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유구국 구원 (6)
“모조리 죽여라!”
아미미 제도에 상륙한 시마즈 가문의 왜군은 아미미 제도의 오오시마를 단숨에 점령한 후, 차례차례 오키나와 제도의 섬들을 점령하며 슈리성이 있는 오키나와 본토를 향해 진군했다.
유구국 병졸들은 조총과 화포를 쏘며 시마즈 가문의 왜군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저항할 생각도 없이 도주해 버렸고, 왜군들은 제대로 싸움도 해보지 않고 오키나와 제도의 섬들을 점령해 나갔고, 채 일주일도 안 돼 유구국의 본토에 있는 운텐항에 도착하여 사흘 뒤에 군사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구스쿠까지 함락했다.
“이제 슈리성이 코앞이옵니다.”
“하하하. 유구국 놈들은 정말 형편없는 놈들이구나!”
유구국 아미미 제도에 상륙한 후 거의 무혈 입성할 정도로 순식간에 유구의 각 섬들을 함락시키고 슈리성 바로 코앞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구스쿠까지 함락시키자, 왜군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제 슈리성이 코앞이다. 힘을 내자!”
유구국 병졸들이 싸울 의지가 없이 도주하기 바쁘자, 왜군들은 파죽지세로 슈리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정발 장군은 왜놈들이 유구국 제도의 모든 섬들을 점령하고 슈리성 코앞까지 당도할 때까지 슈리성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들의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 왜놈들이 코앞이옵니다. 이제 성 밖으로 나아가 왜군들과 결전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군들이 슈리성 코앞에 올 때까지 정발 장군이 군대를 전혀 움직이지 않자, 원균이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성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오. 왜놈들이 이곳 슈리성에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오. 무모하게 성 밖으로 나가 왜군들과 결전하는 자는 군령을 어긴 것으로 간주해 목을 벨 것이오!”
원균이 또 성 밖으로 나가 싸우자고 고집을 피우자, 정발 장군이 성 밖으로 나가 교전하면 군령을 어긴 것으로 간주해 참수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에이 짜증 나게…….’
빨리 공을 세우고 싶은 원균은 연신 소극적으로 나오는 정발 때문에 짜증이 몰려왔다.
원균이 보기에 매일 눈물이나 짜는 쇼에이 왕이나, 성에 웅크리고 앉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정발이나 모두 똑같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유구국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워 장군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그였는데, 나약해 빠진 정발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쇼에이 국왕도 성 밖으로 나가 왜군과 맞서 싸울 생각이 없는 정발 장군 때문에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구스쿠가 함락되었다는 것이 사실이오?”
“그러하옵니다. 전하!”
재상 웨카타가 말했다.
“이제 조선군이 왜군을 맞아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요? 이제 구스쿠가 함락되었으니 슈리성이 코앞이 아니오.”
“전하! 정발 장군은 이곳 슈리성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려 하고 있습니다. 성곽을 방패 삼아 수성전을 펼치는 것이 병력의 손실을 막을 수 있고 유리할 것이옵니다.”
재상 웨카타는 정발 장군의 전략이 옳다는 생각이었다.
“흐음. 그건 알고 있지만, 이리 왜군이 코앞까지 닥치니 불안하구려! 조선군의 병력도 왜군보다 많은데, 성 밖으로 나가 싸워도 능히 왜군을 물리칠 수 있지 않겠소.”
그러나 쇼에이는 여전히 불안했다.
혹시 조선군이 왜군과 싸울 생각은 없는 것인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폐하! 정발 장군이 다 뜻이 있어 그러는 것이옵니다. 곧 정발 장군이 왜군들을 몰아낼 것이옵니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웨카타는 불안해하는 쇼에이 국왕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그랬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쇼에이 국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유구국 놈들이 겁을 먹고 모두 도주하였구나! 너무 싱겁구나”
시마즈 요시히로는 제대로 된 전투 하나 없이 유구국의 도성인 슈리성까지 단숨에 진격해 들어가자 너무나 싱거워 허탈하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무장으로서 전투다운 전투를 하고 유구국을 차지하고 싶었는데, 겁을 잔뜩 집어먹은 유구국 병졸들이 앞다투어 도주하기 바쁘니, 심심해 하품이 날 것만 같았다.
