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식민지 전쟁 (4)
누구의 호위도 받지 않고 적장을 향해 어찌 보면 무모할 정도로 돌진하는 원균의 모습은 얼핏 보면 마치 관우와 같았다.
제법 수염이 멋있게 나 있었고, 환도를 빼 들고 거치적거리는 스페인군을 모조리 베어 버리며 돌진하니 대한제국군과 스페인군은 잠시 넋을 잃고 이를 지켜볼 정도였다.
어느새 원균은 시엔 푸에고스를 호위하던 병졸들도 모조리 도륙하고 홀로 남은 시엔 푸에고스를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적장이 선봉에 서서 직접 말을 달려 단숨에 수많은 스페인군을 베어버리고 자신에게 오자, 시엔 푸에고스는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원균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제법 장수다운 것 같은데,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목을 취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할 것이냐.”
원균은 제법 장수다운 기세를 가진 시엔 푸에고스를 살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시엔 푸에고스가 항복을 거부하면, 제국군을 힘들게 할 것이기에 그를 살려두기는 어려웠다.
“하하하. 감히 조선군 따위가 나와 대적을 하겠다는 것이냐. 네놈 목이나 잘 간수하거라!”
하지만 자존심 강한 시엔 푸에고스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이 없었다.
“하하하. 서반아에 그대와 같은 장수가 있다니……. 그렇다면, 아쉽지만 그대의 목을 내가 취할 수밖에 없겠구나.”
시엔 푸에고스가 항복을 거절하자, 원균이 환도를 높이 들고 그를 향해 달렸고, 시엔 푸에고스도 칼을 빼 들고 원균을 향해 말을 달렸다.
곧 원균과 시엔 푸에고스의 칼은 서로 부딪혀 커다란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시엔 푸에고스의 검술도 만만치 않기에 두 용장은 꽤 오랫동안 치열한 일기토를 벌였다.
“제법이구나. 허나 이제 네놈의 목을 칠 수밖에......”
하지만 원균은 이제 지루한 싸움을 끝내려는 듯 시엔 푸에고스의 일격을 피한 후 그의 목을 단숨에 베었고 결국 시엔 푸에고스의 목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적장의 목을 벤 원균은 그의 목을 높이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
“대한제국 만세!”
시엔 푸에고스의 목이 올라가자, 대한제국군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으나, 스페인군은 충격을 받고 고개를 떨구었다.
“푸에고스의 목이……. 어찌 이런 일이.”
누구보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그를 가장 아끼던 돈 안토니우였다.
“이놈들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시엔 푸에고스의 목이 달아나자, 돈 안토니우는 이성을 잃고 칼을 빼 들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총독님! 아니 되옵니다. 이미 승패가 기운 전쟁이옵니다.”
부관과 그를 호위하는 병졸들이 가까스로 그를 막아섰지만, 총독은 여전히 울부짖으며 발광을 했다.
원균이 시엔 푸에고스의 목을 자르자, 스페인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여 무기를 내려놓고 도주하였다.
“적들을 섬멸하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원균이 이끄는 기마대는 도주하는 스페인군을 끝까지 추격해 그들의 목을 베었고, 요새에서는 보병들까지 나와 스페인군을 향해 조총 세례를 퍼부었다.
“이……. 이런.”
돈 안토니우는 5만여 명에 이르던 대군이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린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대한제국군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그들을 가볍게 여긴 것이 패착이었다.
“총독님! 퇴……. 퇴각을 조선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대한제국군이 총독이 있는 지휘부를 향해 몰려오자 부관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퇴는 없다! 모두 맞서 싸워라! 푸에고스의 복수를 해야 할 것이다!”
돈 안토니우는 여전히 미쳐 날뛰었다.
“총독님! 아니 되옵니다. 푸에고스 장군뿐만 아니라 프란시스코 장군도 전사하였습니다. 1군과 2군이 모두 괴멸 상태이옵니다. 퇴각해야 하옵니다.”
“흑……. 흑 어찌 이런 일이. 퇴……. 퇴각하라!”
돈 안토니우는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퇴각을 명했고, 살아남은 스페인군은 모두 줄행랑을 쳤다.
“와아아아아!”
스페인군이 물러나자, 제국군 갑사들과 병졸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장군. 적군이 모두 물러났습니다.”
부관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하며 이억기 장군을 바라보았다.
“흐음. 서반아 군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구나!”
이억기는 총독이 직접 이끌고 온 병력이기에 그가 처음 상대한 아카풀코의 스페인군보다 훨씬 강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스페인군은 나약했다.
아카풀코를 사수하는 데 성공한 대한제국군은 며칠간 휴식을 취하며 전열을 정비했다.
한편 아카풀코에서 주력군을 잃은 누에바 에스파냐의 스페인군은 커다란 충격을 받고 총독부가 있는 곳으로 후퇴하였다.
스페인군이 대한제국군에 패배하여 주력군 수만 명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은 누에바 에스파냐 곳곳에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누에바 에스퍄냐는 동요했다.
스페인군에 의해 무참하게 살육당한 인디오들의 분노가 가장 컸다.
그들을 억압하던 스페인군 세력이 약해지자, 인디오들은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켜 스페인군을 공격했고, 주력군을 잃은 스페인군은 그들이 무시하던 인디오들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열을 정비한 이억기 장군은 곧 봉기를 일으킨 인디오 추장들과 회동을 가진 후 그들과 연합하여 스페인군과 교전을 벌이니 스페인군을 설상가상으로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
신대륙 총독부
아카풀코에서 대한제국군에 대패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스페인군 진영은 암울한 상태였다.
