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한글을 조선의 정식 문자로!
“경의 생각도 옳소. 그러나 북방의 혼란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소. 정후청의 첩보에 의하면 명이 약화된 틈을 타 야인들이 힘을 모으고 있다 하니, 이들을 두고 보고 있다가는 조선에 더 큰 화를 미칠 것이오. 야인들이 어떠한 자들이오. 송을 남으로 밀어내고 중원을 차지한 금나라를 만든 자들이 아니요.”
이균도 박순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으나, 야인들이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막아야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야인들이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분열되었던 야인들이 통합되면 분명 우리 조선을 넘보려 할 것입니다.”
정후청장 김명원이 군 증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하도록 하시오! 북방을 교란하는 야인들의 싹을 잘라야 할 것이오.”
“그리하겠나이다!”
영의정 박순 등 일부 대신들이 군대의 증원파견을 반대했으나, 대부분 대신들은 이균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흐음. 그리고 경들에게 한 가지 또 발표할 것이 있소.”
이균이 근엄한 표정으로 대신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세종대왕께서 만든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훌륭한 글자가 있음에도 우리 조선은 그동안 사대주의에 빠져 어렵고 배우기 힘든 한자를 쓰고 있었소. 그로 인해 고된 일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글은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니 이 어찌 가여운 일이 아닐 수 없겠소. 이제부터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훈민정음을 조선의 공식글자로 사용하도록 할 것이오!”
이균이 예정에 없던 한글을 조선의 공식글자로 사용하겠다고 말하자, 대신들은 잠시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좌의정 정탁이 입을 열었다.
“전……. 하! 언문은 아녀자나 백성들이나 쓰는 글이옵니다. 저희가 성리학을 버렸다고는 하나, 여전히 주요 서책은 한자가 기본이라 할 것인데, 어찌 귀한 글자 한자를 스스로 버리려 하시나이까!”
그러자 이균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정탁을 바라보았다.
“경은 중국 사람이오. 조선 사람이오. 어찌 세종대왕께서 백성을 위해 어진 마음으로 만든 글을 언문이라 비하하고, 중국의 복잡하고 배우기 힘든 글은 귀한 글이라 하는 것이요. 백성들이 글을 쉽게 배우면 그대들의 기득권이 사라질까 두려운 것이오?”
“아니. 그런 것이 아……. 니오라. 한자는 기존부터 써오던 글자인데, 이리 급하게 한자를 버리시면……. 큰 혼란이 올까 염려되옵니다.”
이균을 지지하는 동인들이지만, 그들은 한자가 주는 기득권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복잡한 한자는 배우는 데 오랜 시일이 걸려 필연적으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배우기에 부적합한 글자였기에 사대부나 왕족 등 귀족만이 전유하는 글자였다.
사대부 등 지배층은 복잡하고 배우기 힘든 한자를 바탕으로 정보와 지식을 독점했고 이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했기에, 그들은 한자가 주는 지식과 정보 독점력을 내어주기 싫은 것이 당연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그들이 지지하는 왕 이균이 훈민정음을 조선의 공식 문자로 사용하겠다고 했음에도 이를 반대하였고 꽤 오랜 시간 동안 훈민정음의 사용 여부를 두고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이균을 열렬히 지지하는 율곡, 류성룡 등 다소 젊은 동인들은 훈민정음 사용을 반대하지 않았으나, 박순, 이산해 등 나이가 많거나 다소 보수적 사상을 가진 이들은 이를 반대했다.
“경들의 뜻은 충분히 알겠소. 하지만 정보와 지식을 그대들만 소유하려는 욕심은 바람직하지 않소. 백성들을 위해 세종대왕께서 만든 훌륭한 글자를 더는 천대하며 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오.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훈민정음을 한글이라 칭하고 널리 사용하여 백성들이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그……. 그리하겠나이다! 전하!‘
그러나 이균의 고집을 꺾을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한글 사용을 반대하는 이들은 더는 반대하지 못하고 이균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 8도 곳곳에 한글을 조선의 정식 문자로 사용하겠다는 방이 붙자, 백성들은 열광했다.
