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포르투갈 국왕의 전사
“그것이 사실인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방금 강화도에 도착한 남만국 상단에게서 들은 말이옵니다.”
‘결국, 세바스티앙 1세가 무리한 원정을 감행하다 변을 당했구나.’
어릴 적부터 모험심과 야망이 가득했던 그는 특히 사악한 이교도들과 항전한 십자군을 동경했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고, 큰아버지뻘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룬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이니 그는 당연히 그들보다 더 큰 제국을 이루겠다는 야망을 품었을지 모른다.
포르투갈은 모로코 해안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해 모로코 내정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당시 모로코의 술탄이었던 모울라이가 작은아버지 압델말레크에 의해 쫓겨나자 술탄은 포르투갈에 구원을 요청했다.
술탄의 구원요청을 받은 세바스티앙 1세는 십자군의 영광을 꿈꾸며 함선 50척과 1만 7천여 명의 대규모 원정군을 꾸려 기세등등하게 모로코로 떠났다.
그러나 그는 용맹하기는 하였으나, 무모했다.
본래는 함대의 지원을 받아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기로 하였는데, 그는 즉흥적으로 모로코 수도로 바로 진격할 것을 명했고, 그들을 압도하는 6만여 명의 모로코군에 둘러싸이게 된다.
세바스티앙 1세는 엄청난 숫자의 모로코군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설 속의 기사처럼 수천 기의 기마 부대를 이끌고 십자가가 새겨진 커다란 깃발을 펄럭이며 앞장서 모로코군을 향해 돌격했으나, 그의 기마대는 압도적인 숫자의 모로코군에 처참히 무너져 내렸고, 그 또한 장렬히 전사했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도전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포르투갈군 약 8,000여 명이 전사했고, 살아남은 군은 대부분 포로가 되었으며, 함대로 살아 돌아간 포르투갈군은 수십 명에 불과했으며, 왕의 시신은 찾지도 못했다.
“어디에서 전사를 했다는 말이오?”
이균은 이미 그가 몸소 군대를 이끌고 모로코 원정을 나갔다가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척하며 물었다.
“이교도들과 전쟁을 하다 전사하였다 하옵니다. 왕의 시신조차 찾을 길이 없다 하옵니다.”
도승지 류성룡이 말했다.
“왕의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니, 남만국 백성들이 시름이 크겠구려!”
“그러하옵니다. 전하! 게다가 남만국 왕은 후사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누가 왕이 될지 걱정이옵니다.”
병조판서 율곡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세바스티앙 1세는 후사가 없었다.
“흐음. 그대의 말이 맞소! 후사가 없이 그렇게 전사했으니, 걱정이구려. 지금으로서는 숙부인 엔히크 추기경이 보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소.”
“그러하옵니다. 전하! 엔히크 추기경은 오랫동안 어린 남만국 국왕을 섭정해 정치에도 밝습니다. 게다가 왕위 승계 서열도 현재로서는 1순위라 할 수 있으니, 추기경이 보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도승지 류성룡이 말했다.
“흐음. 하지만 엔히크 추기경도 고령이고, 사제이기 때문에 후손이 없는데……. 그의 사후가 문제겠군요.”
당장은 섭정 경험도 있고 왕위 계승서열이 높은 엔히크 추기경이 보위를 이어받겠지만, 엔히크 추기경도 후사가 없기에 그의 사후가 문제였다.
“서반아의 국왕이 분명 남만국에 대해 자신의 지분을 주장할 것이요.”
홍차를 마시던 이균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졌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류성룡과 율곡이 이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균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제국의 주인이 없으니, 그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많지 않겠습니까!”
이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금알을 낳는 동방 무역로를 확보하고 신대륙뿐만 아니라 구대륙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해 대제국을 이룩한 포르투갈의 후계자 자리가 비었으니, 분명 그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스페인 제국의 펠리페 2세는 따지고 보면 전사한 세바스티앙 1세의 큰아버지뻘이라 할 수 있으니, 당연히 지분을 주장하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 포르투갈을 집어삼키려 할 것이다.
“그럼. 서반아가 남만국을 집어삼키려 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율곡이 이균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당장 알아차렸다.
“그렇소. 서반아 국왕이 따지고 보면 남만국 국왕의 큰아버지뻘이 아니요. 당연히 욕심이 많은 서반아 국왕도 남만국의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요.”
