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해외파병 (1)
“또 도성에 오게 되었구나! 도대체 무슨 일이실까?”
남해함대에서 거북선 제조와 훈련에 여념이 없던 이순신은 갑자기 왕께서 자신을 부른다 하여 도성에 올라오긴 했지만, 왕께서 자신을 급하게 부르는 연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만 했다.
‘궁에 들어가기 전에 커피라도 한잔해야겠다.’
커피 예찬론자 된 이순신은 정신도 차릴 겸 왕을 만나러 가기 전에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이곳이 도성에서 핫하다는 커피하우스란 말이지?”
이순신은 육조거리 앞에 유럽풍의 벽돌집으로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고급지게 꾸며져 있었고, 얼핏 보아도 꽤 비싸 보이는 비단옷을 입은 자들이 갓 내려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선이 새로운 수출품으로 밀고 있는 홍차도 제법 유행하고 있었지만, 도성은 아라비아 등에서 들여온 커피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제법 많은 커피하우스가 들어서 새로운 사교의 장이 되고 있었다.
“신립 장군이 북방에서 아주 맹활약을 하고 있다면서!”
“그러게 말이야. 야인들이 신립 장군만 보면 겁에 질려 도주하기 바쁘다는구만!”
“신립 장군의 인기는 참 대단하구나!”
북방에서 야인들을 토벌하느라 여념이 없는 신립의 인기는 대단했다.
커피하우스에서도 온통 신립에 관한 얘기뿐이었다.
신립의 무용담은 널리 퍼져 나가, 신립이 홀로 말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달려 야인의 수급 수백 개를 단칼에 베이어버렸다는 과장이 보태어진 무용담이 조선 팔도에 퍼져나갔고, 어린 사내아이들은 갑주를 입은 늠름한 신립 장군의 인형을 가지거나 자신들이 신립이라도 된 양 산에 올라가 병정놀이를 했다.
신립은 조선에서 이미 전쟁영웅이 되어 있었다.
같은 무장 출신인 이순신은 전쟁영웅이 되어 버린 신립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럽기도 하고, 또 뿌듯하기도 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한편 자신도 북방에 계속 있었으면, 신립 못지않게 야인들을 물리치며 만주벌판을 달릴 수 있었을 것인데, 자신을 해군에 배속시킨 왕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다.
“어이! 이게 누구요. 이거 이번에 승차하셨던 이 장군님 아니오!”
뒤에서 누군가가 커피를 음미하고 있는 이순신의 등짝을 세게 내리쳤고, 이순신은 느닷없는 등짝 스매싱이 불쾌한 듯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당신은 필운이 아니오!”
“하하하. 그렇소이다. 야 이렇게 이 장군님을 이곳에서 보니 반갑구려.”
유럽 사절단을 함께 다녀온 이항복이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순신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그의 등짝을 내리친 것이다.
이항복은 히죽히죽 웃으며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이리 군복을 입으니 정말 멋지구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오. 이 장군도 이곳에 이쁘장한 젊은 처자들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구려!”
이항복이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저자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진중한 성격의 이순신은 호들갑스러운 이항복이 재미있으면서도 어색하기도 했다.
그는 이항복처럼 나불대는 성격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이항복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타고난 머리가 있고 또 가볍기는 하나 마음먹은 일은 하고야 마는 추진력이 마음에 들어 포르투갈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서로 서신을 교환하며 친분을 쌓고 있었다.
“아니. 뭐 그것이 아니라! 전하께서 급히 찾으신다고 해서!”
“아. 그래서 올라오셨구나! 하하하. 이 장군님하고 저하고 또 남만국에 가게 생겼소.”
이항복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항복이 포르투갈에 다시 가게 생겼다고 말하자, 이순신이 깜짝 놀라 이항복을 바라보았다.
“하하하! 이게 전혀 모르시고 올라오셨구만! 남만국 왕이 원정 중에 전사를 했다지 않소!”
“그거야!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소만.”
