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이항복이 유럽에서 혼인을 (2)
‘루이사라면 만찬회에서 보았던 그 처자.’
공작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루이사라는 이름이 나오자 이항복은 만찬회에서 만나 거사를 치렀던 처자의 이름이 생각났다.
“루이사를 아느냐 모르느냐!”
공작이 역정을 내며 말했다.
‘루이사가 저 공작의 딸이란 말인가.’
이항복은 아차 싶었다.
만찬회에 초대받은 처자들이 당연히 귀족의 딸일 것이라 여겼지만, 공작 가문의 딸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만찬회에서 보았던 그 처자를 말……. 하는 것이요?”
이항복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 네놈이 감히 내 딸에게 무엇을 한 것이냐!”
브라간사 공작은 포르투갈 제국의 왕족 출신으로 장차 현재 국왕이 잘못되는 경우 왕위 승계까지 가능한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명문 귀족이었는데, 이항복이 그 명문 귀족의 막내딸과 사고를 친 것이다.
게다가 공작은 막내딸 루이사를 그 어느 자식보다 귀여워하며 애지중지 키웠기에 조선에서 온 근본도 모르는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그 딸을 건드렸다 하니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를 길이 없었다.
“아니……. 그……. 것이 무슨 말이오. 전 그저 만찬회에서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이항복은 일단 아무 일이 없었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 자신이 살길이라 여겼는지 루이사와 그날 밤 있었던 일을 애써 부인했다.
“이놈이. 그래도.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공작이 수하에게 눈짓하자, 건장한 체격의 수하가 채찍을 높이 쳐들어 이항복을 내리치려 했다.
“살……. 살려주시오! 난 아무 짓도 안 했소!”
이항복은 눈을 찔끔 감고 살려달라 애원했다.
“아빠! 그만 하세요! 제발!”
그때 문이 열리더니 배가 볼록 나온 아가씨가 뛰어들어와 공작을 노려보았다.
“루……. 루이사!”
막내딸이 뛰어들어오자 공작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다감한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아빠! 리(LEE)한테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우리는 영원히 함께하기로 약조한 사이라고요!”
포승줄로 꽁꽁 묶여 있는 이항복을 보고 루이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 루이사. 그런데 배는……. 왜 저런 거야! 설마!’
루이사를 본 이항복은 그녀가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임산부처럼 배가 나온 그녀를 보며 등골이 싸늘해지는 불길한 예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사! 아직도 저 양아치 같은 놈을 두둔하는 것이냐. 저놈은 임신을 시켜 놓고도 무책임하게 조선으로 도주하려 한 놈이야!”
그날 밤의 거사 때문인지, 루이사는 이미 임신을 해 배가 볼록하게 나와 있었다.
‘망했구나. 망했어! 저 루이사의 배 속에 있는 아기가 내 아기라니.’
이항복은 고개를 푹 수그리며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에요. 아빠! 리(LEE) 어서 말해보세요!”
루이사가 간절한 눈빛으로 이항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항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인 어르신!”
이항복이 느닷없이 공작을 향해 장인 어르신이라 말하자, 공작은 잠시 움찔했다.
조금 전까지 고개를 푹 숙이며 죽을상을 하고 있던 이항복이 느닷없이 넉살이 좋게 그를 장인 어르신이라 부르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당황스러울 만했다.
“장인 어르신! 제가 루이사를 책임질 것이옵니다. 그날 밤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고 영원히 함께할 것을 약조하였습니다. 리스본에 오면 그녀를 찾아가 정식으로 청혼하려 했습니다. 다만 다른 일정이 있어 시간이 지체되었을 뿐입니다.”
‘에이 모르겠다. 이판사판이다!’
포르투갈 제국의 지체 높은 공작 가문의 딸을 임신시켰으니, 이항복은 살길은 오로지 이 길밖에 없다고 여긴 듯했다.
“무어라! 이놈이!”
공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빠 그것 보세요! 우리는 사랑을 약조했다니까요. 저는 리(LEE)와 결혼할 거예요. 당장 저 줄을 풀어주세요!”
루이사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이항복을 바라보며 그와 결혼하겠다고 외쳤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이항복에 푹 빠져 끝까지 결혼하겠다고 하니, 공작은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장인 어르신! 루이사와의 결혼을 허락해주십시오. 장인 어르신이 남만국의 지체 높은 공작이라 하시나, 저 또한 명문가의 자제이옵니다. 저희 부친이 형조판서를 역임하셨고, 저도 과거에 급제해 이렇게 사절단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공작님의 여식과 제가 혼인을 하면 조선과 포르투갈 제국의 영원토록 빛날 우호 관계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따님을 저한테 주십시오!”
“저……. 저놈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구걸하며 벌벌 떨던 놈이 갑자기 당당하게 딸을 달라며 너스레를 떨고 있으니, 공작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루이사! 저놈은 믿을 수 없는 놈이다. 저놈한테 너를 맡길 수가 없구나!”
사랑스러운 막내딸이 조선에서 온 청년에 마음을 빼앗겨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공작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딸을 저런 얼빵한 놈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아빠! 그럼 배 속에 있는 이 아이는 어쩌라는 거예요. 아빠 없는 아이로 만들 생각이에요?”
루이사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장인 어르신! 루이사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루이사를 책임지고, 아이를 훌륭하게 키울 것입니다. 장인 어르신 저를 믿어 주십시오. 루이사가 없으면 세상을 살아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공작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자, 이항복은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쳤다.
“이……. 이런 쳐 죽일 놈 같으니라고! 루이사 네 맘대로 하거라!”
공작은 애써 눈물을 감추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는 이미 이항복의 아이를 가진 막내딸 루이사의 애원을 뿌리칠 수 없었다.
