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무적함대와의 일천 (6)
학익진!
한산대첩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사용되었던 전법을 이순신은 아조레스 제도에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순신이 큰 소리로 학익진을 사용하라 외치자 커다란 파란 깃발이 올라섰고, 이를 본 연합군 함선들은 훈련한 대로 배를 돌려 학이 양 날개를 크게 펼치듯 반원 모양으로 늘어서 함선을 정렬했다.
“후작님! 적선이옵니다!”
기세 좋게 화포를 쏘며 조선군의 판옥선을 쫓던 스페인 함대는 섬과 섬 사이를 일렬로 빠져나간 후 깃발을 펄럭이며 그들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조선군과 포르투갈의 함선들을 보고야 말했다.
“이놈들이!”
좁은 수로를 빠져나온 스페인 함선들은 그들이 조선과 포르투갈의 연합함대에 포위당했다는 것을 알고 적잖이 당황했고, 함대를 지휘하고 있는 산타크루즈 제독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적선이 좁은 수로를 지나 섬 뒤에 이렇게 대기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작님! 유인책에 저희가 당한 것 같습니다!”
부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산타크루즈를 바라보았다.
“저놈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온갖 해전을 다 경험한 산타크루즈 후작은 처음 보는 연합군의 대형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마치 학이 커다란 날개를 펼치듯 상대 함선을 둘러싸고 있는 진영은 육지에서는 자주 활용하는 전법이기는 하나 바다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순신은 학익진을 들고나와 그를 당혹스럽게 했다.
적장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는 한참을 생각했다.
“후작님! 어찌해야 하옵니까”
처음 보는 전법에 잠시 당황했던 산타크루즈 후작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평온함을 되찾고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하! 적장은 머저리가 분명하다!”
“후작님! 무슨 말씀이신지?”
“저놈들이 우리를 포위해서 함포 사격을 하려는 모양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함선의 숫자가 우리보다 많아야 하거늘. 그런데 저놈들의 함선이 부족하니 양측 측면이 거의 비어 있고 중앙 또한 허술하기 그지없다. 연합군의 지휘관은 병략의 기본도 모르는 애송이가 분명하다. 중앙을 향해 전속으로 돌진해 진영을 무너트리면 이 전쟁은 끝난다!”
역시 산타크루즈 후작은 백전노장의 늙은 여우 같았다.
명성은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학익진의 약점을 바로 간파하고 중앙을 향해 함대를 돌진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명령을 받든 스페인 함대는 빠른 속도로 방어선이 취약한 연합군 중앙을 향해 물살을 갈랐다.
“제독님! 중앙을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피고 있던 이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함에서 다시 커다란 깃발에 올라갔고, 섬에 숨에 있던 함선 40여 척이 갑자기 나타나 학익진의 취약한 좌측과 우측으로 향했다.
“후……. 후작님! 영국과 네덜란드 함선이 갑자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갑자기 영국과 네덜란드의 함선이 나타났다는 부관의 말을 들은 산타크루즈 후작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측면을 바라보았는데, 부관의 말처럼 양 측면에 함대가 나타나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고 함대에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원군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산타크루즈 제독이 당황하며 부관을 나무랐다.
“저희도 그리 알고 있었는데…….”
기만술!
이순신은 다시 한 번 기만술을 썼다.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 등에 포르투갈의 원군을 요청했지만, 이들이 원군을 거절해 조선군과 포르투갈군만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맞설 수밖에 없다는 거짓 정보를 의도적으로 흘렸다.
그러나 이순신과 함께 온 병조참의 이항복은 아조레스 제도를 비밀리에 떠나 스페인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영국,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과 치열한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는 네덜란드에 잠입해 원군을 요청했다.
이항복은 특유의 말발로 스페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여왕의 나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에게 스페인과 대적할 원군을 보내 달라고 설득했다.
유럽은 스페인 천하였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영지 네덜란드, 롬바르디아, 시칠리아, 사르드니아, 이탈리아 남부 등 오스트리아와 동유럽을 제외한 대부분의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를 상속받은 금수저였다.
게다가 신대륙 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와 쿠바, 멕시코에서 파나마에 이르는 중앙아메리카,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칠레가 모두 스페인의 영토였다.
게다가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크까지 격파하니 유럽의 바다도 스페인 것이었다.
반면 엘리자베스 1세가 갓 즉위한 영국은 대제국을 건설한 스페인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변방의 나라에 불과했다.
한때 프랑스의 영토 절반을 가져가며 기세를 올린 적도 있는 영국은 당시 네덜란드 해안 일부를 제외하고는 해외 영토가 없었으며 인구가 채 300만이 되지 않는 소국에 불과했다.
이에 이항복이 원군을 요청했을 때 영국은 이를 반대하였으나, 이항복은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떨어지면 펠리페 2세는 다음으로 영국을 노릴 것이라며 영국의 지원을 설득했다.
사실 영국은 당시 스페인 같은 제국이 되기 위해 해외로 나가고자 하였으나, 이미 전 세계 바다를 장악하고 있는 스페인의 방해를 받고 있었고,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원하고 있어 스페인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이항복이 훤칠한 키에 조각 같은 외모 그리고 여자를 푹 빠지게 하는 말솜씨를 발휘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혹하고 이항복에 넘어와 원군을 보내기로 약조했다.
그리고 스페인과 처절한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는 네덜란드로 간 이항복은 쉽게 네덜란드의 승낙을 받아냈다.
알바 공작의 무자비한 신교도 탄압으로 스페인을 증오하던 네덜란드는 당연히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병합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스페인의 세력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함대를 보내기로 약조한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은 영국과 네덜란드가 비록 적은 숫자이기는 하지만 함대를 보내리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순신의 기만술이 완전히 통한 것이다.
