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유구국 구원 (5)
“폐하! 어찌 이리 직접 나오셨나이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왕이 직접 성 밖으로 나와 일개 무부에 불과한 자신의 손을 덥석 잡으며 감격스러워 하자, 정발 장군은 잠시 당황했다.
“아니요. 이렇게 우리 유구국을 구원하기 위해 먼 길을 와 주셨는데, 어찌 성안에만 머무를 수 있겠소. 그대들은 이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이 보내신 군사들이오.”
쇼에이는 정발 장군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고, 왕과 함께 성 밖으로 나와 조선군을 맞이한 유구국 대신들도 정발 장군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시마즈 가문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조선군이 당도하자, 쇼에이는 조선군을 위한 성대한 만찬을 열어주었다.
쇼에이 국왕은 정발을 비롯한 군 수뇌부에 상아, 향신료, 물소 가죽, 설탕 등 각종 진귀한 보물을 바치며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폐하! 이리 환대하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발 장군은 쇼에이 국왕의 극진한 환대가 다소 부담스럽기도 했으나, 나라의 명운이 조선군에 달려 있으니 유구국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아니오. 조선의 용맹한 장수가 내 옆에 있으니 이렇게 든든하지 않소.”
쇼에이는 직접 술병을 들어 정발 장군의 빈 잔에 어주를 따라 주었다.
“폐하! 이제 왜놈들의 겁박을 두려워하지 마소서. 소장! 오만방자한 왜놈들로부터 전하와 유구국 백성들을 보호할 것이옵니다.”
정발이 쇼에이가 따라준 어주를 단숨에 비우며 호탕하게 말했다.
과연 장수다운 기개가 느껴지는 호탕함이었다.
“장군께서 그런 말을 해주니 우리 유구국 백성들은 기쁘기 그지없을 것이요.”
쇼에이 국왕은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지 못하는 나약한 국가의 왕은 슬픈 것이다.
시마즈 가문의 겁박에 편안한 날이 없었던 그였는데, 이제 조선이 정예군 1만을 보내주니, 기쁘기 그지없었고, 쇼에이는 건하게 술에 취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재상 웨카타도 기쁘기 그지없었다.
유구국은 실전으로 단련된 시마즈 가문의 군대를 막아낼 군대가 없었기에 조선의 원군은 가뭄 속의 단비같이 절실한 것이었다.
“폐하! 우리 조선군이 유구국에 주둔하고 있는 한 왜놈들은 유구국을 침략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유구국의 극진한 환대에 정발 장군은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
1만여 명의 조선군은 곧 슈리성 인근에 주둔하며 시마즈 가문의 침략을 대비했다.
“유구국 병졸이 생각보다 형편 없구만!”
“그러하옵니다. 장군! 유구국이 작은 섬나라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국방이 허약할 줄 생각지도 못했사옵니다.”
1연대장 박세직 대좌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군대가 이렇게 허약하니, 시마즈 가문이 그렇게 유구국을 겁박한 것이 아니겠소.”
유구국 군대가 허약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유구국에 도착해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유구국 군대는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유구국 병졸들은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으며, 제대로 된 병장기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슈리성은 제법 성곽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니 이곳을 방어진지로 삼아 왜놈들과 일전을 벌이면 승산이 있을 것이옵니다.”
“흐음. 나도 그대의 생각과 같네.”
유구국의 군사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성 슈리성은 제법 요새다운 모습을 하고 있어 슈리성을 거점으로 삼아 공성전을 펼친다면 아무리 실전으로 단련된 왜군이라 하더라도 슈리성을 쉽게 공략할 수 없을 것이다.
“왜놈들의 병력은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시마즈 가문은 우리 조선군이 유구국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하니 그들은 아마도 오천 명 정도면 유구국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길 것이옵니다.”
박세직 대좌가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놈들의 병력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으면 왜군의 병력이 상륙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결전하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겠구만!”
“장군, 우리 병력이 더 많을 것인데, 굳이 공성전을 펼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 기마병이 선공해 기선제압을 하면 왜놈들이 기겁하고 도주할 것이옵니다.”
2연대장 원균이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병력이 우위에 있을 것이니 왜군을 먼저 선제공격하자 말했다.
서인들이 일으킨 반란에 가담한 이일의 목을 베는 큰 공을 세웠음에도 아직 장군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원균은 자신보다 잘 나가는 신립, 이순신을 질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무장으로서 더 뛰어난 것 같은데, 왕은 신립과 이순신을 벼락 승차시키며 전쟁 영웅으로 만들어 놨다. 하지만 자신은 반란군 수괴의 목을 베었음에도 장군은커녕 한직으로 떠돌게 하는 이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대좌로 승차해 유구국 원정군에 포함된 그는 절치부심하며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큰 공을 세워 이균의 눈도장을 확실히 받고 싶었기에, 왜군보다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적극적인 공세를 펴지 않고 성에 틀어박혀 공성전이나 하려는 정발의 전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흐음. 우리 조선의 땅도 아니고 남의 나라를 구원하러 온 것인데, 굳이 전면전을 해 우리 군의 희생을 늘릴 필요가 없소. 명나라와 일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니 군의 손실을 가능한 한 줄여야 할 것이오.”
정발 장군은 앞뒤 안 가리고 단순 무식하게 왜놈과 전면전을 펼치자고 주장하는 원균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군! 그렇게 되면 왜놈들에게 이곳 도성이 포위되는 형상인데, 자칫 잘못되면 이곳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수가 있습니다. 심려치 마시고 저에게 기병을 주시면 상륙하는 왜놈들을 도륙하겠습니다.”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이 가득한 원균은 거듭 자신에게 군사를 내어 달라고 간청했다.
