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무적함대와의 일전 (5)
거대한 갈레온선이 판옥선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해 오자, 홍이포를 장전하고 잔뜩 웅크리고 있던 조선의 병졸들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훈련을 거듭했지만, 적선과 직접 교전하는 실전은 처음이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엄습하는 두려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순신과 함께 고된 훈련을 견디어 냈기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도 훈련한 대로 진을 펼치고 무기를 들고 곧 있을 전투를 대비했다.
“일자진을 펼쳐라!”
스페인 함선이 돌진해 오자 홍남기 대좌가 탑승한 대장선에서 일자진을 펼치라는 깃발이 올라왔고, 깃발을 본 판옥선은 훈련한 대로 일제히 빠른 속도로 일자로 늘어섰다.
일자진은 화포를 방포하기 좋은 대형이었기에, 홍남기는 일자진을 선택한 것이다.
적선이 점점 가까워지자 포수들은 어서 빨리 홍이포를 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홍남기 대좌는 침착하게 적선이 홍이포 사거리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적선이 너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이제 화포를…….”
다급한 부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홍남기 대좌를 바라보았다.
“아니다. 조금만 더…….”
그러나 홍남기 대좌는 침착하게 적선이 좀 더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전장에서는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라는 이순신의 말의 떠오른 그는 좀 더 좀 더 스페인 함선이 다가오게 했다.
"방포하라! 적선을 섬멸하라!“
드디어 스페인 함선이 판옥선에 장착된 홍이포의 사거리 안에 들어오자, 홍남기 대좌는 큰 소리로 화포를 발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이 떨어지자 판옥선의 홍이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퍼퍼퍼퍼 펑!-
“두려워하지 말고 함포를 모두 쏘아라! 적선을 분멸하라!”
돌진해 들어오는 스페인 함대를 향해 일자진으로 늘어선 판옥선에서 발사된 철환이 커다랗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정확히 스페인 함선을 명중시켜 커다란 파편이 사방에서 튀었다.
“으……. 으악!”
화포는커녕 변변한 무기조차 없어 보이는 판옥선에서 갑자기 화포가 발사되자 스페인 함대의 병졸들은 당황했고, 조선 해군이 강력한 화망을 구성하며 연속하여 화포를 발사하자 상당수의 갈레온선이 파손되어 배에 물이 들어와 병졸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며 수장되었다.
“저……. 저런!”
자신의 함대가 우습게 여긴 조선군 함대의 맹렬한 포격을 받아 손실을 입자, 산타크루즈 후작도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조선 해군이 강렬하게 화포 공격을 해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함선의 방향을 틀어라!”
홍남기 대좌가 화포의 방향을 틀라고 하자 대장선에 다시 커다란 신호기가 올라갔고, 그러자 일자진을 펼치고 화포 공격을 하던 조선 함대는 갑자기 함선을 180도로 회전하더니 다시 화포를 발사했다.
“퍼퍼퍼퍼 펑!”
스페인 함대를 향해 있던 판옥선의 홍이포가 발사되는 동안, 반대편에 있던 홍이포가 장전을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방향을 바꾸어 적선을 향해 바로 화포를 발사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군 판옥선이 방향을 바꾸며 쉬지 않고 강력한 화포를 발사하자, 스페인 함선에서는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홍이포에 발사된 수십 개가 넘는 커다란 철환이 하늘을 뒤덮더니 갈레온선 갑판이나 선체에 빠른 속도로 떨어져 선체를 파손하고 철환을 직접 맞은 일부 병졸은 비명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즉사했다.
“살……. 살려줘!”
벌써 스페인 함대 10여 척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침몰했고, 배가 침몰하자 바다에 몸을 던진 스페인 병졸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기세 좋게 돌진하던 스페인 함선들이 조선 판옥선의 매서운 화포 공격에 주춤하자, 처음 경험하는 실전에 잔뜩 움츠리고 있던 조선의 병졸들은 조금씩 자신감을 가졌다.
“서반아 배들이 침몰하고 있다!”
“무적함대니 뭐니 하더니 별것 아니구만!”
