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유구국 구원 (1)
타커시는 아들 누르하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누르하치의 생각처럼 어차피 조선이 요동을 노리는 것이라면, 그들은 반드시 건주여진을 치려 할 것이다.
명의 도움 없이 건주여진만으로 조선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기에 명과 함께 조선을 치고 힘을 기른 후 대망을 꿈꾸고 있었다.
영민하고 용맹한 누르하치 덕분에 건주여진을 통합해 야인 부족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된 그들은 중원의 패권을 두고 조선과 일전을 벌일 것이다.
“당장! 요동총병부에 우리의 뜻을 전하거라!”
“존명!”
***
만력제의 황명에 따라 급하게 조선군을 토벌할 정병을 모집했다.
“이런 제기랄! 세금을 그렇게 뜯어가더니 이제 무슨 또 전쟁을 하겠다고…….”
“미친놈의 황제가 아니던가!”
그러나 징집이 된 명나라 백성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내탕금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만 뜯어가 가뜩이나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데, 이제는 전쟁을 하겠다고 징집을 하고 있으니, 명 조정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달했다.
“대체 누구랑 전쟁을 하겠다는 것인가?”
“조선과 전쟁을 하겠다는구만. 조선이 요동을 노리고 있다고 하던데.”
“제기랄! 차라리 조선이 자금성을 쳐들어가 미친 황제의 목을 베었으면 좋겠구만!”
만력제의 폭정에 백성들은 명 조정에 대한 반감이 가득했다.
최악의 흉년까지 겹쳐 힘겨운 상황에서 세금까지 엄청나게 뜯어내니, 백성들은 전국을 떠돌며 유리걸식하거나, 일부는 명 조정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정부군에 대항하며 반군이 되기도 했다.
그러하니 병부상으로 300만의 정병을 동원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명 조정이 실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병부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만력제가 내탕금만 뜯어내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병부상에 이름이 올라온 이들도 태반은 훈련을 하나도 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이에 명조정은 부랴부랴 조선을 치기 위한 병력을 모집했고 명 조정은 황제에게 40만 대군을 모았다며 허풍을 떨었으나, 실제로 모집된 병력은 약 16만 정도에 불과했고, 그들 중 상당수는 훈련이 하나도 안 된 노인들이 끼어 있는 오합지졸이었다.
“황상 폐하 조선을 치기 위한 군사를 모두 모집하였나이다!”
재상 신시행이 머리를 조아리며 만력제에게 이를 알렸다.
“흐음. 그러하느냐! 그래 병졸이 얼마나 되느냐?”
만력제가 심각한 표정으로 신시행을 바라보았다.
“족히 40만 대군이 되옵니다!”
“하하하! 40만 대군이라. 그러하다면 한 줌도 안 되는 조선놈들을 당장 몰아낼 수 있지 않겠느냐!”
소집된 병력이 40만이나 된다는 말을 들은 만력제는 웃음이 만연했다.
“그러하옵니다. 황상 폐하의 충성스러운 황군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오만방자한 조선군을 응징할 것이옵니다!”
“그래! 아주 좋구나. 당장 요동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조선 놈들을 도륙하도록 하거라. 내 조선을 정벌해 조선왕의 목을 이곳 자금성에 효수하여 대명국에 반기를 들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황상 폐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조선군은 황군의 적수가 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신시행이 말하는 40만 대군이 사실은 장부상의 병력으로 실제 병력은 16만여 명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대부분 훈련이 되지 않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만력제는 이제야 마음 편히 두 발을 쭉 뻗고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
조선군 진영
해서여진을 정벌하고 해서여진 진영에 머무르고 있는 신립의 북방군단 병졸들이 고된 훈련을 마치고 삼삼오오 모닥불을 피워놓고 군침이 도는 통돼지 바비큐를 돌리며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맛이 아주 좋구먼!”
“그려! 훈련을 끝내고 먹는 고기가 제맛이구먼!”
