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은광을 노리는 스페인 (1)
“이 제독님! 또 이렇게 보는군요. 오래간만이요.”
“하하하. 그러하구려. 병조참의와는 참 인연이 깊구려. 이렇게 항상 같이 움직이니!”
이순신이 오래간만에 보는 이항복이 반가운지 미소를 지었다.
이항복도 전쟁 영웅 이순신을 다시 보니 반가웠다.
“아이구 그러게 말이요. 그런데 이거 뭐 좋은 시절 다 같구려. 다시 조선으로 가야 하니……. 발길이 떨어지지를 않아요. 남만국이 천국과 다름없었는데…….”
이항복이 조선으로 돌아가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투덜거렸다.
그는 아직도 조선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떠나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겠소. 남만국의 여왕이 장모님이시니 그 얼마나 편하게 지냈겠소.”
이순신은 이항복의 투덜거림이 재밌다는 듯 그를 놀렸다.
“그러게 말이요. 남만국에서 왕 부럽지 않게 살았는데, 이거 조선에 가서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이항복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유토피아 같았던 남만국에서 생활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가야 한다는 현실을 자꾸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될 수 없기에 그를 더욱 절망스럽게 했다.
“그래도 영전하시는 것이 아니요. 전하께서 그대를 도승지로 임명하겠다는 것이 아니요. 가문의 영광이요. 영광!”
“아니! 무슨 가문의 영광이라는 것이요. 남만국에서는 작위까지 부여받고 영지까지 있는데…….”
이항복이 다시 투덜거렸다.
도승지고 뭐고 그냥 사직하고 포르투갈에 그냥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이균의 은덕을 입은 자신이기에 막상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가엾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 제독도 돌아가기 싫은 것 아니요. 솔직히 말해보시오. 이곳에서 전쟁 영웅이 되어 남만국 백성들이 이 제독을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데,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리가 없지요.”
이항복은 이순신도 조선으로 돌아가기 싫을 것이라 여겼다.
무적의 스페인 함대를 무찌르고 포르투갈을 해방시켜 포르투갈 시민들에게 온갖 칭송을 받고, 포르투갈 왕 못지않은 권력을 가졌던 이순신이었다.
“하하하! 내가 병조참의 같은 줄 아시오. 병조참의는 정말 조선으로 돌아가기 싫은 모양이구려. 아주 죽을상이구려. 그런데 전하께서 무슨 일로 나를 부르는 것 같소.”
“아니! 이 사람이 그것도 모른다는 것이요. 척하면 나오는구만!”
이항복이 한심하다는 듯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병조참의는 전하께서 부르시는 연유를 알고 있다는 것이요?”
“당연히 알고 있지요. 척하면 알아야지……. 이 사람이 이거 전쟁만 잘했지……. 나머지는 천치바보구만......”
“하하하. 그럼 말해보시오.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이순신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항복을 바라보았다.
“그거야! 전쟁의 신인 이 제독을 다시 부른다는 것은 또 전쟁을 하시겠다는 것 아니요.
“전쟁?”
이항복이 입에서 전쟁이라는 말이 나오자, 이순신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렇지요. 지금 전쟁할 곳이 어디 있소. 명나라밖에 없지 않겠소. 전하께서 명나라를 치기로 결심했다 이거요.”
“흐음. 명나라를…….”
이순신은 그제야 이균이 자신을 찾는 연유를 알 것만 같았다.
“대명국과 싸워 승산이 있겠소?”
이순신이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항복을 바라보았다.
“허허. 그거야 나도 모르지요. 전하께서 이길만하니 대명국과 전쟁을 하겠다는 것 아니요. 그리고 전쟁의 신인 이 제독과 저 북방의 신립 장군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소.”
이항복은 대명국과의 전쟁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투덜거리며 말했다.
“흐음. 대명국을 치시겠다!”
이순신은 다시금 머릿속에 복잡해졌다.
비록 명이 만력제의 미친 짓으로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천하를 다스리고 있는 대제국이기에, 작은 나라 조선이 명을 칠 수 있는지 걱정이 되기도 하는 한편, 명을 치고 저 넓은 중원을 얻는 상상을 하니 가슴이 마구 뛰었다.
***
볼리비아 조선군 요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적막감.
