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식민지 전쟁 (6)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하비에르가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느닷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고 묻자, 까를로스가 당황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 우리 군사들이 잘 싸우고는 있지만, 절반 이상이 주검이 되었네. 게다가 살아남은 병졸들도 태반이 부상을 당하거나 지쳐 있는 상황이네. 게다가 조선군의 숫자는 저리 많으니……. 얼마 버티기 힘들 것이네.”
하비에르 장군이 가장 아끼는 수하 카를로스 대령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는 대한제국군을 맞아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싸울수록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제국군은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집요하고 강했다.
“장……. 장군!”
하비에르 장군이 속마음을 털어놓자, 까를로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스페인 병졸들이 대한제국의 대군을 맞이해 결사 항전을 벌이고는 있었으나, 스페인군은 지쳐갔고 사실 얼마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까를로스도 알고 있었다.
“나 하나 죽는 것이야 상관없지만, 이대로 병졸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구만!”
스페인군이 아무리 격렬하게 저항한들 베라크루즈는 곧 제국군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어차피 베라크루즈를 잃을 것인데, 하비에르는 무의미하게 병졸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군! 군인은 전장에서 죽는 것이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군은 모두 베라크루즈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까를로스는 전장에서 죽겠다며 끝까지 싸우자 말했다.
과연 그다운 말이었다.
군인이 된 것을 평생의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는 그에게, 항복은 있을 수 없는 치욕스러운 것이다.
항복하느니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것이 무장의 도리라 여기고 있는 그였다.
“흐음. 카를로스……. 이곳의 우리들의 묫자리가 되겠구나.”
하비에르는 하늘의 촘촘히 떠 있는 별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장군. 스페인군이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일주일이 넘도록 베라크루즈를 함락하지 못한 대한제국과 포르투갈의 연합군은 막사에 모여 회의를 했다.
“흐음. 그렇소이다. 적장의 이름이 하비에르라 하였소? 비록 적장이지만, 용장이자 덕장인 것 같소. 서반아에 저런 장수가 있다니…….”
아카풀코를 단숨에 점령한 이억기 장군은 베라크루즈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하비에르 장군의 지휘 아래 스페인군은 격렬히 저항했다.
비록 적장이지만 같은 장수로서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베라크루즈에서 이렇게 시간을 끌면 다른 전선도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총공세를 취해 요새를 함락해야 할 것입니다.”
상황이 답답한지 원균이 거들고 나섰다.
원균은 병졸들의 희생이 있더라도 모든 병력을 동원해 베라크루즈를 점령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흐음. 그렇긴 하지만, 요새가 너무 험한 곳에 있어 우리 쪽의 인명 손실이 커질 수 있습니다. 스페인군의 식량과 탄환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포르투갈 군사령관 스피놀라 장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군 수뇌부는 당장에라도 총공세를 해 요새를 함락해야 한다는 입장과 요새를 봉쇄하여 그들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억기 장군이 뜨거운 녹차를 마시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흐음. 스페인군이 비록 잘 막아 싸우고는 있지만, 이미 병력의 절반을 잃은 상태요. 이곳에서 오래 머무르면 다른 전선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소. 그리고 그렇게 되면 쿠바 등에 주둔한 스페인 원군이 올 수도 있으니, 내일 총공세를 펼치도록 합시다. 베라크루즈를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오.”
이억기는 고심 끝에 베라크루즈에 오랜 시간 발목 잡힐 수 없다고 여기고 총공세를 펼치기로 했다.
***
-퍼퍼퍼 펑!-
다음 날 아침 천지를 뒤흔드는 화포 소리와 함께 대한제국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요새를 향해 늘어선 수백 기의 화포는 일제히 요새를 향해 매캐한 연기와 함께 커다란 철환을 토해내었고, 철환은 요새를 맹렬히 타격했다.
포병의 지원과 함께 제국군, 포르투갈군 그리고 인디오로 구성된 보병들이 요새를 향해 돌격했다.
조총수들은 대열을 이루어 화망을 구성하여 스페인군을 타격했다.
“공격하라! 적들을 섬멸하라!”
원균은 여전히 선봉에서 갑사들을 독려했고, 갑사들은 앞다투어 험준한 요새를 향해 나아갔다.
“화포를 방포하라. 요새를 지켜라!”
제국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스페인군도 반격을 가했다.
동원 가능한 모든 화포를 쏟아부었고, 소총수들은 요새를 향해 새까맣게 달려오는 제국군을 향해 납탄을 퍼부었다.
스페인군의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하비에르 장군의 지휘 아래 스페인군은 동원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해 요새를 지켰다.
총을 쏘는 이들이 있었고, 그리고 창을, 창이 없으면 돌이라도 던져 제국군과 포르투갈군을 쓰러트렸다.
요새는 매캐한 연기와 함께 곳곳이 불타오르고, 치열한 교전에 부상을 입은 양측 병졸들의 신음 소리가 곳곳에 울려 퍼졌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스페인군의 극렬한 저항에도 제국군의 강력한 포격과 조총 공격에 의해 스페인군은 점차 희생되어갔고 총공세를 편 제국군과 포르투갈군 그리고 인디오들은 어느새 요새의 중앙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장군. 더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문이 열릴 것 같사옵니다.”
요새의 문이 깨지려 하자 하비에르 장군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백병전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까를로스 대령이 비장한 모습으로 하비에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칼을 빼 들고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까를로스 여기까지인 것 같네.”