“전하! 그럼 남만국을 도와야 하겠습니까? 남만국 덕분에 조선이 교역을 할 수 있게 된 것인데……. 서반아가 남만국을 차지하면 교역길이 막힐 수도 있지 않습니까?”
도승지 류성룡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류성룡의 말처럼 조선은 포르투갈의 동방 무역로를 이용해 유럽과 교역을 하고 있었기에, 동방 무역로가 조선의 생명줄과 같은 것이었다.
동방 무역로가 막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이제 부상하고 있는 조선 경제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전하. 그러하오나 우리는 서반아에 꽤 큰 차관을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칫 남만국을 도왔다가 차관을 돌려받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율곡은 포르투갈을 도왔다가, 스페인에 빌려준 차관을 돌려받지 못할까 그것을 염려했다.
“흐음. 남만국은 우리 조선과 각별한 사이요. 남만국의 동방 항로는 우리 조선의 생명줄과 같은 것이오. 차관을 돌려받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남만국은 이항복 장인의 나라가 아니요. 남만국과 우리 조선은 혼인동맹으로 연결된 나라다 이 말이오. 하하하. 동맹국이 어려움에 부닥쳤으면 마땅히 도와야겠지요.”
포르투갈의 동방 항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조선의 생명줄이다.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먹힌다면 그 항로를 이용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게다가 조선은 포르투갈 덕분에 유럽과 교역의 길이 텄으니, 포르투갈과의 인연이 각별하다고 할 수 있기에, 이균은 과감히 포르투갈을 돕기로 했다.
“우선은 남만국에 사자를 보내 남만국이 우리의 도움을 받을 의사가 있는지 확인해야겠소. 지금 즉시 정후청 요원을 사자로 보내 남만국의 의사를 확인하도록 하시오!”
“알겠나이다. 전하!”
바닷길을 이용해 사자를 보내게 되면 그 시일이 너무 오래 걸리기에 이균은 이미 아시아와 유럽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곳곳에 거미줄처럼 잠입해 있는 정후청 정보요원들을 사자로 이용하기로 했다.
왕의 밀서를 들고 도성을 출발한 정후청 요원은 빠르게 말을 달려 북방으로 향했고 북방에서 다른 요원이 밀서를 전달받아 실크로드를 따라 마치 몽골제국의 역참제처럼 실크로드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정후청 요원에 왕의 밀서를 전달했고, 포르투갈 제국의 수도 리스본이 점차 가까워졌다.
***
부산포
“자 어서 물건을 싣도록 하게!”
일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판옥선에 도자기와 인삼을 싣고 있었다.
왜는 여전히 막사발에 대한 수요가 많았으나, 인삼의 효능이 왜에 널리 퍼져 최근에 인삼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로 인해 인삼 수출상이 늘게 되었는데, 그중 고려인삼이 가장 큰 인삼 수출 상단이었다.
고려인삼이라는 상단을 만든 이는 김태수라는 자로, 본래 그는 왜관에서 왜인 상인들과 조선 상인들을 통역해주던 통역관 출신이었는데, 왜인들이 부쩍 인삼을 요구하는 것을 알고 인삼을 거래하면 큰 돈벌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작정 인삼을 유통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보따리상 정도였으나, 왜의 인삼에 대한 수요가 점차 커지자 상단의 규모를 늘려 어느덧 상선 20여 척을 소유한 거상이 되었다.
상단의 규모를 키운 김태수는 이제 인삼뿐만 아니라, 막사발, 생사 등을 유통하며 종합 유통회사로 성장했다.
“어르신! 물건을 이제 다 실은 것 같사옵니다.”
행수가 왜에 가져갈 물건을 잘 실었다며 김태수에게 보고했다.
“그러한가! 고생이 많았구만. 그래! 인삼은 넉넉히 실은 겐가!”
“그러하옵니다. 왜인들이 주문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실었습니다.”
“흐음. 그래 잘했네. 왜놈들 관리들이 인삼을 달라고 아우성이니 관리 차원에서 좀 주어야 할 필요가 있네. 막사발은?”
“막사발도 넉넉합니다요.”
“그래. 자 이제 떠나보세.”
