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포르투갈을 떠나기 싫어요
“전하! 이순신이라 하셨습니까?”
이균이 유럽으로 떠나 지중해 함대를 이끄는 이순신도 이항복과 함께 불러들이겠다고 하자, 류성룡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이균을 바라보았다.
“그렇소이다. 해군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소.”
“전하 이순신 제독이 빠지면 지중해 함대가 위태로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류성룡은 어린 시절 함께 했던 이순신이 다시 조선으로 오는 것이 반가웠으나, 다른 한편 지중해 함대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는 이순신이 빠지게 되면 스페인이 다시 도발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은 신출귀몰한 전략을 써서 세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전멸시켰으니, 스페인군은 충분히 이순신이 빠진 지중해 함대를 노릴 수 있을 것이다.
“흐음. 그 점이 염려되는 것은 사실이오만, 명나라와의 일전에 이순신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소.”
이균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류성룡을 바라보았다.
“전하! 그렇다면 육군과 해군이 함께 작전을 펼치시겠다는 것이옵니까?”
“흐음. 생각 중이오.”
이균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균은 육군뿐만 아니라 이순신이 이끄는 해군과 함께 명나라를 치는 양공 작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
볼리비아 은광
조선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함에 따라 신대륙에 있는 세계 최대의 은광의 경영권을 조선이 가져오게 되었다.
은광의 경영권을 획득한 조선은 연은분리법을 사용하여 더욱 많은 은을 채굴하여 조선과 전 세계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졸지에 은광에 대한 경영권을 빼앗긴 스페인은 불만이 가득했다.
기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응양군과 용호군 갑사 1,000여 명은 은광 주변에 요새를 만들고 기술자들을 요새 안에 거주하게 했다.
요새 안은 작은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어, 조선식 주점, 식당 등이 들어섰다.
조선이 은광의 경영권을 가지게 된 후 광산에서 일하는 원주민을 막 대하는 일이 없어졌고, 가능한 원주민에게 적당한 임금을 지급하고 안전을 고려해 작업하게 하여 원주민들은 조선인에 대해 호감을 느끼게 되었고, 광산에서 일하는 원주민들도 종종 요새 안에 들러 조선식 식당이나 주점을 이용해 요새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갑사들을 이끄는 대좌 이시언은 요새를 철통같이 방어하며 만일을 대비했다.
“대좌님! 요즘 서반아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요새를 책임지고 있는 이시언 대좌의 작전 장교 박병호 소령이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흐음.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은광을 빼앗긴 이후 서반아군의 움직임이 무엇인가 수상하지 않은가?”
“그러하옵니다. 서반아군이 우리 조선군을 대하는 태도가 다소 적대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서반아군이 자주 모여 훈련을 하고 있다는 정보이옵니다.”
스페인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던 은광의 경영권이 조선에 떨어지자, 은광을 관할하고 있던 스페인군은 몹시 불쾌해하며 은광을 내어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조선과의 해전에서 패한 펠리페 2세가 은광의 경영권을 조선에게 내어주기로 하는 협약을 체결하였기에 조선군이 그 협약서를 내밀며 스페인군에게 은광을 내어 달라고 하자, 스페인군은 마지못해 은광을 조선에 내주었으나, 이후부터 스페인군은 조선군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은광의 경영권이 조선군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과 스페인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스페인군이 잘 대해 주었고 조선군과 스페인군도 서로 교류하며 친근하게 지냈다.
그리고 스페인군이나 스페인 관료들도 조선군의 요새를 찾아와 조선 식당에서 코리안 바비큐를 구워 먹으며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경영권이 조선에게 떨어진 후 조선과 스페인의 관계는 냉랭해져 조선의 요새를 찾아오는 스페인군이나 관료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좌님! 서반아가 다시 은광을 가지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병호 소령은 이러다가 스페인군이 요새를 공격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했다.
조선군은 정예병이라고는 하나 1천여 명의 병력밖에 없기에, 스페인이 식민지에 주둔 중인 군을 모두 동원하여 요새를 공격한다면 이를 막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흐음. 은광의 수익이 막대하니 그러할 수도 있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 할 것이야!”
은광에서 나오는 수익을 조선과 나누어 갖는다고는 하나, 조선의 지분권이 훨씬 많아지고 경영권마저 넘겼으니 그 수익이 줄어든 스페인은 충분히 조선군을 공격하고 은광을 되찾으려 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시언 대좌도 스페인군이 충분히 신대륙에 주둔 중인 조선군을 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조선으로 떠나는 함선을 통해 스페인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며 원군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신대륙이 본토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으니,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스페인군이 요새를 공격한다면 그들의 공격을 막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조선이 보내주는 원군만을 기다릴 수 없었고, 이시언 대좌는 스페인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스페인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갑사들의 훈련을 강화했다.
***
나폴리항
“제독님! 조선에서 정후청 요원이 왔습니다.”
나폴리항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는 이순신에게 부관이 말했다.
“정후청 요원이?”
“그러하옵니다.”
“들어오라 하라!”
이순신이 들어오라 하자, 다부지게 생긴 정후청 요원이 모습을 보였다.
이순신을 데리고 오라는 어명이 떨어지자, 실크로드 곳곳에 흩어져 있던 정후청 요원은 빠르게 말을 달려 이균의 어명이 담긴 밀지를 가슴에 품고 나폴리로 향했다.
“무슨 일로 이곳 먼 곳까지 온 것인가?”
정후청 요원이 직접 먼 길을 달려온 것은 무엇인가 다급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이순신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제독님! 전하께서 제독님을 조선으로 돌아오라 하셨습니다.”
