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이항복이 유럽에서 혼인을 (3)
“전하!”
왕이 자신의 손을 잡자, 이산해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잊지 못했다.
“사절단이 정말 큰일을 해냈구려! 긴 항해 동안 풍랑을 만나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소. 그럼에도 남만국에 무사히 도착해 조선의 존재를 알렸으니 과인은 기쁘기 그지없구려!”
이균은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온 사절단 일원 모두를 일일이 격려했다.
“남만국, 서반아 왕을 직접 만났다고요.”
“그러하옵니다. 전하의 친서를 모두 전해드렸고 각국의 왕들은 조선과 우호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산해는 사절단의 유럽에서 한 활동을 상세히 이균에게 알렸다.
“흐음. 교황도 만났다고요?”
“그러하옵니다. 교황은 조선을 상당히 중요시하는 것 같았사옵니다. 저희 사절단을 아주 융성하게 대접해주었고, 또 이 세계지도까지 하사하셨나이다!”
이산해가 교황에게서 받은 오르텔리우스 세계지도를 조심스럽게 이균에게 건넸다.
“흐음. 제법 세계 곳곳을 잘 표현한 지도군요. 우리 조선에게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 같구려!”
이균은 흡족한 표정으로 교황이 선물한 지도를 살펴보았다.
“우리 조선도 이제 대양으로 나가야 할 것이오. 그래야만 조선이 더욱 부강해질 수 있소.”
“그러하옵니다. 전하! 직접 유럽에 가보니 남만국과 서반아가 그리 강국이 된 것은 모두 바다를 지배했기 때문이었나이다.”
유럽을 직접 다녀온 이산해는 느낀 바가 많았다.
유럽 제국은 바다를 지배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
바다를 통해 아시아와 연결되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막대한 이문을 남기고 있었고,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해 막대한 지원과 물자를 유럽으로 실어 날라,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은 각종 진귀한 물자와 돈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렇소! 이제 우리 조선도 이제 먼바다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하오. 그러기 위해서는 남만선 같은 돛을 가진 큰 배를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하오. 거제도에 조선소를 만들어 남만선을 만들 수 있도록 하시오!”
“알겠나이다. 전하!”
이균은 갈레온선을 스스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거제도에 대형 조선소를 만들라 지시했다.
“이만호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균이 선단의 항해를 책임진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동북면에서 야인들과 대치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해군에 배속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이순신은 이제 제법 바다 사나이다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조선이 보다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바다를 지배해야 할 것이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람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는 남만선이 반드시 필요하옵니다!”
갈레온 선단을 이끌고 몸소 유럽을 다녀온 이순신은 어느덧 생각이 바뀌어 있었다.
수군을 단순히 지상군을 보조하는 역할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러하지 아니하였다.
대제국을 건설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은 모두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바다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이순신은 직접 확인했기에, 그도 해군의 중요성을 새삼 알게 된 것이다.
이순신의 해군에 대한 생각이 바뀌자, 이균이 뿌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그렇고말고. 우리 조선은 앞으로 강력한 해군 전력을 만들어 대양으로 진출할 것이네. 이만호가 항해를 하며 물살과 바람의 흐름을 상세하게 기록했다고 하던데.”
“남만선은 바람을 타고 가는 배이옵니다. 바람을 만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옵니다. 따라서 바람과 물의 흐름을 잘 알아야 하기에 소신이 미력하나마 기록을 해보았습니다.”
“흐음. 역시 이만호답구려! 이만호 덕분에 무사히 유럽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으니, 이만호를 준장으로 승차시켜주겠소. 남해 2함대로 가 조선의 바다를 수호하도록 하시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균은 사절단을 이끌고 긴 항해를 성공리에 마친 이순신을 장군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과거에 급제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순신은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어느덧 장군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순신이 벼락 승차해 장군이 되자, 류성룡이 뿌듯한 눈빛으로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전하. 그리고 이항복이 인쇄기라는 기계를 가지고 왔는데, 서책을 아주 빨리 만들어낼 수 있는 유용한 기계이옵니다. 조선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사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말하는구나!’
이균은 당연히 이산해가 말하는 인쇄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으나,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르는 척했다.
“흐음. 그런 기계가 있단 말이오. 그동안 서책을 만들기가 힘들어 백성들이 널리 서책을 보지 못했거늘. 이 기계만 있다면 백성들도 저렴하게 서책을 볼 수 있겠구려. 이 기계도 연구를 해서 많이 만들어내 앞으로 서책은 인쇄기라는 기계로 만들도록 하시오!”
“알겠나이다!”
“이항복! 그대가 인쇄기를 가지고 왔다고? 아주 고생이 많았네. 그런데 남만국에서 공작의 자제와 혼례까지 치렀다고?”
이균은 이미 보고를 받아 이항복의 포르투갈에서 저지른 짓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척하며 물어보았다.
“아……. 저……. 어찌하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그러자 이항복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하하하. 그렇구나! 남만국 공작 가문과의 혼례라……. 그대 덕분에 남만국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겠구나!”
이균이 이항복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아. 그런데 그대는 권철 대감의 손녀와 혼인을 약조한 일이 있지 않은가?”
이균은 이항복을 놀려먹을 심산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러나 이항복은 왕이 권철 대감의 손녀와의 약혼 사실을 들먹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저. 그게. 음……. 공작님 따님이 아이를 가지는 바람에…….”
이항복은 우물쭈물하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답지 않게 연신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사절단 일행은 자신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아. 그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냐. 하하하. 벌써 아이가 생겼구나. 경사스러운 일이구나. 그렇지 않소. 이산해 대감!”