“리(LEE) 괜찮아요! 나 때문에 이런 고초를…….”
공작이 나가자 루이사는 이항복에게 달려와 포승줄을 풀어주고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휴 이제 살았다!’
루이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보전하게 된 이항복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루이사를 바라보았다.
“루이사! 미안하오! 진작에 찾아왔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이렇게 만나게 되었잖아요. 몸은 괜찮아요. 아빠가 괜한 짓을 해서…….”
“괜찮소. 그나저나 임신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소. 몸은 괜찮은 것이오.”
이항복은 루이사의 배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이요. 정말 잘된 일이지요. 이렇게 우리의 사랑이 결실이……. 아주 귀여운 아가가 태어날 거예요.”
“아. 뭐……. 그러하겠지요. 우리 아이를 잘 키워 봅시다!”
이항복이 그의 품에 꼭 안긴 루이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리스본에서 출발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려 했던 사절단의 발걸음은 이항복의 공작 가문 막내딸 임신 사건으로 인해 전면 중단되었고, 결국 이항복은 리스본에서 브라간사 공작의 막내딸 루이사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포르투갈 제국의 명문 귀족 가문이 총출동했고, 세바스티앙 1세까지 와 결혼식을 축복해주었다.
“공작님! 막내 따님을 이리 일찍 시집을 보내니 서운하시겠습니다.”
세바스티앙 1세가 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직접 오셔서 이리 축하해주시니 영광이옵니다.”
공작은 비록 아니라 했지만 아쉬움이 한가득하였다.
막내딸만은 오랫동안 자신 곁에 두고 싶었는데, 이렇게 근본도 모르는 조선인에게 빼앗길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비록 이항복과 사고를 쳐 배가 불룩하게 나왔지만, 드레스를 입은 브라간사 공작 가문의 막내딸 루이사는 그 누구보다 순결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모두 다 루이사의 빛나는 미모에 감탄하며 둘의 결혼식을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막내딸을 애지중지 키운 공작과 그 부인은 딸을 가로챈 이항복이 그토록 미울 수가 없었기에, 이항복에게 고운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항복도 그런 장인의 눈길이 느껴졌는지, 이날만큼은 즐겨 하는 농담 따먹기도 하지 않고, 진중한 표정으로 공작의 눈치를 살피며 결혼식에 임했다.
조선과 포르투갈 제국이 이런 인연으로 연결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왕위계승 서열 상위에 있는 공작 가문의 자제와 조선의 명문가 자제가 혼인하니, 마치 혼인동맹을 맺은 것과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결혼식을 마친 후 루이사는 이항복과 함께 조선으로 가고자 했으나, 이미 임신을 하여 산달이 가까워져 오기에 거친 바다로 나가는 것은 무리였고, 루이사는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포르투갈에 남기로 했다.
루이사가 당장 조선으로 떠나지 않게 된 것이 그나마 공작 부부에게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낭군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루이사는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눈물로 이항복을 배웅했다.
“필운! 새신랑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운 거요? 각시를 두고 떠나서 그런 거요!”
“한음. 지금 놀리는 건가! 난 조선에 돌아가서 권철 대감에게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네.”
이미 권철 대감의 손녀와 약혼을 한 그가 느닷없이 포르투갈의 공작 딸과 결혼을 한 유부남이 되었으니, 막막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게. 조심하라 하지 않았소. 언젠가 사달이 날 줄 알았소. 그래도 뭐 어쩌겠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니오. 그래도 포르투갈 명문 귀족 가문의 딸과 혼인을 했으니, 그나마 다행 아니오. 권철 대감도 이해해 줄 것이오.”
이덕형이 풀이 푹 죽어 있는 이항복을 애써 위로했으나, 이항복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휴! 그냥 배에 올라타지 말고 남만국에 눌러살 걸 그랬나!”
이항복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조선에 돌아가면 성정이 불같은 권철 대감에게 다리 몽둥이가 부러지도록 몽둥이찜질을 당할 것만 같았다.
“필운답지 않게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이요. 자 기운을 내시오!”
이덕형은 점점 멀어지는 리스본을 바라보고 있는 이항복의 어깨를 두드렸다.
***
긴 항해를 마치고 사절단을 태운 선단이 마침내 강화도에 도착했다.
사절단을 태운 갈레온선은 리스본을 떠나 아프리카 남단을 거쳐 고아, 말라카, 마카오를 거쳐 약 1년여 만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고국의 흙과 바람 냄새를 느낀 사절단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돌아오는 길도 무척이나 험난했다.
폭풍우를 만나 선원 20여 명을 또 잃어야 했다.
살아 돌아온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사절단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살아 돌아오자 이균은 마치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군이라도 되는 양 사절단을 열렬히 환대하도록 했다.
사절단은 번쩍번쩍 빛나는 갑주를 차려입은 응양군과 용호군 갑사 수백 명의 호위를 받으며 도성 한가운데를 질러 궁으로 향했다.
도성 주민들은 큰 구경거리라도 난 듯 나와 사절단 행렬을 지켜보며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이들을 맞이했다.
마차에는 사절단이 가지고 온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도 실려 있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물건에 백성들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수군거리기도 했다.
“사절단이 결국 돌아왔구만!”
“그러게 말이야. 몇 년 만에 돌아오는 건가. 참으로 대단하구만!”
백성들은 서로 노닥거리며 담장이나 기와지붕 위에 올라가 긴 사절단 행렬이 사라질 때까지 이를 지켜보았다.
마침내 사절단이 광화문을 지나 왕을 만나기 위해 궁으로 들어왔다.
“전하. 신!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사옵니다.”
이균을 본 이산해가 넙죽 절을 하며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하자, 이균이 앞으로 나아가 이산해의 손을 덥석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