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이로운 군주 선조대왕 일대기-70화 (70/202)

70화. 포르투갈의 운명 (2)

“폐하! 걱정하지 마세요. 조국은 우리가 지킬 것이에요. 펠리페는 우리 땅을 한 발자국도 디딜 수 없을 것이에요.”

브라간사 공작부인 카탈리나가 숨을 헐떡거리는 엔히크의 손을 꼭 잡았다.

“흐음. 카탈리나! 니가 있어 든든하구나!”

엔히크는 미구엘 1세의 아들인 안토니우보다 사실 미구엘 1세의 친손녀인 카탈리나를 더 마음에 들어 했다.

안토니우는 미구엘 1세의 아들이기는 하나 사생아였고, 더욱이 그도 세바스티앙 1세처럼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자이기에 그가 왕통을 이어받으면 아비스 왕조는 또다시 위기에 빠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이미 펠리페 2세가 뿌리는 돈에 매수된 포르투갈 귀족들은 카탈리나가 왕통을 이어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사내가 아니었기에 더욱 왕통을 이어받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 엔히크의 걱정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미구엘 1세의 적장자였고, 그녀의 남편인 브라간사 공작 역시 포르투갈 왕가의 후손이었기에, 그녀는 충분히 왕통 계승을 주장할 수 있었다.

“폐하! 그러하옵니다. 펠리페 2세가 국경을 넘으면 우리 용맹스러운 전사들이 그들을 모두 제압할 것이옵니다.”

안토니우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철없는 녀석! 스페인의 군대를 막을 군인이 어디 있다는 것인지.’

엔히크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스페인 군대를 무찌르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안토니우를 보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국을 부디……. 잘 보……. 전하기를.”

“폐하!”

엔히크는 결국 풍전등화 같은 제국의 운명이 걱정되는지 편히 눈을 감지 못하고 눈을 뜬 채 숨을 거두었다.

엔히크가 결국 후사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리스본은 왕조의 숨통이 끊어질 것이며, 곧 스페인의 대군이 포르투갈을 침략할 것이라는 암울한 기운이 돌았다.

***

포르투갈 제국 의회

엔히크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을 왕을 정하기 위해 제국 의회가 소집되었다.

“당연히 다음 왕위는 주앙3세의 여동생 이사벨의 아들인 동시에 세바스티앙 1세의 외삼촌인 펠리페 2세께서 이어야 할 것이요. 그만큼 왕위를 이어받을 적통이 어디 있겠소!”

“그렇소! 왕위를 계승할 분은 펠리페 2세밖에 없소!”

펠리페 2세가 뿌리는 돈에 매수된 귀족이 펠리페 2세가 다음 보위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외쳤고, 이에 동조하는 귀족들이 일제히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요. 지금 나라를 스페인에 넘기자는 것이오. 그대들이 그러고도 포르투갈 제국의 귀족이라 할 수 있소.”

그러나 펠리페 2세가 왕위를 넘겨받는 것을 반대하는 일부 귀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격렬하게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뭐요? 우리를 지금 매국노 취급하는 것이요? 그럼 도대체 누가 왕통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것이오. 펠리페 2세만큼 정통성을 가진 자가 있소?”

“미구엘 1세의 아드님 안토니우 공이 있지 않소. 안토니우 공은 미구엘 폐하의 적통이지만, 펠리페는 외가 쪽 피를 물려받은 것에 불과하소. 안토니우 공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하오!”

“옳소!”

안토니우를 지지하는 세력이 들고일어나 안토니우가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외쳤다.

“안토니우 같은 사생아가 어떻게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이오. 감히 사생아 따위가 왕위를 계승한다면 제국의 왕은 유럽 왕가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하하하하! 감히 사생아 따위가 왕이 되겠다니.”

“무엇이라! 지금 안토니우 공을 모욕하는 것이오. 당장 그 입을 다무시오!”

안토니우의 지지세력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펠리페 2세를 지지하는 세력은 그를 사생아라 비웃으며 그를 깎아내렸고, 안토니우파는 자리에서 일어나 펠리페 2세를 지지하는 세력을 향해 삿대질하며 고함을 쳤고 의회는 서로 막말이 오가며 난장판이 되었다.

