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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군주 선조대왕 일대기-93화 (93/202)

93화. 유구국 구원 (4)

그는 원군을 보내겠다는 조선의 약조를 받지 못하면 죽을 각오로 조선에 왔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조선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왜와 교류하며 국력을 쌓은 조선의 대신들 상당수는 유구국을 도왔다가 왜와의 교역이 끊어질 것을 염려하며 유구국을 구원하는 것을 반대했기에, 그것이 걱정되었다.

“흐음. 그 병조판서라는 젊은 자가 병권을 책임지고 있는 자요?”

“그러하옵니다. 세자저하! 병조판서라는 자가 반대를 하고 있어 더 걱정이옵니다.”

“그렇소. 얼핏 보아도 조선의 국왕이 그를 총애하는 것 같던데……. 그자가 심하게 반대하는 것 같으니 걱정이구려.”

게다가 병권을 책임지고 있는 병조판서라는 자가 극렬하게 반대하니 더욱 걱정이 커져만 갔다.

병권을 책임지고 있는 병조판서가 파병을 반대한다면, 아무리 조선의 왕이라도 원병을 유구국에 보내는 것을 쉽게 결정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 사절단과 함께 온 유구국 사신이 문을 열고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세자저하!

“무슨 일인가?”

“세자저하! 마침내 조선이 우리 유구국을 위해 원군을 보내주기로 하였습니다.”

“무엇이라? 그것이 사실이냐?”

신하가 조선이 원군을 내주기로 결정했다며 호들갑을 떨자, 유구국 세자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하옵니다. 조선의 국왕께서 직접 우리를 돕겠다며 원군을 보내라 어명을 내리셨다고 하옵니다.”

“오호! 이렇게 기쁜 일이! 재상. 이제 우리 유구국이 살 수 있게 되었소.”

유구국 세자는 감격에 겨워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조선의 왕이 이리 빨리 유구국을 돕기로 결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제 유구국은 나라를 보전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세자저하! 모든 것이 세자저하의 공이옵니다. 폐하께서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하실지!”

재상 웨카타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조선이 원군을 보내주지 않으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사쓰마 번의 침략을 막을 길이 없었는데, 이제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이균이 유구국을 돕기로 한 것은 그들의 사정이 딱한 면도 있었으나, 왜의 군세가 얼마나 강한지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일통을 앞두고 수하의 배신으로 비명횡사한 후, 비루한 생선 장수 출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고 곧 전국을 통일할 것이다.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을 정벌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조선에게 길을 열어달라며 역사 그대로 조선을 침략할지도 모른다.

조선이 이제는 예전의 나약한 군사력을 가진 허약한 국가가 아니나, 백여 년 이상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으며 실전으로 단련된 왜군의 기세를 무시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이균의 생각이었다.

왜군과 일전을 치를 수도 있는 것이기에, 이균은 왜군의 전력을 탐색할 수 있는 전초전으로 유구국을 택한 것이다.

어찌 되었건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유구국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유구국이 스스로 조선을 찾아와 몸을 조아리며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조공으로 바치고 조선에 군신의 예를 표하며 원군을 요청했다는 소식은 조선 팔도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포르투갈, 야인에 이어 이제는 왜와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도 있었으나, 비록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유구국이 조선을 찾아와 스스로 모을 조아리고 조공을 마치며 군신의 예를 갖추겠다고 하니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조선은 유구국 사신단에 곧 1만여 명의 병력을 파병할 것을 약조했다.

1만여 명의 병력을 파병하겠다는 약조를 받자, 유구국 세자와 재상 웨카타는 감격스러움에 눈물을 훔치며 이균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아무 대가 없이 1만여 명이나 되는 군대를 파병할 수는 없는 법!

조선은 파병과 함께 상단을 보내 유구국이 행하던 중계무역에 진출하기로 했으며, 유구국의 기후가 온화하기에 설탕을 제조할 수 있는 사탕수수를 유구국의 농민들과 함께 경작하기로 했다.

플랜테이션 농업이 시작되고 있어서 사탕수수가 신대륙 식민지에서 점차 대규모로 경작되고 있었으나, 여전히 설탕은 쉽게 맛볼 수 없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평민들은 너무나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설탕을 구하기 어려웠고, 왕족이나 귀족들이나 종종 맛을 볼 수 있는 귀한 것이었기에, 사탕수수를 경작해 설탕을 정제해 만들어 팔면 막대한 이문을 남길 수 있었다.

하와이에 이어 조선과 가까운 유구국에 사탕수수를 경작하면 유구국에서 나오는 사탕수수를 가지고 설탕을 정제해 왜, 중국, 유럽 등에 팔면 큰 이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이균의 생각이었다.

***

“무엇이라! 유구국이 군량미를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냐?”

사쓰마 번의 영주 시마즈 요시히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부장을 바라보았다.

“그러하옵니다. 방금 유구국에서 다녀온 사자가 군량미를 바치지 않겠다는 유구국 왕의 서신을 가져 왔습니다.”

부장이 두 손을 받들어 유구국 국왕의 서신을 주군에게 바쳤다.

시마즈 요시히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부장이 건넨 유구국 국왕의 서신을 펼쳤다.

“이놈들이 미친 것이 아니냐!”

유구국 국왕 쇼에이는 사쓰마 번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이 대군을 이끌고 와 유구국을 점령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사쓰마 번이 요구하는 것을 뭐든지 들어주던 나약한 국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낸 쇼에이 왕의 서신은 오만방자하기 그지없었다.

사쓰마 번을 도적이라 칭하며, 더는 도적 떼의 도적질에 당할 수 없다며 사쓰마 번을 맹비난하고 있었다.

