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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군주 선조대왕 일대기-97화 (97/202)

97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 (1)

완벽한 대승이었다.

시마즈 가문의 정예병 5천여 명은 대부분이 전멸했고 살아남아 도주한 병력은 수백 명에 불과한 반면 조선군은 약 50여 명의 병졸만이 전사하였을 뿐이었다.

시마즈 가문의 겁박 속에 그들과 대적할 것을 생각지도 못한 유구국 병졸들의 기쁨은 더욱 컸다.

그들은 서로 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슈리성벽 밖에는 주검이 되어 널브러져 있는 왜군들의 시체가 가득했고 피 냄새를 맡은 까마귀 떼가 하늘을 빙빙 돌았다.

슈리성 안으로 대피한 유구국 백성들도 이제 밖으로 나와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슈리성 안에서 숨죽이며 숨어 있던 이들은 왜군의 처참한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조선군이 그들을 구원하러 왔다고 한들, 왜군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려 대패할 것이라고는 여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선군을 얼싸안고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정발은 망루에 올라 성 밖의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의 계획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진 승리에 그도 무척 만족스러웠다.

“장군! 그대가 우리 유구국을 살렸소!”

정발이 이끄는 조선군이 왜군을 대패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쇼에이 왕은 대신들을 이끌고 몸소 나와 정발을 격려하며 감격스러워했다.

전쟁이 있을 때마다 유구국을 겁박하며 군량미, 군수물자를 뜯어가던 시마즈 가문 병졸들의 시신이 벌판을 가득 메운 것을 바라본 쇼에이 국왕은 그 통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조선의 원군이 이리 골치를 썩이던 시마즈 가문의 군대를 전멸시키니 가히 조선군이 그 어느 군대보다 막강하다는 것을 몸소 알 수 있었다.

“장군! 조선은 우리의 은인이오. 이 어찌 조선국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것인지…….”

감격한 쇼에이 국왕은 일개 장수에 불과한 정발을 향해 스스로 머리를 숙이며 거듭 감사함을 표현했다.

재상 웨카타를 비롯한 유구국의 대신들도 정발을 향해 머리를 깊이 숙이며 예를 표시했다.

“폐하! 어찌 그러시는 것이옵니까? 조선국과 유구국 병졸들이 힘을 합쳐 이루어낸 승리이옵니다.”

쇼에이 국왕이 감격스러워하며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자, 정발은 당혹스러워하며 승리의 영광을 유구국에 돌렸다.

유구국을 구한 조선군과 정발 장군은 유구국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유구국 백성들은 정발 장군의 이름을 외치며 밤새 승리의 축제를 즐겼고, 쇼에이 국왕은 조선에게 풍광이 아름다운 유구국의 섬 몇 개를 바쳤다

***

“우리 군이 전멸했다는 것이 사실이냐?”

아우 시마즈 요시히로가 처참한 몰골로 나타나, 유구국을 정벌하기 위해 출전한 5천여 명의 정예병이 전멸했다고 보고하자, 시마즈 요시히사는 얼굴이 달아올라 아우를 바라보았다.

시마즈 가문에서 난다긴다하는 정예병을 내어준 것인데, 그 정예병이 군대 같지도 않은 유구국 얼간이 병졸들에 전멸당했다는 만우절 농담 같은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형님! 죽여주시옵소서. 제가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그는 전장에서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한 것도 모자라, 야마모토의 손에 이끌려 도주한 자신의 꼴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다.

“어찌 유구국 따위에게 패전할 수 있다는 것이냐?”

“형……. 형님! 유구국 병졸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시히로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오오토모 가문이 유구국을 구원했다는 것이냐?”

요시히로가 유구국에 유구국 병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하자, 요시히사는 큐슈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오오토모 가문이 유구국을 구원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 조……. 조선군이…….”

“무엇이라. 유구국에 조선군이 있었다는 말이냐?”

요시히로의 입에서 조선군이라는 말이 나오자, 요시히사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하옵니다. 슈리성에 중무장한 조선군 1만여 명이 있었사옵니다.”

“조선군이 1만여 명이나? 어찌 유구국에 조선군이 그런 대군을 보냈다는 것이냐?”

요시히사는 1만여 명에 이르는 조선군이 유구국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조선과 유구국이 교류는 하고 있었지만, 교역의 규모도 크지 않고 그렇게 각별한 사이도 아닌데, 조선군이 유구국을 돕겠다고 1만여 명이나 되는 대군을 보냈다니 믿어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형님! 쇼에이가 조선에 군신의 예를 갖추겠다며 원군을 청했다고 하옵니다.”

요시히로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이라! 조선에 머리를 조아렸다는 것이냐! 이런 교활한 놈 같으니라고…….”

요시히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내리쳤다.

유구국을 손보고 큐슈를 통일하려 했던 요시히사의 계획이 뜻밖의 조선 참전으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가 유구국을 정벌하기 위해 보낸 병력 5천은 시마즈 가문의 정예병이었는데, 그 정예병이 모두 전멸하였으니 큐슈 통일은커녕 라이벌 오오토모 가문의 역공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큐슈를 노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끼어든 조선군으로 인해 모든 것이 꼬여 버렸으니 요시히사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형님! 죽여주옵소서!”

“흐음. 아우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 조선군이 대군을 보내 그리된 것이 아니더냐. 조선군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큐슈를 통해 도자기를 팔아먹는 놈들이 우리 뒤통수를 치다니.......큐슈를 통일하면 조선과의 교역을 막아 버릴 것이다!”