온종일 계속된 훈련에 출출해진 병졸들은 갓 구워진 고기를 우걱우걱 입에 마구 집어넣었다.
큰 전쟁 없이 해서여진의 영역에 진영을 펼치고 있는 조선군의 보급은 무척 풍족한 편이어서, 병졸들은 고된 훈련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고기와 술을 마음껏 먹었기에 사기가 무척 높았다.
“자! 탁주도 한잔하게!”
“크……. 시원하구만!
고기에 시원한 탁주를 한 사발 들이켜니, 천국이 따로 없는 것 같았다.
다른 한편 식사를 모두 마친 병졸들은 서로 모여 불을 피워놓고 조총에 쓸 납탄을 만들고 있었다.
“흐음. 자네 작은 납탄도 좀 필요하니 만들도록 하게!”
“납탄의 크기를 달리하란 말씀입니까?”
이제 갓 북방에 배속된 신입 병졸이 왜 납탄의 크기를 달리 만들라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참 병졸을 바라보았다.
“흐음. 우리가 쓰는 조총에 강선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조총을 계속 쏘다 보면 화약이 총열을 차게 되네. 그렇게 되면 총열이 구경이 작아지니 작은 납탄을 넣어야 하네.”
야인들과 목숨을 건 전쟁을 치른 고참 병졸이 미소를 지으며 신입 병졸에게 구경이 작은 납탄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아하! 그러하군요…….”
신입 병졸은 이제야 이유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런데. 이제 명과 전쟁을 하는 것입니까?”
신입 병졸이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고참 병졸을 바라보았다.
“흐음. 조만간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러하니 신립 장군께서도 연일 강훈련을 시키는 것이겠지.”
고참 병졸이 밤하늘에 뜬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명과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훈련소를 마치고 최전방으로 배치된 보충병들은 야인들을 연달아 격파하고 명나라와의 일전을 앞둔 고참 병졸들이 존경스러우면서도 직접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서야 한다는 두려움 공존했다.
“왜 두려운가?”
“그……. 그것이 조금 그렇습니다.”
“흐음. 그럴 수밖에 두렵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겠지. 하지만 침착하게 평소 훈련받은 대로 하면 되네. 옆에서 자네를 도울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고참 병졸은 이제 갓 전입해 온 두려움이 가득한 신입 병졸을 다독였다.
그러나 한 번도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보충병은 늦은 밤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막사에서 뒤척였다.
신립은 명나라와의 일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병졸들의 훈련량을 늘리면서도 병졸들에게 풍족한 음식과 휴식을 보장해주며 병졸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힘썼다.
***
유구왕국 슈리성
오키나와 섬을 근거로 하는 유구 왕국은 일본도와 조총으로 무장하고 온 사스마번의 사절단이 국왕이 거주하는 슈리성을 방문했다는 소식에 침통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폐하! 사스마의 시마즈 가문이 또 사신을 보내 군량미를 내놓으라 하고 있사옵니다.”
유구 왕국의 재상 웨카타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쇼에이 왕을 바라보았다.
“흐음. 사쓰마 번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니, 걱정이구나. 도대체 어찌하면 좋겠는가!”
규슈의 사쓰마번이 또다시 군량미를 요구한다 하자, 쇼에이 국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규슈의 유력한 가문 시마즈 가문은 규슈 통일을 앞두고 전쟁에 필요한 군량미를 내놓으라 유구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작은 섬나라에 불과한 유구국은 사쓰마번의 무력침공이 두려워 그들이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어렵게 군량미를 마련해 그들에게 바쳐 그들의 침공을 피하기는 했으나, 유구국이 나약한 국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쓰마번의 요구는 점차 노골적으로 바뀌었다.
수시로 군량미, 성을 짓는 데 필요한 은자, 유구 왕국의 특산품 등 온갖 것 등을 요구하며 왕을 겁박하니, 그 횡포에 쇼에이 국왕은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폐하! 사쓰마번의 요구가 이제 도를 넘고 있습니다. 이대로 그들이 요구를 다 들어주다가는 나라가 망하고 말 것입니다. 차라리 그들과 일전을 각오하시는 것이!”