산타크루즈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함대가 매복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함대를 이끌고 취약해 보이는 중앙을 향해 돌진했으나, 섬 뒤편에 매복하고 있던 네덜란드와 영국 함선 40여 척이 양측에서 불쑥 나오니 스페인 함대는 양쪽 측면까지 완전히 포위되어 버리는 양상이 되어 버렸다.
스페인 함대가 거대한 학익진을 펼친 연합군 함대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자 이순신은 불끈 쥐었던 주먹을 편 후 허리춤에 차고 있던 환도를 높이 쳐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방포하라! 적선을 분멸하라! 한 척도 살려 보내지 마라!”
마침내 화포를 쏘라는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지자, 연합함대의 기함에서 화포를 방포하라는 커다란 깃발이 올라오자, 스페인 함대를 포위한 연합함대의 포문이 일제히 열렸다.
-퍼퍼퍼 펑!-
스페인 함대를 향해 일자로 늘어선 함대의 포에서 곧 불꽃이 일어나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며 거대한 철환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발사되어 스페인 함선을 향해 날아갔다.
“사……. 살려줘!”
“배를 지켜라!
스페인 함대 앞에 거대한 물보라가 일어났고, 스페인 함대의 함선은 사정없이 떨어지는 포탄에 심하게 파손되고 병졸들도 포탄을 맞고 시퍼런 바닷속에 빠지거나 비명을 지르며 신음했다.
“이런 조선놈들이!”
자신의 무적함대가 포위되어 연합함대의 맹렬한 화포 공격을 받아 큰 손실일 입자, 산타크루즈 제독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무엇보다도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조선의 애송이 같은 지휘관의 지략에 완전히 당한 자신이 치욕스럽게 느껴졌다.
“겁먹지 마라! 적선은 얼마 되지 않는다. 돌진하라! 화포를 방포하라!”
-콰콰콰 쾅-
이순신의 연합함대가 맹렬히 화포를 쏘자, 스페인 함대도 화포를 쏘며 저항했으나, 사방에서 스페인 함대를 포위하고 포를 쏘아대는 연합함대의 강력한 화력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순신의 연합함대는 반원을 그리며 적선을 향해 일자로 둘러싸고 있어 자유롭게 스페인 함대를 향해 화포를 퍼부을 수 있었으나, 연합군 함대에 포위된 스페인 함대는 중앙에 몰려 앞선에 선 함선들만이 화포를 쏠 수 있었다.
또 연합함대의 함선은 가로로 서 있어 함선의 화포를 모두 이용할 수 있었으나, 스페인 함선은 조선을 세로로 보고 있어 화포를 온전히 활용할 수 없으니 스페인 함선이 그 숫자가 많다고는 하나 화력에 있어 연합군 함대의 상대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스페인 함대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연합함대의 화포 공격에 차례차례 박살이 나 거대한 괴물같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바닷속에 하나둘 수장되어 갔다.
검은 연기가 사방에 피어오르고, 바다에는 어느덧 피를 흘리며 쓰러진 스페인 해군의 시체가 둥둥 떠다녔다.
“후……. 후작님. 적들의 화력이 너무 강합니다! 이대로는…….”
연합군을 단숨에 몰아붙여 아리따운 미녀를 옆에 끼고 승리의 축배를 들겠다던 자신만만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스페인 병졸들은 끝도 없이 계속되는 맹렬한 연합함대의 화포 사격에 겁에 잔뜩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겁에 질린 병졸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거나 사방팔방 화승총을 쏘며 울부짖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이런 멍청한 녀석들! 네놈들이 무적함대의 해군이라 할 수 있느냐. 도망치는 녀석은 목을 베어 버릴 것이다. 적선을 향해 돌진하라는 말이다. 중앙만 뚫리면 우리가 이길 수 있어!”
“후작님! 적들이 화력이 너무 강해 중앙을 돌파하기가 어렵습니다. 후퇴하시고 다음을 도모하시는 것이!”
부관이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산타크루즈 후작을 바라보았다.
“이런 멍청한 녀석! 포위된 것이 보이지 않느냐! 도대체 어디로 후퇴를 하라는 것이냐. 우리가 살길은 중앙을 돌파하는 길밖에 없어!”
산타크루즈는 고함을 치며 함선들을 향해 돌진하라고 외쳤으나,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고 전의를 상실한 스페인군에게 그의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적선이 불타고 있다! 더욱 매섭게 몰아붙여라!”
“조국을 빼앗은 원수를 무찔러라!”
한 번도 해전에서 져본 적이 없는 스페인 함대가 불타오르자, 브라간사 공작은 희열을 느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스페인 함대를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포르투갈 병졸들도 사기가 올라 맹렬한 포격을 계속했다.
“활을 쏘아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조선군은 화포에 이어 화살까지 퍼부었고, 스페인군의 비명은 더욱 커져만 갔다.
화포와 활의 콜라보레이션에 스페인군 진영은 큰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으악! 피해!
돌진을 하다 급히 방향을 돌려 후퇴하다가 자신들의 함선과 서로 부딪혀 갑판에 있던 병졸들이 배에서 떨어져 나갔다.
대형이 무너진 지는 오래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이로구나!’
산타크루즈 후작은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함선은 이미 절반이 넘게 수장되었고, 병졸들도 물고기 밥이 되어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중앙만 돌파하면 되거늘. 방법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고 이대로 좌절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난국을 돌파한 뾰족한 수를 생각해야만 했다.
‘그……. 그래! 무한정 화포를 쏠 수는 없다. 화포를 장전하는 시간을 노리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있던 산타크루즈가 자리에서 일어나 맹렬하게 화포를 쏘는 이순신의 연합함대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