정후청 요원은 몸속에 숨겨온 이균의 서신을 이순신에게 건넸다.
“전하께서 다시 조선으로?”
이순신은 흠칫 놀라며 왕이 직접 쓴 서신을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이균이 직접 작성한 친필 서신에는 정후청 요원의 말처럼 이순신에게 중책을 맡기려 하니 급히 조선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리저리 불려다니는구나.’
이순신은 유럽을 안정화하고 지중해 함대의 전력을 강화시키고 일 좀 제대로 해보려는 순간 또다시 왕이 자신을 호출한다고 하니, 다소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전하께서 부르시는 연유를 알고 있는가?”
“그것은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전하께서 급히 찾으시니 속히 조선으로 귀환하라는 어명이 있을 뿐이옵니다.”
“흐음. 알겠네.”
이순신은 자신이 지중해 함대를 비우면 혹시나 스페인군이 다시 포르투갈을 침공하거나 지중해 함대를 노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으나, 왕이 부른다 하니 별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다.
이순신은 속히 채비를 차려 조선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
포르투갈 왕궁
“이만 조선으로 떠나야 할 것 같사옵니다.”
이항복 또한 정후청 요원에게서 조선으로 복귀하라는 어명을 받았기에,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왕궁으로 향했다.
“조선의 국왕이 자네를 찾는다고 하니, 어서 가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카탈리나 여왕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왕은 사위가 가족을 데리고 조선으로 떠나는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자신의 사위가 능력을 인정받아 조선 왕의 비서실장이 되어 조선으로 떠난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이항복은 아쉬움이 더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포르투갈에서는 여왕의 사위로서 영지와 작위까지 부여받아 왕족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으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항복은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머무르며 카탈리나 여왕과 브라간사 공작을 도우며 포르투갈의 정사에도 관여하며 여왕의 측근 중 실세 중의 실세가 되어 있었기에 포르투갈 귀족들도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 했기에 그 권위가 하늘을 찔렀다.
왕가에서 마련해준 대저택에서 수많은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니, 이곳 포르투갈이 지상낙원이라 할 것이니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리가 없었다.
“남만국을 위해서는 아직 제가 있어야 할 것인데……. 제가 떠난 후 서반아 놈들이 또 무슨 짓을 하지나 않을까 걱정되옵니다.”
이항복은 자신이 없으면 스페인이 또 무슨 도발을 할 수도 있지 않냐는 핑계를 대며 여왕께서 자신을 붙잡아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하하! 자네가 있으면야 든든하기는 하겠지만, 지중해 함대가 건재하니 스페인이 쉽게 도발은 하지 못할 걸새. 그러하니 걱정하지 말고 떠나도록 하게. 조선의 국왕께서 자네를 애타게 찾는다고 하지 않나!”
브라간사 공작은 이항복의 속마음도 모르고 이항복이 없어도 포르투갈은 별 탈이 없을 것이라며 어서 조선으로 떠나라 하니 이항복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루이사! 이렇게 조선으로 떠난다고 하니, 아쉽구나.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다만 카탈리나 여왕과 브라간사 공작은 사랑스러운 막내딸과 손녀를 머나먼 조선 땅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카탈리나 여왕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브라간사 공작도 애써 눈물을 감추려 했다.
“어머니! 언젠간 다시 볼 날이 있을 거예요.”
부모님과 이별해야 하는 루이사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했다.
남편을 따라 조선으로 가긴 해야겠지만, 이제 떠나면 영영 부모님을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루이사를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사실 루이사도 남편과 함께 포르투갈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자신이 원하면 포르투갈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으나, 남편의 조국이 그를 그토록 찾고 있다고 하니, 고민 끝에 남편과 함께 조선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장인 어르신, 갑작스럽게 떠나는 루이사도 그렇고 거친 바다를 가기에는 아밀리아가 아직 어리니, 아밀리아가 좀 더 자랄 때까지 머무르는 것이…….”
이항복이 이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쑥 치고 들어와 포르투갈에 좀 더 머무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루이사와 어린 아밀리아를 핑계로 포르투갈에 더 머무르겠다고 하면 혹시 카탈리나 여왕이나 브라간사 공작의 마음이 움직일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이항복은 간절한 눈빛으로 카탈리나 여왕과 브라간사 공작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네는 조선의 신하가 아닌가? 조선의 국왕이 자네를 급히 찾는다고 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이항복의 속셈을 아는 듯 브라간사 공작이 엄한 눈으로 이항복을 바라보며 그를 나무랐다.
‘어휴. 조선으로 갈 수밖에 없겠구나!’
“아……. 뭐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여실 없이 무너져 내렸다.
포르투갈에서의 행복했던 시간이 이제 꿈속의 일인 것처럼 되어 버렸고, 이항복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 어머님! 부디 몸 건강히 잘 있으십시오. 조선으로 돌아가 일을 마무리하고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와 아버님, 어머님을 돕겠습니다.”
“흐음. 그리하도록 하게. 자네가 먼저 떠난다고?”
“그러하옵니다. 폐하께서 저를 급히 찾는다고 하니 정후청 요원과 제가 먼저 떠나고, 루이사와 아밀리아는 조선으로 향하는 배를 타고 떠날 것이옵니다.”
이항복은 결국 눈물의 작별인사를 하고 포르투갈을 떠났다.
루이사와 사랑스러운 딸 아밀리아는 리스본에서 조선으로 향하는 배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고, 이항복은 이순신을 만나 정후청 요원들과 함께 육로를 이용해 조선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