재상 웨카타는 사쓰마번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느니 차라리 그들과 일전을 벌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재상! 우리가 그들의 군력을 당할 수 있겠소, 그들은 큐슈 통일을 앞둔 강력한 군벌이거늘…….”
쇼에이 국왕은 차라리 그들과 일전을 벌이자는 재상 웨카타가 어떤 심정인지 이해가 되었지만, 강력한 군대를 소유한 사스마번과 일전을 벌이는 것은 나라를 망국에 이르게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다.
“폐하!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가는 나라의 곳간이 텅텅 비게 될 것이옵니다.”
명, 조선 그리고 포르투갈, 스페인 등과 무역하며 꽤 많은 재물을 벌어들이고 있는 유구국이었지만, 재물을 벌면 무엇하랴!
재물을 버는 족족 해적 같은 사쓰마번이 뜯어가니…….
“명나라는 답이 없는 것이오.”
“폐하! 명 황제가 미쳐 날뛰고 있어 명의 상황도 좋지 않은 것 같사옵니다. 게다가 조선이 명의 북방을 괴롭히고 있어 우리를 도와줄 여력이 없사옵니다.”
사쓰마번의 횡포가 심해지자, 유구국은 조공을 바치고 있던 명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만력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미치광이 황제 짓을 하고 있었기에 작은 나라에 불과한 유구국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조선이라! 조선도 작은 나라이거늘……. 그런 조선이 대명국을 괴롭힌다는 것이오?”
“폐하! 조선은 이미 저희가 알고 있던 작은 나라가 아니온 듯하옵니다. 듣기로는 20만이 넘는 대군을 양성해 대명국을 위협하고 있다 하옵니다.”
조공이나 바치며 명을 부모의 나라라 떠받들던 조선이 어느새 20만 대군을 가진 강한 국가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쇼에이 왕은 조선이 한없이 부러웠다.
“흐음. 가만있자! 그렇다면 조선에 도움을 청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우리 유구국이 조선과도 교류를 하고 있으니……. 어찌 잘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불현듯 쇼웨이는 조선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어떨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폐하! 좋으신 생각이옵니다. 조선이 비록 왜와 교역하고는 있으나 우리 유구국과도 교린하고 있으니, 응당 조선의 뜻을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이 강군을 보유하고 있으니, 조선이 우리 유구국을 돕는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름이 없사옵니다!”
재상 웨카타는 왕이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놀라며 왕의 뜻에 전극 찬동했다.
사실 사쓰마번의 횡포에 다급한 유구국으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기에 조선이 유구국을 도울 것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음에도 조선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흐음. 그럼 세자를 직접 사절단으로 보내도록 하겠소!”
쇼에이 왕은 세자를 직접 조선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폐하! 조선까지는 먼 길이온데, 풍랑이라도 만나면 세자께서 위태로울 수 있사옵니다. 제가 가도록 하겠나이다!”
“아니요. 우리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거늘. 마땅히 세자가 나서 조선에 예를 표시해야 할 것이요.”
쇼에이도 세자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나라가 위급하니 세자를 보내 조선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폐하! 그리하오면 제가 함께 조선으로 가 세자저하를 보필하도록 하겠나이다!”
“흐음. 그대가 함께 해주면 큰 힘이 될 것이오. 우리 유구국의 운명이 그대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쇼에이 왕의 눈시울이 불거졌다.
“폐하! 소신 조선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살아서 조선 땅을 떠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기필코 조선의 원군을 받아 올 것이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재상 웨카타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국왕을 바라보았다.
한 달 후 조선의 왕에게 바칠 말, 나각, 유황, 소가죽, 상아, 주석, 향신료 등 온갖 진귀한 보물을 가득 실은 무역선단이 세자와 재상 웨카타를 태우고 조선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