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은광을 노리는 스페인 (2)
그러나 조선군은 싸우다 전멸을 할지언정 스페인군에 항복할 의사가 없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그들을 믿고 있는 기술자들과 그의 가족들이었다.
하지만 요새가 떨어지면, 어차피 기술자들과 그의 가족들도 스페인군에 몰살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선군은 마지막 한 명까지 스페인과 싸우기로 했다.
조선군은 어느새 300여 명이 죽거나 상처를 입어 백병전을 벌일 수 있는 갑사들은 7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요새의 중앙문 뒤에서 환도와 창을 들고 밀집대형을 이루어 스페인군을 기다렸다.
“두려워하지 말거라! 서반아 놈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천국에서 함께 승리의 축배를 들자!”
“하하하하!”
이시언 대좌가 칼을 빼 들고 갑사들을 향해 외치자 갑사들이 일제히 호탕한 웃음으로 응답했다.
전장은 그들에게 마지막 운명을 맞이할 딱 좋은 장소였다.
적들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굴욕적인 항복을 하느니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기를 택한 그들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와아아아아아!”
-슈~웅-
그런데 그 순간 지축을 흔드는 함성과 함께 조선군의 요새를 포위하고 있던 스페인군이 비명 소리를 내며 쓰러져 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기세 좋게 조선군 요새를 함락할 것 같았던 스페인군이 어디선가 날아오는 활을 맞고 쓰러져 나가자, 결사 항전을 준비하고 있던 이시언 대좌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대좌님 원……. 주민들이…….”
부관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무엇이라? 원주민들이?”
부관이 원주민들이라는 말을 하자, 이시언 대좌는 다급히 망루에 올라 요새 밖을 바라보았다.
“아니 저자들은…….”
이시언 대좌는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어림잡아도 만여 명이 넘는 신대륙의 원주민들이 몰려나와 스페인군을 향해 조잡해 보이는 활과 창을 던지며 그들을 억압하던 스페인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요새를 집어삼키려는 스페인군과의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던 갑사들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승에서의 삶이 마지막이라 여기고 전우들과 마지막 눈인사를 나누고 요새의 문을 열고 스페인군을 향해 돌진하려는 순간 원주민들이 새까맣게 몰려나와 스페인군을 공격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장군! 인디오들이 우리 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한편 조선군 요새를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이던 스페인군은 느닷없는 원주민들의 공격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인간 취급조차 하지 않고 그들을 혹독하게 대하며, 광산 등에서 일하다 쓰러져 죽으면 마치 소모품을 교체하듯 다른 인디오를 투입시켜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던 스페인군이었기에, 그런 인디오들이 감히 스페인군을 공격할 것이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무……. 무엇이라!”
벌거벗은 인디오들이 갑주로 중무장한 스페인군을 감히 공격하자, 멘도사 장군은 황당함에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감히 인디오들이 신성한 군대를 공격하다니……. 저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라!”
멘도사는 분노하며 인디오들을 공격하라 했다.
그러나 비록 총 한 자루 없이 조잡한 활과 창으로 스페인군을 상대하고는 있다고 하지만, 그 숫자가 1만여 명이 넘기에 스페인군은 원주민이 쏘아대는 활과 창을 맞고 쓰러졌다.
“전군 돌격하라!”
뜻밖의 천군만마와 같은 원군을 만난 조선군은 먼저 요새의 중앙문을 열었다.
-타타타타 탕-
“으……. 으악!”
문이 열리자 앞열에 있던 조총병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스페인군을 향해 조총을 발사했고, 밀려들어 오던 앞줄의 스페인군은 조총에서 발사된 납탄을 맞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조총을 발사한 조총수들은 재빠르게 뒷열로 갔고 팽배수들이 이를 악물고 밀려들어 오는 스페인군을 방패로 막아내며 한 손으로는 환도를 뽑아 들고 그들을 사정없이 찌르고, 긴 창을 든 창수도 뒷열에서 팽배수를 방패 삼아 스페인군의 목, 다리, 가슴 등 온몸을 사정없이 찔렀다.
혹독한 실전 훈련을 모두 이겨낸 조선군 갑사들은 두려움 없이 밀고 들어오는 스페인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펼쳤다.
조선군의 창과 칼과 스페인군의 칼과 창이 서로 맞부딪치며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다.
스페인군의 파상공세에도 조선군의 대형은 흐트러지지 않고 스페인군을 막아내고 있었고, 스페인군은 조선군의 빈틈을 노리지 못하고 조선군 갑사들의 창과 칼에 하나둘 쓰러져 어느새 피를 토하며 쓰러진 스페인군의 시신이 수북이 쌓였다.
게다가 원한이 서린 1만여 명이 원주민들이 스페인군 후방을 공격하고 있으니 스페인군은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있었다.
“죽……. 죽고 싶지 않아!”
스페인군의 잔혹한 학대에 가족을 잃은 원주민들은 원한이 가득한 눈빛으로 스페인군을 무지막지하게 살해했다.
“장군! 저희가 포위되는 형상이옵니다.”
유리한 전황이 급속도로 바뀌자, 부관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제기랄……!”
멘도사 장군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원주민들로 인해 다 이겼다고 여겼던 전투의 양상이 바뀌어 자신의 병력이 속절없이 죽어나가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동물 취급했던 원주민들이 조선군을 돕기 위해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기에 치욕감이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5천여 명이 넘던 대군은 어느새 절반 이상이 죽어나갔고, 살아남은 병력도 상당수가 상처를 입어 신음을 내며 쓰러져 있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스페인군은 이미 사기가 바닥을 쳤고 일부 스페인군은 무기를 버리고 울먹이며 원주민에게 살려 달라고 외쳤으나, 스페인군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원주민은 그들의 애원을 모른척하며 두꺼운 몽둥이로 그의 머리를 있는 힘껏 내리쳤고, 스페인 병졸은 피를 흘리며 고꾸라졌다.