“아. 그렇습니다. 전하! 브라간사 공작도 아주 좋아했사옵니다! 남만국 국왕도 몸소 참석해 결혼을 축하해주었습니다.”
이산해는 사실 사고를 친 이항복이 못마땅했으나, 왕께서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으니, 결혼을 축하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럼 약혼은 취소를 해야겠구만! 권철 대감의 상심이 크겠구나! 자네를 그리 점찍어 손녀딸을 주려 한 것인데…….”
이균이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이항복을 바라보았다.
“아……. 제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권철 대감을 볼 면목이 없사옵니다.”
이항복이 이균의 눈치를 살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권철 대감이 눈을 감기 전까지 자네를 그토록 기다렸건만!”
‘뭐야 권철 대감이 돌아가신 건가?’
“전하! 권철 대감께서 돌아가시온 것입니까?”
이항복이 놀란 눈을 하며 이균을 바라보았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인가! 얼마 전 권철 대감이 안타깝게도 노환으로 돌아가셨네.”
이균은 이항복의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죽겠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이항복은 자신도 모르게 함성을 지를 뻔했다.
조선에 돌아가면 권철 대감에게 혼구녕이 날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배를 타고 오는 내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였는데, 권철 대감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전하! 모든 것이 소인 때문이옵니다. 권철 대감께 제가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이항복은 권철 대감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지만, 애써 이를 감추며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 했다.
“그대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남만국에서 사모하는 여인을 만난 것이거늘. 혼인은 사모하는 여인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너무 염려하지 말거라!”
“알……. 알겠나이다. 전하!”
“그런 그렇고 홍차는 잘 홍보하고 왔느냐!”
“네. 전하 남만국뿐만 아니라 서반아, 그리고 영기리 처자들이 아주 홍차를 좋아했습니다. 게다가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타 밀크티를 만들어주니 그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홍차가 유럽에서 아주 큰 유행을 할 것 같사옵니다.”
이항복은 언제 그랬냐는 듯 왕이 홍차에 관해 묻자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신이 나서 말했다.
“그래! 아주 큰일을 했구나. 제주도에 녹차를 길러 질 좋은 홍차를 만들어 낼 것이니라. 그래서 홍차도 유럽 제국에 팔 수 있다면 조선은 더욱 부유해질 것이니라!”
“그리할 것이옵니다. 전하! 이미 제주도와 전라도 보성에 대규모로 녹차 밭을 만들어 홍차를 만들어내고 있사옵니다.”
도승지 류성룡이 말했다.
“그런데 처자들한테만 홍차를 홍보한 것인가?”
이균이 다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이항복을 바라보았다.
“아……. 그것은 저……. 아무래도 처자들이 달콤한 밀크티도 좋아하고 뭐 그래서…….”
이항복이 왕의 눈치를 보며 변명하자 조정에 모인 사절단뿐만 아니라 대신들이 또다시 키득거렸다.
“아.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구나! 역시 이항복이구나! 그렇지 않소? 이항복 덕분에 조선의 홍차가 아주 많이 팔릴 것 같구려!”
“그러하옵니다. 전하!”
대신들은 키득거리며 이균의 말에 맞장구를 쳤고, 이항복만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왕을 알현하고 나온 이항복은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휴! 살았다! 살았어. 권철 대감이 돌아가실 줄이야!”
이항복이 활짝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필운은 참 운도 좋소.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권철 대감댁으로 들어가 경을 칠 줄 알았는데…….”
이덕형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한음. 내가 원래 운이 좀 좋지 않은가! 이토록 세상이 아름다울 수가 있는가! 하늘은 푸르고, 공기도 좋고!”
입궁해서 전하를 알현할 때까지만 해도 죽을상을 하고 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예전의 촐랑대던 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또 사고 치지 말고 이제 일이나 열심히 하시오. 세계 유람도 하고 과거도 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 것이요. 전하께 감사하게 생각하시오.”
“한음.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내 죽을 때까지 전하를 위해 충성을 할 것이네. 그나저나 서인들이 야인들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일세.”
조선 땅에 돌아와서야 서인과 사림이 여진족을 끌어들여 역모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알게 된 사절단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게 말이요. 신립 장군이 야인들을 요절을 냈다고 하던데.”
신립이 역모에 동조해 국경을 침범한 여진족 수만 명을 전멸시킨 사실은 곧 조선 팔도에 퍼졌고, 신립은 어느덧 전쟁 영웅이 되어 그 인기가 대단했다.
“참. 모든 게 급변하고 있구만. 그런데 신립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월경해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하던데…….”
“그러게 말이오. 야인들 땅을 야금야금 점령하고 있다던데. 이러다 명하고 전쟁이라도 나는 것 아니요? 야인들 땅은 엄연히 명나라 땅이 아니오.”
이덕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항복을 바라보았다.
“한음. 거기가 어찌 명나라 땅인가. 따지고 보면 우리 조상님들의 땅이 아니던가! 명이 뭐라 하면 한판 붙어 버리면 그만 아닌가. 하하하.”
이항복이 호탕하게 웃었다.
“아니. 이 사람이 전쟁을 그리 쉽게 말하는 것이오.”
“하하하. 뭐 전쟁은 전하께서 알아서 하라고 하고, 우리는 저 육조거리 앞에 새로 생긴 커피하우스를 가봅시다. 아주 물이 좋다고 하던데…….”
“으이구. 필운은 참…….”
이항복은 이덕형을 이끌고 젊고 이쁜 처자들이 많기로 소문난 새로 생긴 커피하우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