이순신도 포르투갈 왕이 모로코 원정을 떠났다가 전사했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남만국 왕이 후사가 없다지 않소. 그래서 뭐 서반아가 남만국을 집어삼키려 한다. 그 말이오.”
이항복이 달달한 설탕을 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빙그레 웃었다.
“그럼 전하께서 남만국에 원군을 보내시겠다는 거요?”
“그렇소이다. 이 장군님을 원군 사령관으로 내정하셨다 이겁니다.”
“사령관?”
이순신은 정신이 없는지 커피잔을 들어 벌컥 마셨다.
남해함대에 배속된 지 얼마 되지 않는데, 갑자기 또다시 남만국에 가라니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남만군 원병의 사령관이 되라니…….
“이 장군. 우리 또 고생하게 생겼소. 그리고 서반아와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듣자 하니 서반아의 군대를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던데……. 참으로 걱정이구려!”
이항복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순신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필운께서는 남만국에 처자가 있지 않소. 오래간만에 처자를 볼 수 있으니 참으로 기쁘겠소!”
“아……. 뭐 그거야 그렇소만!”
이항복이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
스페인 은광을 향해 태평양을 가로지르기로 한 조선의 함대가 거대한 풍랑을 만나 휘청거렸다.
“키를 단단히 잡아라! 돛을 모두 거두어라!”
집채만 한 파도가 갈레온선의 갑판을 덮쳤고 선원들은 필사적으로 바다에 저항했으나, 갈레온선은 노여운 바다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장난감처럼 휘청거렸다.
“함장님! 더는 배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사옵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
갈레온선 선단의 각 함장들은 동요하는 선원들을 안심시키며 배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사실 그들도 밀려오는 두려움을 억누를 방법이 없었다.
거친 파도에 선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이 무기력하게 느껴졌고, 선실에서는 연은분리법 기술을 가진 기술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천주교를 믿는 일부 신자들은 성호를 그리며 그들이 믿는 신께 노여움을 거두어 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렸으나, 바다는 잔잔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신이시여 우리를 버리는 것입니까!”
무엇이 노여운지 바다의 신은 조선의 갈레온 선단을 집어삼키려는 듯 연신 거친 파도를 몰아쳤다.
“이제 끝장이로구나!”
선단을 책임지고 있는 이시언을 비롯한 선원들은 파도가 더욱 거칠어지자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운명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거짓말처럼 거칠기만 했던 바다가 고요해졌다.
“와아아아!”
“살았다!”
기적이 일어나자 선원들을 비롯한 배에 탑승한 모든 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함장님! 기적입니다!”
“흐음. 함대의 피해가 어떻게 되는가?”
죽다 살아난 이시언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함선 한 척이 보이지 않습니다.”
피해 상황을 살피던 부관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이라! 어느 함선이 사라졌다는 것이냐!”
함선 한 척이 사라졌다고 하자 이시언도 당혹스러웠다.
“장보고함이 보이질 않습니다.”
“흐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거친 풍랑에 함선 여러 척이 소실될 수도 있다 여겼으나, 막상 함선 한 척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으니, 이시언은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함장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흐음. 아마도 풍랑을 견디지 못한 것 같구나. 배를 찾기에는 너무 지체되니 항로를 따라갈 수밖에.”
이시언은 보이지 않는 함선이 거센 풍랑을 이기지 못하고 침몰했을 것이라 여겼다.
거센 풍랑과 새로운 항로의 개척으로 이미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기에, 사정은 딱하지만 사라진 함선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신대륙으로 향하기로 했다.
***
“함장님! 선단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제기랄!”
매섭게 몰아치는 풍랑을 이겨내기는 했지만, 신대륙으로 향하는 선단의 무리에서 함선이 이탈하자, 장보고함의 함장 박진우 중좌는 망연자실했다.
“선단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풍랑으로 저희 선단에서 이탈한 것 같습니다.”
“흐음. 큰일이로구나!”