기분 나쁜 안개가 요새 주위를 휘감고 있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놈의 안개가 이리 심하지?”
“그러게 무엇인가 스산한 느낌이 들지 않나?”
요새를 지키는 갑사들도 불길한 기운을 지울 수 없었다.
고요함 속에 무엇인가 들이닥칠 것 같은 불길한 무엇인가가 요새 안의 갑사들을 기분을 더욱 나쁘게 했다.
“서반아 놈들이 공격하는 것은 아니겠지?”
요새를 지키고 있는 갑사들은 요새를 둘러싸고 있는 음침한 기운에 기분 나빠하며 전방을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요새는 고요했다.
이른 아침 하늘을 분주하게 날아다니는 새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나 그 적막함이 요새를 지키고 있는 갑사들을 더욱 긴장시켰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흐음. 그러게 말이야!”
갑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타타타 탕-
“으악”
그런데 그 순간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고 요새를 지키고 있던 갑사들이 갑자기 날아온 총탄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적……. 적군이다.”
“서반아 놈들이다!”
스페인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스페인군은 소총과 화포를 동원해 조선군 요새를 맹렬히 공격했고, 급작스러운 기습공격을 당한 조선군은 갑사들이 하나둘 쓰러졌고, 잠시 당황하며 어수선했다.
“공격하라!”
“조선군을 모두 죽여라!”
스페인군의 지휘관 멘도사 장군은 칼을 빼 들고 조선군을 모조리 죽이라며 스페인군을 독려했고, 자욱한 안개 뒤에 진을 치고 숨어 있던 스페인 병졸들은 화포와 소총을 쉬지 않고 쏘아댔다.
화포에서 발사된 탄환은 조선군 요새 벽을 치거나 안으로 수도 없이 날아들었고, 조선군 진영은 사방에서 파편이 튀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스페인에게 막대한 부를 챙겨주는 은광의 경영권을 조선에게 넘어가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없었던 펠리페 2세는 비밀리에 밀서를 신대륙 총독에게 보내 조선군 요새를 공격하고, 은광의 경영권을 되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은광을 탈환하라는 왕의 명을 받은 신대륙 총독은 멘도사 장군에게 5,000여 명을 군사를 내어주고 조선군 요새를 공격하라 했고, 멘도사 장군은 안개가 깊게 드리워진 이른 아침 조선군을 기습 공격했다.
“당황하지 마라!”
“서반아 놈들을 죽여라!”
이시언 대좌는 망루에 올라 칼을 빼 들고 조선군을 지휘했다.
갑작스러운 스페인군의 공격에 다소 당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 최고의 용사 응양군, 용호군 출신 갑사들은 이내 조총, 활, 화포 등 자신이 맡은 무기를 손에 잡고 맞대응을 했다.
조총수들은 숙련된 솜씨로 재빠르게 조총을 장전해 스페인군을 향해 조총을 퍼부었고, 스페인군의 맹렬한 공격이 계속되어 요새가 혼란스러움에도 포병들은 홍이포로 달려가 탄환을 장전하고 스페인군을 향해 화포를 발포했다.
-타타타 탕-
-펑퍼퍼 펑-
조선군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소총과 화포 그리고 활을 쏘아대며 맹렬히 저항하자, 오히려 스페인군이 당황했다.
“으악!”
강력한 화망을 구성한 조선군의 요새에서 조총에서 발사된 납탄, 홍이포의 철환, 그리고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자, 스페인군 상당수가 들판에 나뒹굴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이런……!”
기습공격을 당했음에도 조선군이 빠르게 어지러운 상황을 수습하고 스페인군을 향해 맹공을 퍼붓자 멘도사 장군도 잠시 당황했다.
여러 전장을 겪은 노련한 장수였지만, 조선군처럼 당황하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스페인군이 조선군 숫자를 압도하며 맹렬히 공격하고 있음에도, 요새 안의 조선군은 당황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침착하게 자기의 역할을 다하며 스페인군을 공격했다.
특히 조선군의 조총은 스페인군의 그것보다 사거리가 더 길고, 명중률이 높아 요새를 향해 돌격하는 스페인군에게 큰 손실을 주고 있었다.
“으악!”
“죽고 싶지 않아!”