‘나라가 망하겠구나!’

이 꼴을 보고 있던 이항복의 장인 브라간사 공작은 제국의 운명은 생각지도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전투구 하는 그들이 한심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 무슨 짓들을 하는 것이오. 다음 왕위는 카탈리나 공비께서 되어야 하오. 공비께서는 미구엘 1세의 친손녀로 고귀한 혈통이시고 또 브라간사 공작께서도 왕가의 후손이 아니오. 또 선왕께서도 카탈리나 공비께서 왕통을 이어받기를 원하셨으니, 당연히 선왕의 뜻에 따라 카탈리나 공비께서 다음 보위를 이어받아야 하지 않겠소.”

이번에는 카탈리나를 지지하는 세력이 그녀가 보위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외쳤다.

“하하하! 무슨 여자 따위가 왕이 된다는 것이오. 왕위를 이어받을 자는 펠리페 공밖에 없소!”

“무슨 말이오! 스페인에게 나라를 팔 수 없는 노릇이오. 스페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안토니우 공이 보위를 이어받아야 하오.”

의회는 누구를 왕으로 정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펠리페 2세가 뿌리는 돈에 매수된 귀족들이 펠리페 2세를 지지하고 있기에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었으나, 뿌리 깊은 반스페인 정서와 안토니우나 브라간사 공작비인 카탈리나를 지지하는 세력도 꽤 있어 의회에 모인 귀족들은 서로 다투기만 할 뿐 왕을 결정하지 못했다.

***

오래간만에 바다가 평온했다.

바다는 잔잔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어 포르투갈을 구원하기 위한 지중해 함대는 빠른 속도로 이베리아반도를 향해 가고 있었다.

메모광 이순신은 선실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서반아 해군이 유럽에서 최강이라 하던데, 우리 함대가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는지…….”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는 법.

이순신은 자칫 해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스페인군 특히 해군에 대해 여러 서적을 통해 연구했다.

“무적함대라!”

이순신이 알아본 스페인 해군은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로 최강이었다.

스페인 함대는 이교도 오스만 투르크의 강력한 함대를 레판토 해전에서 박살 내며 그 명성을 높였고, 유럽의 어느 국가도 강력한 스페인 함대에 대적하려 하지 않았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깃발만 보아도, 두려움에 떨며 도주하였고, 스페인 제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바다를 지배했다.

그런데 조선 해군은 기껏해야 왜구들만 상대해 보았을 뿐 무적함대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무적함대와 대적해 이길 수 있겠는가?”

이순신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 제독님! 아직도 잠을 안 자고 뭐 하는 것이오?”

그 순간 이항복이 늦은 밤 볼이 발그레해져 이순신의 방에 들어왔다.

“아. 병조참의께서 갑자기 무슨 일이오?”

조금 전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적고 있던 이순신이 이항복을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이항복은 보는 것만으로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 나도 오늘따라 도무지 잠이 안 오는구려! 이 제독님도 아마 잠이 못 드는 것 같아 술 한잔이나 같이하자고 왔소!”

“하하하. 마침 술이 고팠는데 잘되었습니다. 한잔하시지요.”

“이 제독님과 마음이 통했구려.”

술친구가 생긴 이항복이 밝게 웃으며 이순신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그런데 무엇을 그리 보고 있는 것이요?”

“흐음. 우리가 상대할 서반아의 해군이 엄청나게 강합니다. 무적함대로 불리며 적수가 없을 정도요.”

“그렇게 강하다는 것이요? 하지만 남만국도 해군력은 강하지 않소! 우리와 함께 연합하면 능히 해볼 만하지 않겠소?”

“흐음. 뭐 그러했으면 좋겠는데, 남만국 국왕이 원정을 떠났다가 주력군을 다 잃어서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 그것이 걱정이구려!”

“우리한테는 이순신 제독이 있지 않소. 서반아 놈들이 아무리 무적함대니 뭐니 해도 우리 이 제독의 상대는 안 될 것이오. 걱정하지 말고 술이나 한잔하시오.”

이항복이 히죽거리며 다시 술잔을 따라주자, 이순신도 오래간만에 그와 술을 함께 마시며 근심을 덜었다.

