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아타이와의 일전 (1)
“야인들이 숫자는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
“약 5,000여 명이라 하옵니다!”
“어느 부족이라 하던가?
“해주여진의 예허부라 하옵니다.”
“예허부라! 전력이 만만치 않겠구나!”
예허부는 해주여진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으로, 하다부와 함께 해주여진의 패권을 두고 다투어온 강력한 부족이었다.
“야인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구나! 이제 야인여진의 부족민은 우리의 백성들과 같다! 우리의 백성들을 침략하는 야인을 용서해서는 아니 되니, 즉시 5군단을 출병시켜 야인들을 토벌하도록!”
“장군. 방금 도착한 8군단, 9군단 병력도 있사옵니다. 이들도 함께 출병해 강력한 화력으로 야인들을 일거에 섬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연대장 이종원이 말했다.
“흐음. 그대의 생각도 일리가 있네. 그럼 8군단이 함께 출병하고 9군단은 만일을 위해 예비 병력으로 남겨두도록 하겠네!”
“존명!”
***
조선군의 영향력 아래 있는 야인여진 마을을 급습한 해서여진족 5천여 명은 야인여진 마을을 불태우고 노략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약 일천여 기의 기병이 빠른 속도로 달리며 저항하는 야인여진 전사들을 도륙했고, 보병들은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녀자를 겁탈하고, 식량과 물건을 약탈했다.
“어서 빨리 식량을 옮겨 싣도록 해라!”
해서여진에게 수렵이나 하며 살아가는 야인여진은 미개한 종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솔직히 야인여진을 여진인이라 여기지 않으며, 식량이 부족하거나 물품이 부족할 때 수시로 야인여진 마을을 습격해 노략질을 자행했다.
그들에게 야인여진 마을은 식량 등이 부족할 때마다 찾아오는 보급창고나 마찬가지였다.
해서여진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갑주를 입고 말 위에 올라타 부하 군졸들을 지휘했다.
예허부 군졸들을 지휘하고 있는 이는 분노의 눈빛이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전장을 겪었는지 얼굴을 비롯한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고, 웅장한 기골에 북방의 마초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건주여진 부족장 출신은 왕고의 아들 아타이였다.
그의 아버지 왕오는 건주위의 최고 실력자로 건주여진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부족장이었다.
그는 명의 지배정책에 반기를 들고 1574년 용맹스러운 부족의 병력을 이끌고 영의 랴오냥과 선양을 공격하는 패기를 보였으나, 요동총관 이성량의 6만여 명의 대군 앞에 속절없이 패배하고 간신이 목숨을 보전해서 여진의 하다부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왕고를 숨겨 주었다가는 자신들의 처지도 위태롭다고 생각한 하다부는 왕고를 포박해 명군에 넘겼고 왕고는 북경으로 압송돼 대역죄인으로 능지처참당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타이는 간신히 목숨을 보전해 해서여진에서 살아남아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그의 사내다움과 지도력에 많은 무리의 야인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고, 그는 어느새 해서여진에서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그는 아버지를 팔아넘긴 하다부에 대한 복수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가진 부족민만으로는 해서여진의 강력한 부족 하다부를 공격할 수 없기에, 하다부와 세력다툼을 벌이며 대립하고 있는 예허부를 끌어들여 하다부를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흉년이 들어 군량미가 부족해져 하다부를 바로 치러 갈 수 없자, 야인여진 마을을 급습해 군량미를 충당한 후 거사를 도모하기로 한 것이다.
“군량미는 넉넉히 챙겼느냐?”
“추장! 흉년이 들어 그런지 이곳도 군량미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들이 급습한 야인여진 마을은 생각과 달리 그들이 원하는 양만큼의 군량미나 식량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라!”
아타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군량미를 충분히 확보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 시간이 이리 지체되면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것이 요원해질 가능성이 있다.
“안 되겠다. 좀 더 내륙으로 들어가야겠다!”
“추장. 야인여진족 부락에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선군과 교전할 가능성이 크옵니다. 내륙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들도 조선군이 야인여진 마을을 점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타이의 부장은 자칫 조선군을 만날까 봐 염려하고 있었다.