백성들은 그동안 글을 몰라 설움이 이제야 풀리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한자를 배우려 해도 배울 시간이 없어 배우지 못하던 이들은 이제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통해 사대부들과 대등하게 정보를 습득할 수 있게 되었고, 관직에 진출하고 싶어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행정고시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와 한글 사용으로 인해 조선은 보다 파격적으로 변모했다.
도성뿐만 아니라 조선 8도 곳곳에 서책을 파는 서점들이 생겨나 백성들은 서점에서 지리, 과학, 서학뿐만 아니라 유학과 관련된 서책들을 보며 지식을 쌓아갔다.
양반가들은 백성들이 그들과 동등하게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왕의 뜻이 그러하니 어쩔 수 있겠는가.
***
남해 2함대
장군으로 승차하여 남해 2함대에 배속된 이순신은 업무를 파악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왜인들이 드나드는 3포를 담당하는 남해함대는 해군 전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왕의 뜻에 따라 전력이 대폭 강화되었다.
판옥선의 숫자가 400여 척에 이르렀고, 해군 병력은 어느덧 2만이 되었으며, 갈레온선도 10척이나 되었다.
‘흐음. 판옥선은 충분한데, 아직 남만선이 턱없이 부족하구나!’
함대의 전력을 살피던 이순신은 갈레온선이 부족한 것을 바로 파악했다.
‘남만선이 없으면 먼바다로 나갈 길이 없거늘.’
이순신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그의 메모 습관은 집요할 정도였다.
업무를 보던지, 훈련하던지 머릿속에 무엇인가가 떠오르면 바로 메모를 했다.
“장군! 소장 나대용입니다.”
“흐음. 들어오게.”
그 순간 이순신의 수하로 있는 대위 나대용이 막사에 들어왔다.
“나 대위 어서 자리에 앉게!”
이순신이 나대용에게 방금 내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따라주었다.
“감사합니다. 장군!”
나대용은 전라도 나주목에서 정로위로 복무하던 나항의 아들로, 문에도 상당히 능하여 가문에서는 그가 문과에 급제해 출사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문보다는 무에 더 관심을 가졌고 특히 선박을 제조하는 기술에 호기심에 많아 무과에 지원하여 급제한 후 스스로 해군에 복무하기를 자청해 남해함대에 배속된 초급장교였다.
그는 해군 초급장교가 된 이후에도 선박 제조에 관심이 많아 항상 배의 모형을 만들며 배를 연구했고, 특히 거대한 삼각돛과 사각 돛을 움직여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갈레온선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나대용이 무에도 능하지만, 선박 제조에 탁월한 능력이 있는 것을 바로 파악한 이순신은 그를 곁에 두고 싶어 그를 그의 직속 부하로 데리고 왔다.
“나 대위 판옥선에 화포는 충분히 무장토록 했는가!”
“그러하옵니다. 장군. 홍이포, 천자총통 등 화포로 잘 무장을 하였습니다.”
“그렇구만! 홍이포의 반동이 상당히 크던데, 판옥선이 견딜 수 있겠는가?”
“장군! 판옥선은 튼튼하게 아주 잘 만든 배이옵니다. 홍이포의 반동을 충분히 견딜 수 있사옵니다.”
나대용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구먼! 남만국에 다녀오니 전투선들이 모두 화포로 무장하고 있더구만. 앞으로 해전의 양상이 바뀔 것이네. 전투함에 접근해 단병접전을 벌이는 방식에서 탈피해 압도적 화력으로 적을 섬멸해야 하네!”
“잘 알고 있사옵니다. 장군. 만약 왜놈들과 해전이 벌어진다면 왜놈들 함선은 우리 함대에 접근도 못 해보고 바로 수장될 것이옵니다.”