스페인군의 소총은 조선군의 그것에 비해 사거리가 짧아 연기만 뿜어내고 조선군을 제대로 요격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조선군의 조총은 먼 거리를 날아가 스페인군을 그대로 명중시켜 스페인군을 차례차례 쓰러트렸다.
게다가 조선군은 열을 지어 앞줄이 발포하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 뒷열에 있던 조총병이 앞으로 나와 총을 쏘기에 쉴 새 없이 조총이 발사되어 그 위력은 더욱 가중되었다.
조총이 쉴 새 없이 발사되어 스페인군이 나뒹굴자 스페인군은 머뭇거렸다.
“돌격하라! 요새를 무너트려라!”
조선군과 스페인군 꽤 오랫동안 격렬하게 서로 조총과 화포를 주고받으며 화력전을 펼쳤다.
그러나 조선군이 요새를 방패 삼아 맹렬히 저항하자, 멘도사 장군은 스페인군을 향해 전군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멘도사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스페인군은 예비대와 호위부대 일부만을 남겨놓고 함성을 지르며 조선군 요새를 향해 돌진했다.
“두려워 마라!”
“적들을 섬멸하라!”
-타타타탕!-
“퍼퍼퍼 펑!-
스페인군이 소총을 쏘고 칼을 들고 요새를 향해 돌격해 들어오자 조선군도 이에 응해 더욱 매섭게 조총과 활, 화포를 쏘아댔다.
“으악!”
“살……. 살려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한 조선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요새를 향해 돌격하던 스페인군이 피를 토하며 하나, 둘 쓰러져 나갔다.
선봉에 섰던 스페인군은 요새에 당도하지도 못하고 조선군이 쏘아대는 조총과 화포를 맞고 거의 전멸을 당했다.
응양군과 용호군 소속 갑사들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쉼 없이 조총과 활을 쏘았다.
조선군이 숫자에서 스페인군에 밀리자, 갑사뿐만 아니라 광산에서 일하는 기술자들과 그 식솔들도 일심동체 하여 스페인군을 향해 돌을 던지고, 뜨거운 물을 쏟아부었다.
“앗 뜨거워!”
요새 안의 기술자들과 가족들마저 뜨거운 물을 쏟아부으며 조선군을 돕자, 스페인군은 다소 당황하며 주춤했다.
조선군뿐만 아니라 광산에서 일하는 기술자들까지 힘을 모아 스페인군을 공격하리라고는 생각을 못 한 듯했다.
그러나 스페인 병졸들이 조선군보다 다섯 배가 넘기에 아무리 스페인군을 쓰러트려도 계속 밀려들어 오는 그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그들은 어느새 요새 주변을 포위하고 공성 장비를 이용해 요새의 중앙문을 두드렸다.
“장군! 요새가 곧 우리 수중에 떨어질 것 같사옵니다!”
조선군의 저항에 꽤 큰 손실을 입었던 스페인군이었지만, 수적으로 5배가 넘는 병력으로 밀어붙여 조선군의 견고한 요새가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조선군이 궁지에 몰리자, 멘도사 장군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천여 명에 불과한 조선군에 자신의 군대가 뜻밖에 고전하자 자존심이 상했으나, 철옹성 같은 조선군의 요새가 오랜 공격 끝에 무너질 기미가 보이자 그나마 스크래치 났던 자존심이 회복되는 것 같았다.
“요새가 함락되면 모조리 죽여 버리고, 아녀자는 겁탈하도록 해라!”
멘도사 장군은 끝까지 저항하는 조선군이 짜증스러운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조선군을 모조리 죽이라 말했다.
멘도사 장군이 약탈을 허용하자, 잠시 풀이 죽어 있던 스페인군의 사기는 높아졌다.
“대좌님! 더는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조선군의 응양군, 용호군 갑사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이제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시언 대좌도 곧 요새가 스페인군에 떨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시언 대좌는 잠시 화약 냄새와 피 냄새가 진동하는 전장을 살펴본 후 입을 열었다.
“백병전을 준비하라!”
“존명!”
요새가 함락 위기에 놓이자 이시언 대좌는 백병전을 준비하라는 명을 내렸고, 갑사들은 비장한 눈으로 무기를 갖추어 스페인군을 맞을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