사기가 높아진 조선군은 혼신의 힘을 다해 화포를 계속 발포했고 조총수들도 함께 조총을 쏘며 스페인군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활을 쏘아라!”
스페인 함선이 자기 생각보다 큰 타격을 입자, 이를 망원경으로 보고 있던 홍남기 대좌는 조선이 자랑하는 국궁을 쏘라 명령을 내렸고,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이 스페인 함선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조선 제일의 궁수들이 발사한 활은 곧 비처럼 하늘을 뒤덮으며 스페인 함선을 향해 날아갔다.
“사……. 살려줘!”
“으악!”
스페인 병졸들은 곧 무방비 상태에서 온몸에 활 세례를 받고 갑판에 나뒹굴며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생전 처음 조선군이 자랑하는 활의 무차별 공격을 받은 스페인군은 생각보다 큰 손실을 보았다.
조선의 활은 엄청난 사거리를 자랑하며 스페인 함선 곳곳에 떨어져 스페인군을 쓰러트렸다.
“이……. 이런!”
산타크루즈 후작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조선 함대에 이렇게 고전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그는 치욕스럽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함포를 쏴라! 돌진하라! 두려워 마라! 적선은 한 줌도 되지 않는다.”
자신의 함대가 채 10척도 안 되는 판옥선에 고전하자, 산타크루즈 후작은 병졸들을 다독였다.
-퍼퍼퍼퍼 펑!-
조선 함대를 단숨에 전멸시킬 것처럼 돌진하던 스페인 함대는 조선의 지중해 함대가 화포를 쏘며 맹렬히 저항하자, 그들도 화포를 쏘며 맞대응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일부 함선은 빠른 속도로 조선군을 향해 돌진했다.
조선과 스페인 함대는 화포를 서로 주고받으며 치열하게 교전했다.
하지만 조선의 판옥선 부대가 100여 척이 넘은 스페인 함대를 맞이해 상대적으로 잘 싸운 것은 사실이나, 스페인 함대의 압도적인 규모를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스페인 함선에서 쏘아대는 화포에 판옥선도 일부 파손되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손실을 감수한 스페인 함선의 저돌적인 돌진에 조선 함대는 점차 밀리고 있었다.
“더는 버티기 어…. 렵습니다!”
“흐음 퇴각하라!”
스페인 함선의 조선 판옥선 코앞까지 다가와 판옥선에 갈고리를 걸고 등선하여 백병전을 시도하려 하자 홍남기 대좌는 더는 버티기 어렵다고 여기고 퇴각을 명령했다.
퇴각 명령이 내려지자 판옥선은 일제히 방향을 틀었고 노꾼들은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고, 판옥선은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이동했다.
“적선이 도망친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판옥선의 뜻밖의 맹렬한 공격에 잠시 고전하던 스페인 함대는 판옥선이 도주하자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승기를 잡았다고 여긴 산타크루즈 후작은 판옥선을 쫓으라고 명령했고, 스페인 함대는 도주하는 판옥선을 추격하기 위해 속도를 냈다.
***
“흐음. 아직 함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네 아직 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순신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지 초조한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홍 대좌가 잘 해주어야 할 텐데…….”
“제독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할 것이옵니다!”
먼바다에서 요란한 화포와 조총 소리와 병졸들의 비명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이순신이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고 있었다.
지중해 함대 본대와 포르투갈 연합군 함선은 파이알 섬과 피코섬 사이를 지나 동남쪽에 대기하고 있었다.
갈레온선 20척과 판옥선 약 40여 척 그리고 첫선을 보인 거북선 3척이 대형을 펼치고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병졸들의 마음은 이순신의 그것과 같이 초조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화포 소리,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바람을 타고 풍기는 비릿한 피 냄새,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가 곧 벌어질 것이기에 병졸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이순신과 가까운 곳에서 조선이 만들어준 판옥선 약 10여 척을 지휘하고 있는 브라간사 공작도 초조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흐음. 늙은 여우! 산타크루즈가 과연 유인책에 걸려들 것인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이자 스페인의 전쟁 영웅 산타크루즈 후작이 과연 이순신의 계책에 넘어갈 것인지 브라간사 공작은 이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순신의 계책을 처음 들었을 때 그의 신기에 가까운 계책이 혀를 내둘렀다.
