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포루투갈의 운명 (1)
펠리페 2세는 주앙 3세의 여동생 이사벨의 아들인 동시에 세바스티앙 1세의 외삼촌이었기에 혈통으로 보면 당연히 포르투갈 왕위 계승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는 알바 공작의 말처럼 상당수의 포르투갈 귀족을 돈으로 매수했기에, 귀족으로 구성된 제국 의회가 그를 왕으로 추대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걸림돌은 뿌리 깊은 포르투갈 백성들의 반 스페인 정서였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카스티야와 스페인으로부터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해왔고 그 결과 자유와 독립을 누릴 수 있었기에 반 스페인 정서가 강했다.
게다가 펠리페 2세가 스페인 국왕이라 하나 신성로마제국의 후예로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게르만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기에 펠리페 2세에 대한 감정은 더욱 좋지 않았다.
스페인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한 포르투갈 시민들은 펠리페 2세에게 뇌물을 받아먹고 스페인과의 합병을 주장하는 귀족들에게 역겨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민중들이 스페인 제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 걱정이옵니다. 포르투갈 귀족 대부분이 매수된 것은 사실이나, 안토니우나 브라간사 공작은 여전히 합병에 반대하고 있어 이들이 민중을 선동해 반란을 획책할 수 있습니다.”
매디나 시도니아 공작이 포르투갈의 반 스페인 정서를 염려했다.
그러자 펠리페 2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도니아 공작의 말이 거슬렸으나, 그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그대의 말이 맞소! 하지만 포르투갈이 저항한다면 무력으로라도 왕위를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겠소. 어찌 포르투갈 제국을 사생아나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에게 넘겨줄 수 있겠소.”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 제국 의회가 자신을 포르투갈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포르투갈을 침공해 강제로 왕위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폐하! 올바른 생각이옵니다. 주력군이 무어족과의 전쟁에서 전멸했기에 우리 제국군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루이 고메스가 포르투갈을 무력침공하는 것에 대해 찬성했다.
“흐음. 의회가 왕위를 넘겨주지 않을 것을 대비해 군대를 소집해 주시오. 사령관은 알바 공작으로 하겠소!”
“폐하! 명령만 내려주시옵소서. 폐하를 반대하는 놈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버릴 것이옵니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를 혹독하게 통치하며 독립을 원하는 네덜란드 시민들을 탄압해 악명이 높았던 알바 공작을 포르투갈 침공을 지휘할 사령관으로 택했다.
그는 이미 70세가 넘은 고령이었으나, 펠리페 2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를 무척이나 신뢰했다.
알바 공작이라면 리스본까지 단숨에 진격해 허약한 포르투갈 군대를 단숨에 몰아내고 그에게 포르투갈을 바칠 것이라 여겼다.
펠리페 2세의 명령에 따라 스페인 제국은 포르투갈 침공을 준비할 군대를 소집했다.
순식간에 약 2만 3천여 명의 육군이 소집되어 포르투갈 국경 근처에 집결해 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유럽에서 적수가 없는 무적함대 150여 척도 집결해 포르투갈 침공을 준비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제국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전운이 감돌았다.
***
포르투갈 리스본
포르투갈 제국의 수도 리스본은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커다란 갈레온선이 오가며 신대륙과 아시아에서 가져온 진귀한 물자들을 실어 나르며 활력이 넘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제국의 시민들은 무척이나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바스티앙 1세의 뒤를 이어 보위를 넘겨받은 엔히크 추기경이 생사를 헤매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제국에 알려져 있었고, 엔히크가 죽으면 펠리페 2세가 대군을 이끌고 포르투갈을 침공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다.
“세바스티앙 국왕께서 살아 계시다고 하던데, 자네 그 소문 들었나?”
“흐음. 나도 들었네. 기적적으로 살아나셔서, 북아프리카에서 대군을 이끌고 다시 올 거라고 하시던데…….”
스페인 제국의 침략이 현실로 다가오자, 포르투갈 시민들 사이에서는 모로코에서 전사한 세바스티앙 1세가 사실 죽지 않았고, 곧 대군을 이끌고 리스본으로 돌아와 펠리페 2세와 맞서 싸울 것이라는 찌라시까지 돌고 있었다.
의지하고 기댈 곳이 없는 포르투갈 시민들은 황당한 가짜뉴스이지만, 가짜뉴스라도 믿고 싶었고 그 믿음은 그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어느새 세바스티앙 1세는 다시 살아난 예수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세바스티앙 1세라고 우기며 돈을 뜯어내는 사기꾼까지 생겨났다.
세바스티앙 1세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실패한 군주였지만, 대중적인 인기는 높았던 국왕이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죽은 왕 세바스티앙 1세는 살아있는 유령이 되어 포르투갈 시민들의 마지막 위안이 되고 있었다.
***
볼리비아 포토시
조선에서 온 연은분리법을 가진 기술자들은 곧바로 세계최대의 은광, 포토시에 있는 은광에서 채굴된 은광석에 연은 분리법을 사용해 은을 추출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제국은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세계최대의 은광을 발견했으나, 연은 분리법을 알지 못해 수은을 사용해 은을 추출했고, 수은 중독으로 많은 인디오들이 희생되었는데, 조선에서 온 기술자들이 수은을 사용하지 않고 은을 추출하자 이를 지켜본 스페인 관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기술이 있다니 정말 대단하오!”
그들은 인디오들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지만, 너무 많은 인디오들이 수은에 중독되어 죽어 나가기에 다소 부담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선의 기술자들이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방법으로 은을 추출하니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은광석 안에는 은과 납이 섞여 있어 온전한 은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납을 분리해내야만 했는데, 스페인 제국은 납을 분리하기 위해 수은을 사용했다.