“주군! 유구국이 제정신이 아닌 모양입니다.”

부장도 유구국 국왕이 보낸 서신을 보고 어이가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사쓰마 번은 토양이 척박하여 곡식이 잘 자라지 않았고, 그리하여 그들은 큰 전쟁이 있을 때마다 유구국에게서 군량미를 강탈해 전쟁에 충당해왔다.

이번에도 큐슈를 통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사쓰마 번은 당연히 유구국에게 군량미를 요청한 것인데, 유순했던 유구국이 군량미를 못 주겠다고 버티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도적이라 맹비난하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저놈들이 믿는 구석이 있어서 저러는 것이 아니냐? 명나라한테 붙어먹은 것이냐?”

“명나라는 지금 황제가 미쳐 날뛰고 있어, 남을 도울 여력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도요토미 히데요시한테 붙은 것이냐?”

시마즈 요시히사가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유구국에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저놈들이 왜 저러는 것이냐? 유구국 왕이 명나라의 황제처럼 미친 것이냐? 돌아도 정도껏 돌아야지…….”

사쓰마 번의 영주 시마즈 요시히사는 유구국의 오만방자함이 아직도 황당한지 헛웃음을 지었다.

“영주님! 유구국의 오만방자함을 두고 볼 수 없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것이 아닌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한 번 꿈틀거려 본 것 같은데……. 제 놈들이 꿈틀거려 봤자 지렁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겠구나.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저 유구국 왕을 바꾸어 버려야겠다!”

시마즈 요시히사는 큐슈 통합은 잠시 뒤로 미루고 자신들에게 반기를 든 유구국을 먼저 치기로 했다.

“그리하시옵소서. 소장에서 3,000여 명의 병력만 주시면 유구국 왕의 목을 한나절 안에 바칠 수 있사옵니다.”

요시히사의 부하 장수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군사를 내어주면 유구국을 단숨에 정복하겠다며 호언장담했다.

“형님! 저에게 군사를 내어주시옵소서. 제가 직접 형님을 대신해 군사를 이끌고 가 유구국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것이옵니다.”

부하 장수가 군사를 내어달라고 하자, 이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영주 요시히사의 동생 시마즈 요시히로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마즈 가문의 4형제는 모두 제법 뛰어난 무장으로서의 재능을 가지고 있어, 각자의 위치에서 활약하며 큐슈 일통을 앞두고 있었다.

그들 4형제는 서로 합심하여 사츠마, 오오스미, 그리고 1578년에는 휴가까지 그들의 손아귀에 집어넣으며 큐슈의 강력한 세력이 되어 있었고, 이제 숙적 오오토모 가문을 치면 큐슈를 전부 그들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는데, 오오토모 가문을 치기 위한 군량미 요청을 유구국이 거부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흐음. 아우가 직접 나서준다면 걱정할 것이 없겠지. 하지만 유구국을 치는데 아우까지 나설 필요가 있겠는가? 유구국 병졸들은 허수아비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아우인 시마즈 요시히로가 직접 나서겠다고 하자, 시마즈 요시히사는 든든한 듯 미소를 지었으나, 굳이 소국에 불과한 유구국을 치는데, 아우가 나설 필요가 없을 것이라 여겼다.

“형님! 유구국이 비로 작은 나라라고는 하나, 배후를 든든히 하지 않으면 오오토모 가문을 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유구국이 오오토모 가문과 협작하여 저희의 뒤통수를 치려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나서서 유구국를 확실히 밟아 놓아야 큐슈를 일통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말을 듣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사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흐음. 아우의 말이 맞는 것 같구만. 그럼 고생스럽더라도 아우가 유구국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시마즈 요시히사는 결국 아우 시마즈 요시히로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유구국이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오만무도하게 나오자, 시마즈 요시히사는 결국 그의 아우를 직접 보내 유구국을 정벌하기로 했고, 곧 유구국 정벌을 위한 그의 충성스러운 군대가 소집되었다.

***

“와아아아!”

“조선군이다!”

어명을 받들어 정발 장군이 이끄는 1만여 명의 구원군이 마침내 유구국의 도성에 당도했다.

수많은 깃발과 번득이는 갑주로 무장한 기병들이 위풍당당하게 유구국의 도성 슈리성을 향해 가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팽배수, 조총병, 궁수, 도수 등 다부진 모습으로 행진하고 있었으며 커다란 화포 수십 문이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 함께 가고 있었다.

1만여 명의 넘는 조선군이 각종 무기와 함께 긴 행렬을 이루며 나아가자, 유구국 백성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천군이 왔어! 천군이!”

시마즈 가문의 대군이 이곳으로 들이닥쳐 도성을 불태울 것이라는 두려움이 가득했던 유구국 백성들은 조선이 1만여 명에 이르는 대군을 보내오자, 그들을 하늘이 보내준 천군이라 부르며 격하게 조선군을 환영했다.

조선군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구국 백성들은 거리를 쏟아져 나와 인산인해를 이루며 조선군의 행렬이 지나갈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고, 일부 백성들은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눈물을 흘리며 조선군을 향해 큰절을 올리기도 했다.

수많은 인파가 그들을 열렬히 환대하자, 유구국 땅을 처음 밟아보는 조선군도 어리둥절한 듯했고 일부 신참 조선군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어느덧 긴 조선군 행렬은 유구국 왕 쇼에이가 사는 슈리성에 당도했다.

조선군이 슈리성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구국 왕 쇼에이는 일찌감치 대신들을 이끌고 정발을 비롯한 조선군을 맞이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와 조선군을 기다렸다.

백마를 탄 정발 장군이 말에서 내리자, 쇼에이 왕은 호위병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정발 장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장군. 먼 길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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