물건을 모두 선적하자 아무 사고 없이 상단이 왜에 다녀올 수 있기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 후 물건을 가득 실은 10여 척의 상선이 부산포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향했다.
***
“아이고 장군님은 왜 이렇게 훈련을 빡시게 시키는 것인가! 힘들어 죽겠구만!”
구보를 마친 병졸들이 웃통을 벗고 땀을 뻘뻘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게 말일세! 새로 오신 장군님이 너무 엄하게 훈련을 시키는 것 아닌가. 후방이라고 해서 좋아했는데, 이거야 원 전방보다 훈련을 더 시키니.”
병졸이 맞장구를 치며 시원한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전쟁 날 일도 없는데 왜 이렇게 연신 훈련만 시키는지 미치겠구만! 오후에는 또 전술 훈련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이번에 새로 오신 장군님은 아주 훈련에 미친 분인가 보구만!”
병졸들은 연일 계속되는 강도 높은 훈련에 심신이 지쳐 보였다.
신교대 훈련을 마치고 처음 남해함대에 배속되었을 때만 해도 전쟁 날 일이 없는 최후방에 배치되었다며 환호했던 이들은 계속되는 강훈련에 차라리 북방으로 보내 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북방에서 지금 전쟁이 났다고 하던데, 우리를 북방으로 보내려고 이러는 것 아닌가?”
구보를 마치고 앉아서 쉬고 있던 병졸 하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 우리는 해군 아닌가! 배만 타는 해군을 북방에 어찌 보내겠는가!”
“그러겠지. 북방에서는 아무튼 신립 장군이 맹활약하고 있다던데…….”
“아이고 신립 장군이고 뭐고 빨리 제대나 했으면 좋겠구만!”
“하하하! 그러게 말일세!”
남해함대로 온 이순신은 부대에 배치되자마자 마치 최전선에 있는 것처럼 강훈련을 실시했다.
병졸들의 체력훈련은 물론 함대에 올라 진을 펼치는 연습, 화포훈련, 조총과 활을 다루는 훈련 등 전시상황에서 병졸들이 당황하지 않고 자신들의 임무를 기계적으로 할 수 있도록 훈련을 계속 반복해서 실시했다.
계속되는 강훈련에 병졸들의 입에서는 단내가 날 정도였으나, 어느새 남해함대는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함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
니탕개의 잔당을 토벌하겠다는 명분으로 국경을 넘은 신립의 5군단, 6군단 주력군은 어느덧 야인여진의 부족 중 우지에부를 완전히 복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와르카부 상당수 마을도 접수했다.
야인여진 중 와르카부는 수렵을 주로 하는 종족으로 개개인의 전투력은 강하다고 볼 수 있으나, 건주여진이나 해서여진에 비해 조직화 되어 있지 않아 이들을 제압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야인여진 일부는 조선군의 점령에 저항했지만, 대부분 야인여진 부족원들은 조선군의 지배를 받는 것을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여진 부족 중 세력이 가장 약했기에 세력이 강한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침략을 받아 노략질을 당하는 것이 다반사였고, 추위와 굶주림에 떨어야 했기에, 오히려 노략질을 하지 않고 군량미를 베풀며 그들을 잘 대해주고 있는 조선군의 보호를 받는 것을 다행이라 여긴 것이다.
야인여진 부락 대부분을 점령한 신립의 군대는 진지를 구축하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군사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곳의 성곽은 제대로 만들어지고 있소?
신립은 지도를 보며 참모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네. 장군 야인들이 협조를 잘 해주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사옵니다.”
“다행이구만. 명의 사자가 또 다녀왔다고요!”
“그러하옵니다. 군대를 속히 조선으로 돌리라 하였습니다.”
군제가 개편되어 1연대장이 된 경원부사 이종원이 신립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하하! 이미 이곳은 우리 땅과 다름이 없게 되었거늘. 물러서라 한들 물러날 수 있겠는가!”
명군의 사자가 군대를 물리라 했다는 말을 들은 신립이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된 이상 명군이 우리 군을 치기 위해 이곳에 올 수 있소. 만일을 대비해 진을 정비하고,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알겠나이다. 장군!”
그런데 갑자기 군졸이 숨을 헐떡거리며 회의가 열리고 있는 막사에 뛰어 들어왔다.
“장군. 해서여진 놈들이 야인여진 부락을 급습하였습니다.”
“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