“주군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시히로가 총애하는 부장 야마모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요시히로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이냐!”
시마즈 요시히로가 왜 그러나 하는 표정으로 야마모토를 바라보았다.
“주군! 유구국 병졸들이 아무리 형편없다고는 하나 슈리성이 있는 본토마저 떨어질 지경인데 전혀 싸우려 하지 않고 물러서기만 하고 있사옵니다. 무엇인가 수를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야마모토가 다소 근심 어린 표정으로 요시히로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야마모토 그거야 유구국 놈들이 우리 군의 위용을 보고 겁을 집어먹고 줄행랑을 쳤기 때문이 아니더냐! 저놈들은 그런 계책을 세울 수도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요시히로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주군 그렇다고 보기에는 유구국 병졸들이 너무 일사불란하게 철군을 했습니다. 게다가 군량미나 병장기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가져가 버렸습니다.”
야마모토는 유구국 군대가 자신들의 군대를 보고 허겁지겁 달아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계획적으로 철군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게다가 왜군은 유구국의 군량미를 약탈하여 충당할 생각으로 군량미를 넉넉하게 챙겨오지 않았는데 유구국의 창고에 군량미가 하나도 없으니 자칫 전쟁이 길어지면 군량미가 동날 상황이었다.
“야마모토 걱정도 팔자구만! 우리가 상대할 군대는 도요토미의 군대가 아니고 오합지졸 유구국 군대이네. 저 작은 슈리성은 반나절도 안 되어 우리 수중에 떨어질 것이네.”
시마즈 요시히로는 야마모토가 허약해 빠진 유구국 군대를 상대로 너무 깊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핀잔을 주었다.
그에게 유구국은 그럴만한 함정조차 팔 수 없는 형편없는 나라 그 자체였다.
“자 쓸데없는 생각 말고 내일 바로 슈리성을 칠 것이니 오늘은 군사들을 넉넉히 먹이고 일찍 재우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요시히로는 멀리 보이는 슈리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야마모토의 걱정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내일 슈리성의 문을 깨고 오만방자한 쇼에이 왕의 목을 베고 슈리성에 시마즈 가문의 깃발을 세우겠다는 단꿈에 부풀어 있을 뿐이다.
“내일이면 유구국 여인을 품을 수 있겠구만!”
“하하하! 여러 전장을 다녔지만, 이렇게 싱거운 싸움터는 처음이구만!”
“자 배불리 먹었으니, 어서 잠이나 자도록 하지. 그래야 내일이 빨리 올 것이 아닌가!”
시마즈 가문의 왜군들은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마음껏 먹어 사기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았고 그들은 시마즈 요시히로처럼 슈리성을 빼앗아 전리품을 챙기고 여인들을 품을 생각에 이른 잠을 청했다.
***
“장군! 왜군들이 슈리성 앞에 당도하였습니다. “
드디어 시마즈 가문의 정예병 오천이 슈리성 앞에 진을 쳤다.
시마즈 가문을 상징하는 수백 개의 깃발이 진영 곳곳에 펄럭이고 왜군이 자랑하는 조총병 일천여 명이 밀집대형을 이루어 서 있고 단병접전에 강한 창병들도 곳곳에 대형을 이루어 결전을 준비했다.
궁수들은 진영 후방에서 활을 매만지며 명령을 기다렸고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화포들도 불을 뿜을 준비를 마쳤다.
시마즈 요시히로 주변에는 부장들과 그를 호위하는 기마대가 갑주를 입고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군!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명령을 내려 주옵소서.”
요시히로는 망원경을 꺼내 슈리성의 진영을 살폈다.
“음. 드디어 쇼에이 왕의 목이 떨어지겠구나.”
슈리성에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유구국 병졸만이 있는 것 같았다.
“야마모토. 당장 슈리성의 문을 열어라!”
“존명!”
요시히로의 명이 떨어지자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화포 수십 기가 일제히 불을 품었다.