***

외회가 왕을 결정하지 못하자, 안토니우가 선수를 쳤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과 함께 그는 자신이 엔히크의 뒤를 이은 포르투갈의 새로운 국왕이라고 선포해버렸다.

귀족 대다수가 펠리페 2세를 지지하는 것을 안 안토니우는 의회를 통해서는 왕이 될 수 없다고 여기고 스스로 왕이라 선포해버린 것이다.

“폐하 안토니우와 그 지지세력이 스스로 왕이라 선포했다고 하옵니다.”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구나!”

포르투갈 의회에서 펠리페 2세를 포르투갈의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하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미구엘 1세의 사생아 안토니오가 스스로 새로운 왕이 되었다고 선포하자 펠리페 2세는 분노했다.

당연히 그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포르투갈을 합병하는 것은 물 건너갔다는 생각을 했다.

돈으로 매수된 귀족들이 그를 지지하고는 있지만, 의회의 결정을 언제까지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알바공작에게 군대를 보내라 명령을 내려라!”

펠리페 2세가 노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비서 마테오 바스케스에게 군대를 보내라 말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전쟁이 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알바 공작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안토니우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감히 스스로 국왕이라 칭하다니.”

말에 올라탄 알바 공작이 소집된 2만 3,000여 명의 대군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하옵니다. 안토니우는 우리 군을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의 참모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리스본을 향해 진격한다!”

“알겠습니다!”

바다호스에 대기하고 있던 2만 3,000여 명의 스페인 육군이 드디어 리스본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스페인 육군은 명성이 자자한 무적함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육군 또한 유럽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긴 행렬을 이루며 빠른 속도로 포르투갈 국경을 단숨에 돌파해 리스본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2만 3천여 명의 병력 중 절반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온 용병들이었지만, 군기는 그 어느 군대보다 강했다.

한편 펠리페 2세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육군뿐만 아니라 타호강변에 스페인이 자랑하는 무적함대를 배치해 포르투갈을 압박했다.

***

“스페인 놈들이 쳐들어온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해로를 차단하고, 2만 명이 넘는 육군이 기병대와 화포를 이끌고 리스본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제국의 수도 리스본은 큰 혼란에 빠졌다.

세바스티앙 1세가 포르투갈의 주력군을 이끌고 무모하게 모로코 원정을 떠났다가 대패하여 스페인의 대군에 맞서 리스본을 방어할 병력이 없다는 것을 리스본 시민들도 잘 알고 있기에 시민들은 극도의 공포에 떨며 피난을 위한 짐을 싸고 식량을 사재기했다.

반면 일부 시민들과 귀족들은 의용군이 되어 스페인 제국의 침략에 맞서기로 했다.

“결국, 스페인이 조국을 집어삼키러 오는군요!”

브라간사 공작이 부인 카탈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큰일이에요. 안토니우가 무모한 짓을 했어요. 왕이 되겠다고 선포한다고 왕이 되는 것이 아닌데…….”

브라간사 공작비 카탈리나는 무모하게 왕이 되겠다고 선포해 스페인 대군의 침략의 원인을 제공한 안토니우가 어리석었다고 여겼다.

그녀는 이런 사태를 염려에 안토니우에게 자제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안토니우는 막무가내였다.

“카탈리나 당신은 어서 루이사와 함께 떠나시오. 나는 이곳에 남아 스페인군과 대적하겠소!”

안토니우가 스페인군이 침략하는 빌미를 제공했으나, 어찌 되었건 스페인의 육군이 리스본을 향해 진격해 들어오기에 브라간사 공작은 안토니우와 함께 스페인군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저도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저만 살겠다고 도망칠 수는 없어요. 저도 이곳에 남겠어요.”

미구엘 1세의 손녀 카탈리나도 스페인 제국이 조국을 짓밟는 것을 마냥 바라볼 수만은 없다고 여겼다.

“아니 되오! 훗날을 위해 당신만이라도 피신을 떠나야 하오. 왕가의 후손이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야 왕조를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겠소.”

“리스본 시민들을 버릴 수 없어요. 저도 당신과 함께할 것이에요!”

브라간사 공작은 훗날을 위해 카탈리나에게 피난을 떠나라 간곡하게 부탁했으나 카탈리나의 남겠다는 의지는 확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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