기세등등한 스페인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동료의 시신을 짓밟으며 서서히 뒤로 물러섰다.
“서반아 군이 물러서고 있습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거라! 돌격하라!”
전의를 상실한 스페인군이 뒷걸음질 치는 것을 본 이시언 대좌는 칼을 높이 빼 들어 갑사들을 독려했고, 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도주하는 스페인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도주할 곳이 없었다.
양쪽에서 조선군과 원주민의 공격을 받으니, 살아남은 스페인군은 그야말로 학살을 당했다.
공포가 가득한 모습으로 스페인군은 서로를 밀치며 도주하려 했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조선군의 칼과 원주민들의 나무 몽둥이와 창이었다.
어느새 멘도사 장군이 있는 지휘부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멘도사 장군은 새까맣게 몰려오는 조선군과 원주민을 보고 겁을 잔뜩 집어먹고 들고 있던 칼을 떨어트렸다.
“후……. 후퇴하라!”
멘도사 장군은 후퇴하라는 외마디를 남기고 측근 몇 명을 데리고 말을 타고 휭하니 도주해버렸다.
“적장이 도주한다!”
“하하하하!”
장군이라는 자가 겁을 집어먹고 부하들을 모두 버리고 줄행랑을 치자, 조선군 갑사들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런 개자식이!”
조선군과 원주민에 포위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스페인군도 황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스페인군은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멘도사 장군을 바라보았다.
멘도사 장군이 도주하는 것을 본 이시언 대좌는 궁수에게서 활을 재빠르게 건네받아 활시위를 순식간에 당겼다.
“으……. 악!”
이시언 대좌의 활시위를 떠난 활은 힘차게 날아가 멘도사 장군의 목을 그대로 관통해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에서 고꾸라졌다.
“와아아아아!”
멘도사 장군이 활을 맞고 쓰러지자, 조선군과 원주민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멘도사마저 쓰러지자, 스페인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살아남은 병졸들은 숲속으로 도망가거나 퇴로가 막힌 병졸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눈물을 글썽이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조선군은 스페인군이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자, 그들을 위한 칼을 거두고 목숨을 보전해주었다.
“와아아아아!”
스페인군을 몰아낸 갑사들과 원주민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환호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른 갑사들의 얼굴은 스페인군이 흘린 피로 적셔져 있었고, 몸뚱어리는 상처가 가득했지만, 그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승리의 감동을 만끽했다.
원주민들의 감격은 더욱 컸다.
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소모품으로 여기며 억압하던 스페인군의 숨통을 끊어 놓은 원주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스러워했다.
“대좌님! 저희가 이겼습니다!”
부관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시언 대좌를 바라보았다.
“흐음. 그러하구나.”
이시언 대좌도 기적 같은 승리가 믿어지지 않은 듯 한참 동안 말없이 스페인군의 시신이 나뒹구는 벌판을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숫자의 스페인군이 개미 떼처럼 몰려올 때만 하더라도, 이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라 여겼는데, 예정에 없던 원주민들이 나타나 스페인군을 공격하여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끌어냈다.
5천여 명의 스페인군 중 살아남은 병졸은 채 300여 명이 되지 않았고, 나머지 병졸은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들판을 나뒹굴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
스페인 총독부
“총독 각하! 큰……. 일입니다.”
부관이 누에바에스파냐의 총독 돈 안토니오의 집무실에 들어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인가?”
돈 안토니오가 무표정한 모습으로 부관을 바라보았다.
“총독 각하! 멘도사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조선군에 의해 전멸했다 하옵니다.”
“무엇이라? 그것이 사실이냐?”
무표정하게 있던 돈 안토니오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 듯 놀란 눈으로 부관을 바라보았다.
“그……. 그러하옵니다!”
부관이 당혹스러워하며 총독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말이 되느냐. 조선군이 1,00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5천이나 되는 병력을 내어 주었는데 어떻게 1,000여 명의 조선군에 전멸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이냐?”
돈 안토니오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부관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선군의 다섯 배가 넘는 병력을 내어주었는데 그 병력이 모두 전멸했다고 말하는 부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멘도사 장군은 어디 있느냐?”
“저……. 그게 전사하였다고 하옵니다.”
“전사? 멘도사가 전사했다는 것이 사실이냐?”
부관의 입에서 계속 믿을 수 없는 말이 나오자, 돈 안토니오의 눈은 더욱 커졌다.
“그……. 그러하옵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멘도사까지 전사하고 우리 군이 전멸했다는 것이냐?”
돈 안토니오가 역정을 내며 말했다.
“저……. 그것이 인디오들이 조선군과 함께 우리 군을 협공해…….”
“인디오들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하찮은 인디오들이 어찌 우리 신성한 군대를 공격한다는 것이냐?”
돈 안토니오는 사람 같지도 않은 인디오들이 스페인군을 공격했다는 충격적인 말을 하는 부관이 잠시 실성한 것은 아닌지 생각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 그것이 저도 연유를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하지만 인디오들이 조선군과 연합해 우리 군을 공격한 것은 사실인 것 같사옵니다.”
“이런……. 제기랄!”
돈 안토니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내리쳤다.
본국의 명령에 따라 조선군을 몰아내고 은광을 되찾기 위해 5천 명의 정예병력을 내어준 것인데, 은광을 되찾기는커녕 한 줌도 안 되는 조선군과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던 인디오들의 협공에 5천 명의 대군이 전멸하였으니, 누에바에스파냐의 판도가 어떻게 바뀔지 걱정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