특히 야인여진의 니탕개가 조선군에게 처참하게 무너져 비명횡사한 것이 이미 야인들 사이에 소문이 나 있었기에, 야인들은 조선군을 경계하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 기병을 이용해 빠르게 마을을 급습하고 빠지면 되느니라!”
“추장! 그래도 위험하옵니다. 조선군의 신립이라는 자가 기병을 아주 귀신처럼 다룬다 합니다. 그들의 기병이 추격해오면 큰 사달이 벌어질 수 있사옵니다.”
이미 야인들 사이에서 신립은 귀신과 같은 두려운 존재였다.
말을 달려 야인여진 추장 니탕개의 수급을 단칼에 베어 버린 신립의 무용담은 이미 전설처럼 여진족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이놈이 어디서. 당장 명령을 따르라!”
그러나 오로지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만이 가득한 아타이는 부장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의 기병 5,000기는 노략질하던 마을을 벗어나 길림성 쪽을 향해갔다.
***
야인여진을 급습한 아타이가 기병을 이끌고 길림성을 향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신립의 5군단, 8군단 병력 약 2만 명 중 기병 약 4천 기가 빠른 속도로 길림성을 향해 달려갔다.
한편 길림성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간 아타이의 기병들은 어느새 또 다른 야인여진 마을을 불 지르며 노략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조리 불태워라! 군량미를 확보해라!”
그들은 불화살을 쏘며 야인여진들 마을을 불태웠고, 아녀자와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며 살육을 즐겼다.
평화롭던 마을은 순식간에 지옥이 되어 비명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조……. 조선군이다!”
야인여진 마을을 신나게 약탈하던 아타이의 병졸들은 갑자기 조선군 기병 수천 기가 나타나자 기겁을 했다.
신립의 조선군 기병 약 2,000기는 야인여진 마을에 들이닥쳐 노략질에 여념이 없는 아타이의 기병들을 둘러싸고 빙빙 돌며 일제히 활을 쏘았고, 활은 정확히 아타이 기병들의 급소를 명중시켜, 기병들이 하나둘 그대로 말에서 고꾸라졌고, 주인을 잃은 말은 울음소리를 내며 마을을 떠돌았다.
조선군이 갑자기 나타나 기습공격을 가해오자, 아타이의 수하들은 큰 혼란에 빠져 제대로 진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조선군이 쏘는 화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추장! 조선군의 급습입니다!”
“조선군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 당황하지 말고 적들을 섬멸하거라!”
조선군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지 않자 아타이는 칼을 빼 들고 수하들을 독려했다.
조선군의 기습공격에 잠시 당황한 야인들의 병졸들은 아타이가 칼을 빼 들고 전투태세에 임할 것을 독려하자 전열을 가다듬고 조선군에 맞대응했다.
야인들의 궁기병들은 말을 달려 조선군과 마찬가지로 조선군을 빙빙 돌며 활을 쏘았고, 창을 든 기병들 수천 기는 일제히 대형을 펼치고 망설임 없이 조선군을 향해 돌진했다.
확실히 니탕개의 병졸보다는 훈련이 잘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니탕개의 병졸들은 숫자만 많았을 뿐 진을 펼치는 방법을 숙지하지도 못하고 병장기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오합지졸이었으나, 아타이의 병졸들은 단단한 갑주로 무장하고 병장기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조선 정예기병을 맞이해 제법 잘 싸우고 있었다.
야인 병졸들의 저항이 거세자 조선 기병들도 제법 사상자가 발생했고 격렬한 전투 끝에 야인들에 비해 병력수가 적은 조선군이 다소 밀리는 양상을 보였다.
“적군의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부관이 조선군 기병 연대장에게 보고하자 먼발치에서 망원경을 통해 조선군이 다소 고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기병 연대장 박수철 대좌가 부관을 향해 고갯짓을 했고, 곧 깊고 웅장한 대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각 소리가 들려오자 야인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조선 기병 수천 기는 일제히 말을 돌려 퇴각했다.