그의 계책대로만 된다면 잘하면 무적함대 스페인을 침몰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간사 공작은 전쟁의 신과 같이 전세를 금방 역전시킬 수 있는 계책을 짜낸 이순신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전투를 앞두고 있는 지금 새삼 다시 생각하니, 그 계책이 노련한 산타크루즈에게 발각이라도 된다면 대승은커녕 연합함대는 모두 수장되어 물고기 밥이 될 것이 뻔했다.
도박과 가까운 계책이었다.
전쟁경험이 없는 애송이에게는 통할 수 있는 계책일지 모르나, 늙은 여우 산타크루즈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 생각이 갑자기 드니 더욱 초조하고 입이 바싹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흐음. 이 도박에 포르투갈의 명운이 걸린 것인가?”
포르투갈 병졸들은 더욱 긴장했다.
“이러다! 우리 전멸하는 거 아닌가?”
“그……. 그러게. 함대를 지휘하는 자가 그 유명한 산타크루즈 후작이 아니던가. 그자를 어떻게 이긴다는 건지…….”
차라리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겁이 덜하겠지만, 이미 산타크루즈가 얼마나 위대한 전쟁 영웅인지를 알고 있는 그들이기에 그 공포감을 더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함대를 지휘하는 이순신인가 그자는 전투경험이 전혀 없다던데…….”
“그러게! 큰일이구먼 큰일이야!”
이순신이 해전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포르투갈 병졸들은 그냥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판……. 판옥선이다!”
홍남기 대좌가 이끄는 판옥선이 마침내 모습을 보였다.
스페인 함대와 처음 대적했던 판옥선은 스페인 함포의 공격을 받았는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도주하고 있었고, 그 뒤를 스페인 함대가 맹렬히 추격하고 있었다.
“흐름. 홍 대좌가 큰일을 했구나!”
홍남기 대좌가 적선을 유인하는 데 성공하자 이순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서 빨리!”
홍 대좌의 판옥선 선단이 스페인 함대에 따라 잡히려 하자 이를 지켜보는 조선의 해군들은 자신도 모르게 안달이 났다.
“저놈들을 추격하라! 한 놈도 살리지 마라!”
산타크루즈 후작은 신이 나서 판옥선을 추격하라 명령을 내렸고, 스페인 함선들을 더욱 속도를 냈다.
“제……. 제독님 수로가 너무 협소합니다. 함선이 한꺼번에 들어가기 곤란합니다. 무엇인가 이상합니다!”
조선의 판옥선이 파이알 섬과 피코섬 사이의 좁은 수로로 도주하자, 부관은 무엇인가 이상한 구석을 느꼈다.
“무슨 소리인가! 저놈들이 도주할 곳이 없으니 저곳으로 도주하는 것이 아닌가. 당장 함선을 일렬로 세워 저곳을 지나도록 해라!”
산타크루즈 후작은 판옥선이 스페인 함대의 위세에 눌려 도주하는 것뿐이라 여길 뿐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후작님! 그래도 조심하시는 것이!”
“하하하!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이냐. 너무 소심한 것이 아니냐. 잘 보아두거라 이 전투는 반나절도 안 돼서 끝날 것이니! 당장 적선을 추격하라!”
산타크루즈 후작은 펠리페 2세의 가문 출신으로 그의 후광을 입어 이번 전투에 참여한 부관의 조심스러운 모습이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존명!”
산타크루즈 제독이 좁은 수로를 통과하라는 명을 거두지 않자, 부관은 더는 이를 만류하지 못했고, 스페인 함선은 일렬로 대형을 바꾸어 파이알 섬과 피코섬 사이를 빠져나갔다.
‘흐음. 적들이 드디어.’
스페인 함선들이 그의 생각대로 좁은 수로를 따라 일렬로 빠져나오자 이순신은 회심의 미소를 날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학익진을 펼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