 어울리며 신분제도 철폐를 외치고 제 맘대로 살다간 풍운아 허균!
명문가 집안의 자제답게 그는 이미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고, 이번 행정고시에도 수석으로 합격했다.
조선은 당시 시대를 앞서나간 혁명적 사상가였던 그를 품어줄 그릇이 되지 못했다.
자유분방하고 혁신적 주장을 했던 그는 결국 유교적 세계관에 빠져 있던 기득권층의 눈 밖에 나게 되고 결국 광해군 때에 반역죄로 처형되어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다.
그런 허균을 직접 보니 이균은 신기하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듣던 대로 그는 율곡 못지않게 똘똘했다.
“흐음. 그래. 그대의 말이 타당하다. 그럼 형법상으로는 사람의 시기를 언제로 보아야 하는 것이 좋겠는가?”
“폐하! 소신이 생각하기에 형법상 사람의 시기를 너무 늦게 잡으면 생명에 대한 경시 풍조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형법상 사람의 시기는 가능한 빨리 잡는 것이 좋은 것 같사오니, 어미가 출산을 위해 진통을 느낄 시를 사람의 시기로 잡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흐음. 저놈이 다수설인 진통설을 알고 있구나. 역시 똑똑하다 똑똑해!’
허균이 형법상 사람의 시기에 대해 다수설과 판례로 인정되고 있는 진통설에 대해 언급하자, 이균은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 그대의 말이 일리가 있도다. 형법상으로는 사람의 시기를 어미가 진통을 느꼈을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자 이렇게 법이라는 그 조문의 해석에 대해 이론이 분분하고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니, 그 이론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폐하!”
이균은 똘똘한 신진 관료들에게 민법, 형법 등 법이론을 상세히 가르쳐 주었다.
이들이 근대법 이론을 체계적으로 알아야만 법 제도를 정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교태전
“폐하! 무슨 내용을 그리 적고 계시는 것이옵니까?”
오래간만에 황후의 처소를 찾은 이균은 잠을 잘 생각을 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하하하. 별것 아니오. 요즘 젊은 관리들을 상대로 법을 강의하고 있지 않소. 그 자료를 준비하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구려.”
이균이 빙그레 웃으며 황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요즘 젊은 관리들을 상대로 강의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잘나가는 엘리트 검사로 있다가 졸지에 조선으로 회귀하여 왕 노릇을 하고 하느라 법에 대해 까맣게 잊고 지냈었는데, 강의하며 다시 법 공부를 하니 법대에 다니던 학창 시절, 사법고시 준비를 하던 고시생 시절이 추억처럼 떠올랐다.
“그러십니까. 그래도 늦은 시간까지 이리 고생하시면 몸이 상하시니 쉬시면서 하시지요.”
여전히 곱상하고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는 황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균을 바라보았다.
“뭐. 내가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니 괜찮소이다. 그래 황후는 요즘 건강이 좀 어떻소.”
이균은 오히려 몸이 약한 황후를 걱정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고 있는 황후였지만, 아이를 많이 낳은 탓인지 아니면 알지 못하는 지병이 있어서인지 최근 들어 황후의 건강이 좋지 않은 날이 많아 이균은 항상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였다.
“소첩은 괜찮사옵니다.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그래요. 건강이 가장 중요한 것이오. 항상 건강을 챙기세요. 어의가 챙겨주는 약도 챙겨 드시고…….”
이균이 황후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알……. 알겠사옵니다.”
이균이 황후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황후가 부끄러운 듯 볼을 붉혔다.
“그나저나 어찌 그리 미모가 변하지 않는 것이오?”
부끄러워하는 황후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폐하…….”
이균이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자, 황후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자. 이리 오시오.”
황후의 아름다운 미모에 매료된 이균은 서책을 내던지고 황후의 손을 덥석 잡아당겼고 황후는 얼떨결에 이균의 품이 안겼다.
“폐……. 폐하!”
황후는 부끄러움에 말을 더듬었으나, 다른 한편 지아비의 따스한 품에 안기니 행복했다.
이균은 와락 황후를 끌어안아 발그레한 황후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포개며 그녀를 눕혔고 교태전의 불은 꺼졌다.
***
“자. 이게 얼마 만인가.”
이항복이 히죽거리며 이덕형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아니. 처자가 있는 사람이 또 기방에서 보자는 것이요.”
이덕형은 오래간만에 사적인 자리에서 본 이항복이 반가우면서도 기방에서 보자는 이항복이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이 사람이 고리타분하게. 아니 뭐 처자가 있는 사람은 기방에 못 오게 하는 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자네도 솔직히 좋지 않은가? 그러면서 고상한 척하기는……. 아니 그런가. 교산?”
“하하하. 그러하옵니다. 자고로 사내는 계집을 알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균이 술잔을 단숨에 비운 후 그 옆에 있는 기생의 보드라운 손을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필운! 저자가 도대체 누군데 데리고 온 것이요.”
“아니. 교산을 모른다는 것인가? 동지충추부사를 지낸 초당 선생의 자제로 신동으로 장안에 널리 알려진 자가 아닌가! 그리고 이번에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지 않았는가!”
이항복은 이번에 행정고시에 수석 합격한 허균을 함께 데리고 나왔다.
그는 단번에 허균이 자신처럼 농담과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허균이 자신과 맞는 자라 여겨 그와 친분을 텄고 이덕형과의 만남에도 허균을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아……. 그래. 이자가 그 유명한 자구만. 그 총명하기가 율곡 선생 못지않다는…….”
“바로 이자가 그자이네.”
“아. 그렇구만. 이렇게 천재를 만나게 되다니 영광이네.”
이덕형이 허균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아니옵니다. 소신이 이렇게 조정을 이끌어가는 중신분들과 함께 술자리를 하게 되니 영광이옵니다.”
“그래. 요즘 폐하께서 하는 강연을 듣고 있다고 하던데, 어떤가?”
이항복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주 유익하옵니다. 폐하께서는 그 많은 법과 이론을 어떻게 그리 잘 아시는 것인지……. 대단하옵니다.”
“그러게 말일세. 폐하는 모르시는 게 없는 분이네. 참으로 대단한 분이시지. 폐하가 아니었으면 조선이 이리 대제국이 될 수 있었겠나.”
이항복이 곱상한 기녀가 집어주는 안주를 받아먹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