“형……. 형님!”

“어서 돌아가 몸을 추스르도록 하거라!”

***

오사카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건너온 막사발을 두 손을 받쳐 들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차를 목으로 넘겼다.

“흐음! 고려다완에 마시는 차의 맛은 언제나 일품이구려!”

뜨거운 차가 입에 들어가자, 그는 정신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하옵니다. 조선에서 건너온 고려다완은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절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왜의 다도를 정립한 센리큐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루한 생선장수 출신으로 천하통일을 앞두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자 오다 가문의 분열을 틈타, 오다 노부나가가 이룩한 모든 것을 넘겨받은 후 키슈와 시코쿠까지 정벌하여 이제 그는 노부나가가 못다 이룬 천하일통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관백이라 칭하며 오사카에 대규모 성을 축성하고 왜의 주인인 양 행사했고, 큐슈만 정벌하면 이제 천하가 그의 손에 들어오게 되니 그 의기양양이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흐음. 그렇소. 우리는 왜 이런 도자기를 만들지 못하는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다기로 쓰는 조선의 막사발에 흠뻑 빠져있었다.

그는 조선에서 가져온 고가의 막사발을 그의 가신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막사발을 받은 가신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흐음. 관백전하 저도 그것이 아쉽사옵니다. 어찌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다기를 만들지 못하는 것인지…….”

조선에서 별 가치도 없이 아무렇게 사용하는 막사발은 왜에서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칭송을 받으며 여전히 인기를 얻고 있었다.

명나라의 다기도 있지만 소박함과 청렴함을 강조하는 왜의 다도에는 너무나 화려하여 어울리지 않았고, 수수하면서도 여백의 미가 있는 조선의 막사발이 왜의 다도 문화에는 제격이었다.

왜는 조선의 막사발을 사모하여 직접 막사발을 비롯한 도자기를 만들려고 시도하였지만, 고령토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뜨거운 고열에서 도자기가 견디어 내게 하는 기술조차 없었기에 번번이 실패했고 조선을 통해 고가의 자기를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선생! 내 천하를 통일한 후 조선도 내 것으로 만들어 조선의 도자기를 우리 것으로 만들 것이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야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센리큐를 바라보았다.

“관백전하! 지금 조선을 치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느닷없이 조선을 치겠다는 말을 하자, 차를 음미하고 있던 센리큐는 놀라 마시던 차를 뱉을 뻔했다.

“하하하! 왜 그리 놀라시는 것이오. 선생! 조선을 치겠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이요?”

‘저자가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닌가?’

“관백전하! 조선을 정말 치고자 하는 뜻이 있으신 것이옵니까?”

센리큐는 처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농을 던지거나 허풍을 떠는 것이라 여겼는데,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것이 허풍이 아닐지 모른다 여겼다.

“그렇소이다. 우리 군은 그야말로 천하제일이오. 이 나라를 일통하면 그 막강한 군대가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요.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소. 마땅히 더 큰 곳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오. 내 조선을 치고 중원까지 우리 왜의 것으로 만들 것이오.”

‘저자가 미친 것이 아닌가. 허언증도 아니고 무슨 중원까지 도모하겠다는 것인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넘어 중원까지 도모하겠다고 하자 센리큐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관백전하! 명까지 노리시겠다는 것이옵니까?”

“선생! 명을 노리겠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지 않소. 듣자 하니 조선이 명을 치려 한다고 하던데, 우리라고 못 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오. 조선의 군대는 우리보다 나약하오. 그런 조선이 명을 우습게 보고 있으니, 우리 군이 응당 명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관백전하의 커다란 뜻에 소신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관백전하께서 중원을 도모하시면 역사에 길이 빛나는 영웅이 되실 것이옵니다.”

센리큐는 명까지 도모하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당장 그의 목이 달아날 것이기에 그를 영웅이라 추켜세웠다.

“하하하! 내 조선을 얻게 되면 그대에게 영지를 줄 것이오. 그대는 우리 왜의 으뜸가는 차 선생이 아니요. 고려다완을 다 그대에게 선물로 주고 싶구려!”

“소신을 생각하는 관백전하의 은덕을 어찌 갚아야 할지……. 그런데 시마즈 가문의 군대가 유구국을 정벌하러 떠났다가 조선군을 만나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으셨사옵니까?”

“흐음. 들어서 알고 있소. 사미즈 요시히로가 아주 개망신을 당했다고 하던데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막사발에 담긴 차 한 모금을 삼키며 말했다.

그도 보고를 받아 큐슈의 유력 가문 시마즈 가문이 유구국을 정벌하기 위해 출병을 떠났다가 조선군에 대패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관백전하. 유구국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 조선군에 시마즈 가문의 정예병이 전멸을 당했다고 하옵니다.”

“시마즈 가문도 명운이 다했나 보오! 어찌 보잘것없는 조선군에 그리 대패를 한다는 것인지. 하하하. 잘된 일이 아니오. 시마즈 가문의 주력군이 그리 대패를 했으니 규슈를 손에 넣기가 더 쉬워진 것이 아니요. 천하일통이 더욱 빨라지게 되었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관백전하! 시마즈 가문의 군대는 용맹스럽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 조선군이 그런 시마즈 가문의 정예병을 전멸시켰다는 것은 조선군이 기세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옵니다. 조선군을 결코 가볍게 보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센리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센리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망상에 사로잡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시마즈 가문의 군대가 조선군에 전멸당한 얘기를 꺼낸 것이다.

그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막사발에 채우더니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센리큐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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