나대용이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도 앞으로 해전은 단병접전보다는 포격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흐음. 그래 자네 말처럼. 왜놈들 함선은 약하여 화포를 실지 못하니……. 화력으로 제압한다면 능히 섬멸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러하옵니다. 장군! 왜놈들의 주력선이 비록 첨저선으로 그 속도는 빠르나, 겹이음 구조와 나무못을 사용하여 튼튼하게 만든 판옥선과 달리, 사춤넣기와 쇠못을 사용해 배를 만들어 함선이 약해 화포가 주는 충격을 견디지 못합니다!”
나대용은 이미 왜놈들 주력선의 구조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놈들이 빠른 속도를 이용해 우리 함선에 접근해 단병접전을 벌이려 하면 화포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 아닌가?”
“장군! 우리 주력선인 판옥선이 왜놈들의 주력선보다 그 선체가 훨씬 높습니다. 왜놈들이 등선육박전술을 위해 우리 판옥선에 접근하였다가는 높은 곳에서 쏘아대는 조총과 화살에 의해 고전을 할 것이옵니다.”
“하하하. 그러하네. 우리 남해함대는 왜놈들을 관할하고 있네. 지금이야 왜놈들과 통상을 하며 평화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들이 언제 돌변하여 해적질을 할지 모르니, 항상 경계를 소홀히 하면 안 되네!”
나대용이 왜군의 함선과 전략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자, 이순신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흐음. 그나저나 전하께서는 우리 해군이 대양으로 나가길 원하시는데, 남만선이 턱없이 부족해서 걱정이구만!”
이순신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나대용을 바라보았다.
“저도 그것이 염려돼오긴 하나, 이제 처음 우리 손으로 남만선을 만드는 것이오니 좀 시간이 지체될 것이옵니다. 허나 손에 익으면 빠른 속도로 만들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흐음. 그래야겠지. 남만선이 어서 빨리 보충되어 그대와 함께 저 대양으로 나가보았으면 좋겠구만. 자네도 먼바다를 한번 나가보면 많은 것을 느낄 것이네.”
“장군! 저도 어서 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나대용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그도 속히 바람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는 커다란 갈레온선을 타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고 싶었다.
“흐음. 그리고 나 대위! 해전 시 적진을 마음껏 휘젓고 다닐 수 있는 돌격선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이순신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대용을 바라보았다.
“장군! 좋은 생각이시옵니다. 튼튼하게 무장한 돌격선이 적진을 향해 돌격해 적진을 교란시킨다면 적장은 크게 당황해 제대로 진법을 구사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하하하! 자네 생각이 나와 같구만! 그러하면 한번 적절한 돌격선을 연구해보게.”
“좋으신 생각이옵니다. 흐음. 돌격선이라면 우선 배가 튼튼해야 할 것이고, 적들이 배에 올라타지 못하도록 갑판 위를 덮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앞뒤 좌우로 화포를 달아 빠른 속도로 적진을 헤집고 다니면 아마도 깜짝 놀랄 것이옵니다.”
나대용은 벌써 돌격선의 윤곽이 떠올랐는지 신이 나서 말했다.
이순신이 새로운 배를 연구해보라 하자, 나대용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하하하! 벌써 생각이 떠오르는 모양이구만. 흐음. 나도 좀 생각을 해둔 배가 있는데, 우리 한번 멋들어진 돌격선을 만들어 보세!”
“알겠습니다. 장군!”
***
파발마가 급한 소식이라도 있는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전속력으로 도성을 향해 달렸다.
“무슨 말이 저리 빨리 달리나?”
“그러게 말일세.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파발마가 전속력으로 궁을 향해 달려 들어가자 백성들이 파발마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궁금해하며 수군거렸다.
잠시 후 율곡과 도승지가 오래간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균을 찾아왔다.
“무슨 일이오? 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을 것인데?”
별다른 일정이 없는데, 도승지와 율곡이 찾아오자 이균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전하! 방금 들어온 급보이옵니다.”
“급보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요?”
“남만국 국왕이 원정 중 전사하였다 하옵니다!”
“무엇이라 남만국 국왕이!”
남만국 국왕이 전사했다는 말을 들은 이균의 얼굴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