박진우 중좌는 망원경을 이리저리 돌리며 선단을 찾아보았지만, 선단은 도무지 보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선단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분명하구나!’
박진우 중좌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풍랑으로 장보고함은 제법 손상을 입었기에, 이미 멀어진 선단을 따라가는 것은 무리였다.
“함장님! 배를 수리해야 할 것인데.......”
선단을 따라가기는커녕 배를 수리하기 위해 섬이라도 찾아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망망대해의 바다만 보일 뿐 자그마한 섬도 보이지 않았다.
돛대가 상당수 손상을 입었기에, 배를 수리할 섬을 찾지 못하면 배는 망망대해를 떠도는 유령선이 되고 말 것이다.
선단을 따라 신대륙으로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살기 위해서는 섬이나 육지를 찾아야만 했다.
“가까운 섬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장보고함은 필사적으로 섬을 찾기 위해 바다를 살폈으나 그들이 찾고자 하는 육지는 보이지 않았고 어느덧 2주일의 시간이 흘러갔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그들이 원하는 섬이 보이지 않자 선원들은 지쳐갔다.
돛대도 손상을 입어 바람을 타기도 어려운데, 때마침 바람까지 불지 않아 배는 제대로 이동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대로 섬을 찾지 못한다면 선원들은 말라 죽을 것이고, 장보고함은 유령선이 되어 바다를 떠돌 것이다.
“아이고 조선 땅은 다시는 못 가보겠구나!”
일부 선원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고 훌쩍거렸다.
“아직 희망을 버리지 말거라!”
함장 박진우는 절망에 빠진 선원들을 다독였으나, 그 또한 인간인지라 더는 버티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섬……. 섬이다!”
“육……. 육지가 보인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가 육지를 발견했다며 크게 외쳤고,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던 선원들인 일제히 갑판으로 나와 바다를 바라보았다.
“함장님! 섬……. 섬입니다!”
헛것을 본 것이 아니었다.
정말 푸른 숲이 우거진 육지가 보였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려는 순간 육지가 발견되자 선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흐음. 이제 살았구나!”
함장 박진우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도 살아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고 있었는데, 섬이 발견되었으니 이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흐음. 배를 가능한 섬 가까이 이동시키도록!”
“알겠습니다. 함장님!”
장보고함은 가능한 섬 근처까지 이동한 후 그곳에 닻을 내렸다.
“흐음. 원주민들이 있을지 모르니, 갑사들이 먼저 섬에 상륙한다!”
“알겠습니다!”
박진우 중좌는 섬에 사나운 원주민의 공격이 있을 수 있다 여기고, 우선 조선 최고의 전사 응양군 소속 갑사 20여 명을 먼저 상륙시키기로 결정했다.
응양군 소속 갑사들은 조총, 활, 환도 등으로 무장하고 장보고함에서 내려 작은 보트를 타고 섬으로 향했다.
이윽고 응양군 갑사들을 태운 보트는 섬에 상륙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하얀 백사장이 펼쳐지고 곳곳에 야자수 나무가 있는 섬은 마치 천국의 모습과 같이 아름다웠고, 응양군 갑사들은 이국적인 섬의 모습에 매료되어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경계를 늦추지 말거라!”
갑사들을 지휘하는 이용철 대위가 섬의 아름다운 모습에 홀려 갑사들이 경계를 소홀히 하자 주의를 주었고, 그제야 응양군 소속 갑사들은 대오를 이루며 섬 곳곳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그들이 상륙한 인근에는 원주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갑사들은 곧 진을 구축한 후, 갑사 5명을 보트에 다시 태워 장보고함으로 보냈다.
“함장님! 상륙해도 좋겠습니다!”
“흐음. 상륙한다!”
갑사들이 상륙해도 좋겠다고 하자, 망원경으로 섬 곳곳을 살피고 있던 박진우 중좌는 명을 내렸고, 장보고함에 타고 있던 선원들과 기술자 그리고 나머지 갑사들이 섬에 상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