-펑 펑 펑!-
화포에서 발사된 철환 수십 개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성벽을 때렸고 일부 철환은 성벽을 넘어 조선군과 유구국 진영에 떨어지기도 했다.
“동요하지 말거라!”
폭음과 함께 커다란 철환이 떨어지자 유구국 병졸들은 놀라 비명을 지르며 혼란스러워했으나 조선군은 꿈쩍도 하지 않고 몸을 숨기며 정발의 명령을 기다렸다.
왜군들은 아직 조선군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선군 1만여 명이 슈리성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무모한 공격을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군의 화포에서 발사된 철환은 슈리성 성벽을 계속 때렸지만, 성을 제법 튼튼하게 축성하였는지 성벽은 큰 손실 없이 잘 버티어 주었다.
“흐음. 성벽이 제법 튼튼하구나!”
정발 장군은 왜군들의 화포 공격에도 슈리성이 제법 잘 견디어 주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를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던 요시히로가 손짓하자 왜군이 자랑하는 조총병들이 조총을 쏘기 시작했다.
-탕탕탕!-
-타타타 탕!-
조총에서 매캐한 연기와 함께 수백 개의 납탄이 슈리성을 향해 날아갔다.
“으악! 사 살려줘!”
왜군이 쏘아대는 조총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조총병들은 열을 바꾸며 쉬지 않고 조총을 쏘아댔고 조총의 강력한 화망에 성 위에 있던 유구국 병졸들이 쓰러져 나갔다.
“진격하라!”
조총의 강력한 화력에 유구국 병졸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시마즈 요시히로는 승기를 잡았다고 여기고 예비대와 호위부대만 남겨 놓고 돌격을 명했다. 명이 떨어지자 왜군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슈리성을 향해 돌진했다.
“장군! 왜군들이 돌진하고 있사옵니다.”
부관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이때다! 방포하라!”
왜군의 화포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정발이 칼을 빼 들고 슈리성 곳곳에 배치된 대완구와 중완구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된 비격진천뢰가 발사되어 수백 개의 비격진천뢰가 포물선을 그리며 돌진해 들어오는 왜군 진영 앞에 떨어졌다.
잠잠하던 슈리성에서 갑자기 커다란 폭음과 함께 둥그런 무엇인가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자 왜군들은 화포가 발사되는 것이라 여기고 당황해하며 다급히 몸을 숨겼다.
“뭐야 이게!”
“하하하! 그냥 쇳덩어리에 불과하구만!”
처음에 놀랐던 왜군들은 단순히 둥근 쇳덩어리가 쏟아져 내리자,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쇳덩어리 주변에 모여들었다.
“한심한 놈들이로군, 기껏해야 이따위 쇳덩어리나 던지니.”
“하하하!"
왜군들은 어이가 없는지 쇳덩어리를 발로 차며 시시덕거리도 했다.
“으……. 으악!”
그런데 그 순간 천지를 진동하는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왜군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살……. 살려줘!”
비격진천뢰의 위력은 어마무시했다.
수백 개의 비격진천뢰가 곳곳에서 커다란 폭음과 함께 터지며 비격진천뢰 안에 있던 철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왜군들의 몸뚱이를 산산이 찢어 놓았다.
“도대체 이게 무엇이야!”
“후퇴하라!”
생전 처음 보는 비격진천뢰의 엄청난 화력에 금세 피투성이가 된 왜군들의 시체가 수북이 쌓였고, 살아남은 왜군들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하려 했다.
망원경으로 자신들의 용맹스러운 군대가 생전 처음 보는 무기에 도륙을 당하자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이를 지켜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주……. 주군. 저……. 저기를 보옵소서.”
아먀모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뭘 보라는 것이냐!”
“슈리성에 병졸들이……!”
슈리성 성벽에 조선군 깃발이 펄럭이며 올라왔고, 1만여 명의 조선군이 모습을 보였다.
“도대체 저놈들이 어디서 기어 나온 것이냐!”
“주……. 주군. 조……. 조선군이옵니다.”
“무엇이라! 조선군이 왜……. 이곳에 있다는 것이냐!”
시마즈 요시히로는 슈리성을 가득 메운 조선군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