“총독님! 곳곳에서 인디오들이 봉기를 하고, 조선군도 이들과 연합해 저희 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작전 장교가 지금까지의 전황을 총독에서 설명했고, 전황을 전해들은 총독 돈 안토니우를 비롯하여 회의장에 모인 스페인군 수뇌부들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감히 인디오 따위가…….”
곳곳에서 밀리고 있는 전선의 상황을 표시한 지도를 본 돈 안토니우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황이 이대로 흘러간다면 스페인군은 곧 신대륙에 건설한 식민지 전체를 대한제국군에 내어주게 될 것이다.
“조선군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신대륙의 스페인군은 대한제국을 황제의 나라로 인정하기 싫은지 계속 조선군이라 칭하고 있었다.
“조선군이 원주민과 연합해 베라크루즈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무엇이라! 베라크루즈로…….”
작전장교의 입에서 베라크루즈라는 말이 나오자, 돈 안토니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베라크루즈는 아카폴코와 함께 또 다른 전략적 요충지였다.
아카풀코가 동방으로 통하는 관문이라면, 베라크루즈는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베라크루즈를 잃으면 유럽으로 통하는 항로를 잃어버리게 된다.
아카풀코에 이어 베라크루즈마저 잃게 되면 신대륙의 스페인군은 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고립되어 버리게 되기에, 돈 안토니우의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베라크루즈를 방어하는 병력은 어떻게 되나?”
“채 삼천이 되지 않습니다.”
베라크루즈를 방어하는 병력이 3천도 안 된다고 말하자, 돈 안토니우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제 그도 삼천의 병력으로 대한제국의 강력한 대군을 맞아 싸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라크루즈마저 잃게 되는가?”
망연자실한 돈 안토니우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총독님! 속히 본국에 원군을 보내 달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누에바 에스파냐의 식민지 모두가 조선에게 넘어가 버립니다.”
총독 친위부대를 이끄는 파블로 장군이 입을 열었다.
“누가 그것을 모르나. 본국에 수차례 원군을 보내 달라 연통을 넣어도 답이 없지 아니한가!”
돈 안토니우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파블로를 바라보았다.
식민지의 스페인군은 수차례 본국에 원군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스페인 본국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어 원군을 보내줄 여력이 없는지, 아무런 답이 없었다.
“흐음. 베라크루즈까지 잃게 되면 우리는 신대륙에 고립되고 말 것이오. 베라크루즈는 반드시 사수해야 할 것이오. 동원 가능한 병력을 모두 동원해 베라크루즈를 지원하고, 정 안 되면 정착민들이라도 징집하도록 하시오.”
돈 안토니우는 베라크루즈만은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착민들이라도 징집해 베라크루즈를 지원하기로 했다.
“알……. 알겠습니다.”
돈 안토니우의 명령이 떨어지자, 스페인 총독부는 곧 정착민들을 징집하고 동원 가능한 병력을 소집해 베라크루즈에 보냈다.
***
베라크루즈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인 베라크루즈에 전운이 감돌았다.
강제 징집된 정착민들과 총독부에서 보낸 지원군이 속속 베라크루즈에 도착해 대한제국군의 침략을 대비하고 있었으나, 분위기는 침울했다.
베라크루즈 사령관 하비에르 장군이 어두운 표정으로 전투준비를 하는 스페인군을 바라보았다.
강제 징집된 정착민과 지원군이 도착했다고는 하나, 그들을 모두 합쳐도 병력수가 채 1만5천이 되지 않았다.
그도 대한제국군이 스페인 주력군을 아카풀코에서 괴멸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2만도 안 되는 병력으로 베라크루즈를 사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곧 조선 놈들이 들이닥칠 것인데 그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비에르 장군이 그가 총애하는 충복 까를로스 대령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가지고 있는 병력으로 대적할 수밖에요.”
까를로스는 암울한 상황임에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하하. 그대의 말이 맞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우리 군이 모두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베라크루즈는 반드시 사수해야 할 것이네. 이곳마저 조선군에 넘어가면 누에바에스파냐는 고립이 되고 말 것이야.”
스페인이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의 자손인 하비에르 장군은 크고 작은 여러 전투에 참전해 전투경험이 풍부한 자로, 아버지 빽으로 장군의 타이틀을 단 다른 스페인 장군들과 달리 지략이 뛰어나고, 전쟁에서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봉에 서 부하들의 신망이 두터운 자였다.
“장군. 제법 험준한 곳에 요새가 있고, 그 요새 또한 견고하니 요새에서 결사 항전의 자세로 농성전을 벌이면, 승산이 있을 것이옵니다.”
“흐음. 자네의 말을 들으니 힘이 나는구먼. 그래 어차피 이리되었으니 후회 없는 일전을 치러 보세!”
유능한 지휘관 하비에르의 지휘 아래 스페인군은 요새를 보강하고, 화포, 소총 등을 정비하며 대한제국군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
“적……. 적군이다.”
그리고 얼마 후 약 4만에 이르는 대한제국군이 마침내 베라크루즈에 도착했다.
군악대의 장엄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의 깃발 아래 수백 기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5천 기가 넘는 기병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였으며, 뒤를 이어 팽배수, 창수, 조총병 등이 대열을 갖추어 오고 있었으며, 수백 기의 화포가 말과 소에 이끌려 오고 있었다.
제국군의 위용만으로 스페인군은 겁을 집어먹을 정도였다.
“장군. 드디어 베라크루즈입니다.”
“흐음. 요새가 제법 견고하구만!”
베라크루즈에 도착한 이억기 장군은 요새를 가장 먼저 살펴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요새는 험준한 곳에 있어 했고 제법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요새를 본 이억기는 요새를 공략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장군. 드디어 조선군이…….”
“결국, 왔구나. 모두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어라”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라는 하비에르의 명령이 떨어지자, 스페인군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긴장된 눈빛으로 대한제국군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