그러나 하비에르 장군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장군. 무슨 말이옵니까?”
“요새의 문을 열겠네. 더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네. 아까운 병졸들의 목숨을 희생하고 싶지 않네.”
결국, 하비에르는 항복을 결심했다.
“장……. 군. 아니 되옵니다. 어찌 항복을…….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 참된 군인의 길이옵니다.”
허나 까를로스는 항복을 하자는 하비에르의 결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군인의 길을 함께 해온 하비에르였기에 그의 뜻을 항상 따라왔지만, 치욕적인 항복을 하겠다는 결정만은 따를 수 없었다.
“까를로스! 그대의 울분은 이해하네. 하지만 병졸들을 좀 보게. 모두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이네. 어차피 베라크루즈는 적들의 손에 떨어지고 말 것이네. 결사 항전으로 싸워 봐야 아무 의미 없는 개죽음일 뿐이네…….”
“장……. 군!”
하비에르가 비통한 목소리로 말하자, 까를로스는 살아남은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몸이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이 곧 요새의 문의 열리고 제국군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두려운 눈빛이 가득했고, 무기를 든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하비에르의 말대로 곧 그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을 것이다.
“장……. 장군!”
까를로스는 더는 반대하지 못하고 흐느꼈다.
“까를로스…….문……. 을 열게!”
“장……. 장군!”
결국, 일주일 이상 버티던 베라크루즈 요새 위에 항복을 의미하는 백기가 올라갔다.
“장……. 장군! 적군이 항복한 것 같사옵니다.”
요새 위에 커다란 백기가 올라오자 부관이 흥분한 목소리로 이억기 장군에게 보고했고, 이억기는 즉시 망원경을 통해 이를 확인했다.
“흐음. 드디어! 공격을 중지하고 투항한 서반아 군을 모두 살려주도록 해라!”
스페인군이 드디어 항복을 선언하자, 대한제국군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인디오들은 스페인군에 대한 원망이 가득해 그들이 항복한 스페인군을 살육할 수 있기에 이억기 장군은 투항한 스페인군을 죽이는 자는 군령으로 엄히 다스리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존명!”
곧 굳건했던 요새의 문이 열렸고, 결사항전하던 스페인군은 무기를 모조리 버리고 쏟아져 들어오는 대한제국군에게 투항했다.
“장……. 장군! 눈을……. 눈을 뜨시옵소서!”
그러나 수하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을 선언했지만, 그 치욕스러움을 견디지 못한 하비에르 장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까를로스는 싸늘히 식어버린 하비에르의 육신을 부여잡고 흐느껴 울었다.
요새는 곧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깃발이 올라갔고, 마침내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인 베라크루즈는 대한제국의 것이 되었다.
“장군! 적군의 수장이 자결했다고 하옵니다.”
“흐음. 그자의 이름이 하비에르라 하였는가?”
“그러하옵니다.”
이억기는 비록 적장이지만, 적은 병력으로 베라크루즈를 일주일 이상 사수한 하비에르에 대한 존경심이 들었다.
“그자를 잘 묻어주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이억기 장군의 명에 따라 제국군은 하비에르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잘 묻어주어 적장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주었다.
***
누에바 에스파냐 총독부
“총독님. 결국, 베라크루즈가 조선군의 수중에…….”
베라크루즈가 결국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돈 안토니우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하비에르 장군이 생각보다 잘 버티어 주어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 보았으나, 대한제국의 대군을 맞아 버티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브라질에 있던 포르투갈군마저 합류해 베라크루즈를 공격하니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동방으로 통하는 관문과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을 모두 잃게 되었으니, 누에바 에스파냐의 스페인군은 이제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어찌 되었느냐?”
“성……. 성을 내주고 자결했다고 하옵니다.”
비서관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비에르마저…….”
하비에르 장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을 들은 돈 안토니우의 미간은 더욱 찌푸려졌다.
신대륙에서 그만큼 지략이 뛰어나고 부하들의 신망이 두터운 덕장이자 용장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몇 안 되는 장수다운 장수를 잃었으니 돈 안토니우는 그 어느 때보다 슬픔이 컸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꼬?’
아카풀코와 베라크루즈를 잃은 돈 안토니우의 근심은 깊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본국의 지원이 없는 한 대한제국군을 막을 길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는 본국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조선 놈들에게 신대륙을 넘겨주어야 하는가?’
돈 안토니우는 말이 없이 지도를 바라볼 뿐이었다.
***
아카풀코와 베라크루즈를 함락한 대한제국군은 거침없이 누에바 에스파냐의 스페인 식민지를 점령해나갔다.
포르투갈, 인디오들을 포함한 연합군은 군을 3군으로 나누어 1군은 베라크루즈를 떠나 멕시코만 연안을 따라 북진하여 지금의 플로리다 인근까지 점령했다.
그리고 제2군은 중앙으로 향해 지금의 파나마 일대를 점령하고, 미국 중부 일대까지 나아갔으며, 제3군은 서부해안을 따라 지금의 캘리포니아 일대까지 진격했다.
남아 있는 스페인군은 정착민들과 함께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이미 주력군을 잃은 상태였기에 속수무책으로 식민지를 연합군에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스페인군은 누에바 에스파냐를 대한제국군에 모두 내어주고, 남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 만세!”
“대한제국 만세!”
스페인군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완승을 하고 그들을 몰아낸 제국군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승리를 자축했다.
이로써 북중미에 이르는 광대한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가 대한제국군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