원균이 고집을 피우자 정발 장군이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호탕하고 무인다운 기개는 있었지만, 앞뒤 안 가리고 단순 무식한 행동을 하는 원균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대의 생각도 맞소. 하지만 우리 병력이 더 많으니 왜군에 포위될 가능성은 크지 않소. 이렇게 훌륭한 성이 있는데 병력을 손실시킬 수 있는 전략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 더는 거론치 마시오.”
“무슨 무장이 저리 소심한 것인가!”
원균은 공성전을 고집하는 정발에 크게 실망했지만, 지휘관이 더는 거론치 말라 하니 더는 말하지 못하고 인상만 쓰고 있었다.
“흐음. 신무기가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궁금하구만!”
유구국 원정군은 군기감의 나영실이 개발한 신무기 비격진천뢰를 가지고 왔다.
“장군! 저도 기대되옵니다. 아주 왜놈들이 신무기를 보고 아주 혼비백산 하올 것입니다.”
1연대장 박세직 대좌도 신무기 비격진천뢰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다.
‘무슨 한 줌도 안 되는 왜놈들에게 화포에나 의존하려고 하는지, 기마대로 쓸어버리면 될 것을…….’
그러나 원균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
지중해 함대
“서반아의 동태는 어떠한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이순신이 부관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는 것 같사옵니다.”
“흐음. 우리 지중해 함대에 참패를 당한 서반아가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을 걸세. 서반아의 움직임을 항상 예의주시해야 하네.”
“알고 있사옵니다. 제독님! 서반아 함대의 움직임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스페인에게서 나폴리를 얻어 지중해 함대를 주둔시키며 행정업무를 보는 이순신은 정신이 없었다.
무적함대를 자부하다가 이순신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한 스페인이 펠리페 2세는 지금은 잠잠하지만, 언제든지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지중해 함대를 노릴 수 있기에, 함대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중해 함대 덕분에 포르투갈은 안정을 취했고, 새로운 왕이 된 카탈리나 여왕은 남편인 브라간사 공작과 함께 친 스페인파 귀족들을 제압하며 나라를 제법 잘 다스렸다.
하기야 조선의 지중해 함대가 있으니, 친 스페인파 귀족들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5,000여 명에 이르는 왜군이 조총과 창, 그리고 칼로 무장하고 배에 올라타고 있었다.
“형님! 건방진 유구국 놈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오겠습니다.”
시마즈 가문의 영주 요시히사의 동생 시마즈 요시히로가 갑주를 입고,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요시히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흐음. 아우가 직접 출전을 하니 든든하구나. 유구국 왕의 목을 꼭 가져오도록 하게!”
요시히사는 그의 아우가 직접 유구국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가니 든든하기만 했다.
한 줌도 안 되는 유구국을 치기 위해 오천의 대군을 이끌고 가는 것이 부끄럽기까지 하였으나, 혹시 오오토모 가문이 유구국의 뒤를 봐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병력을 넉넉히 보내기로 했다.
“형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요시히로는 다시 그의 형에게 인사한 후 대장선에 올라타 곧바로 출항을 명령했고, 대군을 태운 왜군의 함선들은 일제히 유구국을 향해 물살을 갈랐다.
요시히로는 유구국의 도성에 조선의 1만 대군이 주둔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유구국의 도성을 불태운 후 챙길 여자와 전리품을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구국 계집들이 그렇게 미인이라던데.”
“하하하. 슈리성 궁녀들 또한 미모가 출중하다던데, 어서 빨리 슈리성의 문을 열고 들어가 여인들을 품어 보고 싶구만.”
갑판에 누워 쉬고 있는 병졸들이 삼삼오오 모여 농담을 지껄였다.
나약해 빠진 유구국 병졸들은 실전으로 단련된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기에, 그들은 전쟁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휴양을 떠나러 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들은 어서 빨리 유구국에 당도해 여인들과 전리품을 챙기려는 단꿈에 젖어 있었다.
***
슈리성
“폐……. 하! 큰……. 일이옵니다.”
내관이 다급한 표정으로 어전으로 달려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내관이 호들갑을 떨자, 쇼에이 유구국 국왕이 놀란 눈을 하고 내관을 바라보았다.
“폐하! 시마즈 가문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무엇이라! 그것이 사실이냐?”
“그……. 그러하옵니다. 지금 아미미 제도에 병력이 상륙해 섬들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본토로 향하고 있사옵니다.”
“어허! 이런 큰일이로다. 결국 이놈들이!”
사쓰마 번의 왜군들이 결국 유구국을 침공했다는 내관의 말을 전해 듣자, 쇼에이 왕은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병력이 얼마나 된다고 하더냐?”
“5천이 넘는다 하옵니다.”
“흐음. 정발 장군 어쩌면 좋겠소? 결국 이놈들이!”
“폐하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이 정발이 폐하와 유구국 백성을 지킬 것이옵니다!”
정발 장군이 두려움에 목소리까지 떨려오는 쇼에이를 안심시키려 했다.
“장……. 장군 그대만 믿소. 유구국의 운명은 그대의 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해주시오.”
쇼에이 국왕은 떨리는 손으로 정발 장군의 손을 꼭 잡았다.
“폐하. 왜놈들을 이 칼로 모조리 도륙할 것이오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저희 조선국의 정예 군사들이 왜놈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옵니다.”
“고……. 고맙소. 장군!”
나약한 왕 쇼에이는 정발이 목숨을 바쳐 유구국을 지켜주겠다고 하자 눈물을 훔치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정발을 바라보았다.
시마즈 가문의 왜군들이 드디어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발 장군은 즉시 갑주를 갖추어 입고 군대를 소집했다.
정발 장군의 명령의 떨어지자 조선군은 슈리성 안으로 유구국 백성들을 피난시킨 후 성곽에 군사들을 결집시켜 일전을 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