“와아아아아.”
“조선놈들이 도망간다!”
격전을 벌이던 조선군이 퇴각하자 야인들은 대승이라도 거둔 듯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니탕개의 수만 병력을 일거에 토벌한 조선 기병의 출현에 겁을 잔뜩 먹었었는데, 막상 대적을 해보니 조선 기병도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만도 했다.
“추장! 조선놈들이 도주하고 있습니다!”
부장이 흥분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하! 조선놈들도 별것 아니구나! 저놈들을 추격해 모두 도륙하거라!”
“존명!”
조선군이 자랑하는 기병이 아타이의 기병에 밀려 도주하자 아타이는 기고만장해 조선군을 추격하라 명했다.
아타이의 명이 떨어지자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그의 정예기병 오천 기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도주하는 조선기병연대를 맹추적했다.
“장군 적장이 올가미에 걸려들었습니다.”
부관이 밝게 웃으며 신립을 바라보았다.
신립은 갑옷을 입고 그가 아끼는 백마에 올라 망원경으로 수천 기의 아타이 기병들이 달려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둔한 자로구나!”
아타이의 수하들을 급습한 조선 기병연대는 그들을 끌어내기 위한 유인책이었다.
신립의 북방군단은 협곡 사이에 먹잇감을 기다리는 야수와 같이 진을 펼쳐 놓고 아타이 기병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 추장 함……. 함정이옵니다!”
기세등등하게 조선군을 추격하던 아타이의 기병들은 수만 명의 조선군이 진을 펼쳐 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자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이……. 런!
아타이도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조선 기병이 도주하자 그들이 별것 아니라고 여기고 앞뒤 재보지도 않고 그들을 추격한 그의 패착이었다.
“방포하라!”
그러나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아타이 기병들이 홍이포의 사거리 안에 들어오자 신립은 주저 없이 사격 명령을 내렸고 곧 긴 대각 소리와 함께 수백 문의 홍이포가 일제히 불을 품었다.
“살……. 살려줘!”
“으악!”
홍이포에서 발사된 커다란 철환은 아타이 기병을 향해 날아가 기병의 머리를 바로 직격하거나 빠른 속도로 굴러가 군마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다리가 두 동강이 난 군마는 그대로 고꾸라져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를 내었고 말 위에서 굴러떨어진 야인 기병은 목뼈가 부러져 신음 한 번 내보지 못하고 주검이 되어버렸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홍이포의 무시무시한 위력 앞에 아타이의 정예기병은 전열에서 이탈해 우왕좌왕하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추장!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입니다. 어서 퇴각을 명하소서!”
아타이의 휘하 부장이 공포가 가득한 목소리로 아타이를 향해 퇴각을 재촉했다.
조선군 화포의 위력이 강력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으나 막상 실전에서 경험해보니 그 위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퇴. 퇴각하라!”
겁에 질린 아타이는 말을 더듬으며 퇴각 명령을 내렸고 명령이 떨어지자 야인 기병들은 말머리를 돌려 전열이나 진법은 생각지도 못하고 서로 살겠다고 도주하기 바빴다.
“장군. 야인 놈들이 도주하고 있습니다. 승기를 잡았습니다.”
“싱겁구나!”
야인들이 제대로 된 전투도 안 해보고 홍이포의 위력 앞에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기 바쁘자 신립은 계책이 통한 것이 뿌듯하면서도 다른 한편 제대로 된 전투를 하지도 못하고 일방적인 승리가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야인 놈들이 도주하게 놔줄 수는 없지”
신립이 진중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병졸이 커다란 깃발을 펄럭이며 신호를 보냈다.
깃발이 펄럭이자 매복하고 있던 기병연대 소속 기병 수천 기가 갑자기 나타나 야인들의 퇴로를 가로막았다.
“추……. 추장 매복입니다!”
“무엇이라.”
조선군 기병 수천 기가 느닷없이 나타나 도주하기에 여념이 없는 아타이 기병들의 퇴로를 가로막자 그들은 사색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