그러나 수은은 치명적으로 수은 중독을 일으켜 수많은 인명이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이 개발한 연은 분리법은 납과 은이 서로 다른 물질이기에 녹는점이 다르다는 점에 착안하여, 납을 먼저 녹여 산화시켜 은광석에서 분리시켜 순수한 은만 추출하는 기술이기에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은 분리 기법이었다.
조선 기술자들의 노력 덕분에 은의 생산량은 기존 수은 아말감 기법에 비해 더욱 획기적으로 늘게 되었기에, 스페인 관리들은 무척 흡족해했고, 은광에서 생산된 은 중 조선의 지분에 해당하는 양은 조선으로 운반되었다.
연은 분리법을 가진 기술자들을 호위하기 위해 함께 온 응양군 갑사들은 은광 인근에 요새를 만들어 기술자들을 보호하고 있었고, 조선 기술자들은 요새 인근에 숙소를 지어 거주했다.
남아메리카 볼리비아에 코리아타운이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을 떠나온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구만!”
“그러게 말이여. 부모님은 잘 계신지 걱정이 되는구먼!”
일을 마치고 코리아타운에 돌아온 조선 기술자들이 삼삼오오 식당에 모여 숯불 위에 소고기를 구워 먹으며 막걸리를 한 사발씩 들이키며 고향을 그리워했다.
조선식 숯불구이는 포토시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고, 스페인 관리들이나 병사들도 조선식 숯불구이 맛을 보기 위해 코리아타운에 들렀다.
“그런데 말이여! 서반아 놈들이 인디오들을 너무 혹독하게 대하고 있는 거 아녀. 완전히 사람 취급을 안 하던디 말여!”
“그러게. 완전히 동물 취급을 하던디. 매일 죽어 나가는 인디오들이 엄청 많더구만. 불쌍하더라고!”
“그려! 정말 안 되었어. 서반아 놈들이 정말 못되었어. 듣자 하니 서반아 놈들 때문에 인디오들이 엄청나게 죽었다더라고!”
“우리라도 잘 대해주더라고!”
“그려! 그려!”
조선인 기술자들은 은광에서 혹사를 당하는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 음식이나 필요한 물품을 지원해주었고, 원주민들도 조선인들의 지원을 고마워했다.
***
기력을 잃은 노쇠한 노인이 침대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고, 그 주위에 여러 명의 사람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흐음. 제……. 국의 운명이 걱……. 정이로구나!”
그는 포르투갈 국왕 엔히크였다.
세바스티앙 1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해 팔자에 없는 왕이 된 그는 자신의 운명이 다되어 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죽으면 펠리페 2세가 고국을 가로채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조……. 조선의 원군은 아……. 직 도착하지 않았느냐?”
“아직 도착하지 않았사옵니다. 폐하!”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조선이 약속한 원군을 보냈는지 물었으나, 그가 애타게 기다리는 조선의 원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허허……. 세계를 호령하던 제국이 어찌……. 이리된 것인지…….”
엔히크는 한때 전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바다를 개척해 해양 제국을 건설한 포르투갈이었지만, 사실 그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고, 균열의 조짐은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국내 산업 기반이 취약한 포르투갈은 동방 무역항로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취했지만, 아시아 교역에 필요한 물품을 자체 생산하지 못해 네덜란드나 북유럽 국가들로부터 사들여야 했기에, 무역을 통한 수입의 많은 부분이 네덜란드나 잉글랜드로 빠져나갔고, 귀족, 왕족 등 상류층의 사치는 더 많은 국고를 해외로 빠져나가게 했다.
더욱이 제국의 규모가 커지면서 귀족과 관료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어 왕실의 예산도 덩달아 늘어나게 되었는데, 제국의 전성기에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주앙 3세 때부터는 왕실의 지출이 수입을 넘어서며 국가 재정이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수입 농산물로 인해 자영농들이 몰락하고, 이들이 선원, 군인, 상인이 되어 아시아 제국으로 떠나면서 포르투갈 본토의 인구가 감소하며 본토의 활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었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하며 제국은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는데, 제국을 파멸의 길로 이끈 결정적 인물은 무모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던 세바스티앙 1세였다.
십자군 전사의 영웅담에 빠져 이교도를 몰아내야 한다는 망상에 빠져 있던 그는 결혼조차 미루고 후사를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정복 전쟁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세바스티앙은 주앙 3세의 유일한 적손이었다.
그를 제외하고는 가문의 남은 남자라고는 엔히크가 유일했기에 아비스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바스타앙은 무엇보다도 그의 뒤를 이을 왕자를 생산해야만 했다.
만약 그가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면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을 노리리라는 것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는 후사를 만들 생각도 하지 않고 느닷없이 모로코로 떠나 이교도를 몰아내겠다며 대규모 원정군을 꾸렸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은 모로코 원정을 떠날 상황이 아니었다.
국고는 텅텅 비었고 제국이 자랑하는 경험 많은 장군들과 베테랑 전사들은 모두 인도나 아시아에 있었다.
그럼에도 망상에 사로잡혀 있던 세바스티앙 1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원정자금을 마련하고 용병을 고용해 전장을 지휘할 유능한 장군조차 없이 원정군을 급조해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원정군은 대부분 어린 신병이나 충성심이 없는 용병이었고, 장교들 역시 전쟁 경험이 없는 그의 망상을 추종하는 어린 귀족들이었다.
반면 모로코의 무어족 전사들은 전쟁 경험이 풍부했고, 충성도도 높았기에 모로코를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그의 군대는 용맹한 무어족 전사들에 의해 전멸을 당하고, 그의 죽음으로 아비스 왕조는 대가 끊길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흐음. 왕조의 운명이 이……. 렇게 끝나는 것…….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