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유럽에 도착한 조선 사절단 (5)
“그러하옵니다. 전하 방금 순산하였다는 전갈이옵니다.”
“이……. 이런 경사가 있나!”
‘내가 아이의 아빠가 되다니.’
이균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이의 아빠가 되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은 해보았지만, 막상 아이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꿈을 꾸는 듯 멍했다.
“그래! 중전은 무탈한가?”
“건강하시다 하옵니다.”
“하하하. 다행이로다! 어서 중전한테 가보아야겠구나!”
“전하! 이제 갓 출산을 하셨기에......”
“아니다! 내 직접 중전과 아이를 보고 싶구나!”
“전……. 전하!”
이균이 왕실의 법도를 지키지 않고 아이가 나오자마자 중전한테 달려가려 하자 상선은 당황해하며 그를 만류했지만, 이균은 아랑곳하지 않고 중전이 있는 교태전으로 달려갔다.
“중……. 중전 고생이 많았소. 그래 몸은 괜찮소!”
이균은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중전을 바라보았으나, 중전은 아이를 낳자마자 왕이 들이닥치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 전하!”
“사내아이를 낳았다고요. 왕실에 이런 경사가 어디 있겠소.”
“전하를 똑 닮은 것 같사옵니다.”
상궁이 비단보로 둘러싸여 있는 사내아이를 조심스럽게 이균에게 건넸다.
채 눈도 못 뜬 아이는 비단보에 둘러싸여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어찌 이리 작고 귀여운 것인가. 하하하. 코는 중전을 닮은 것 같구려!”
이균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를 수 없었다.
“전……. 하!”
상궁들이 보는 앞에서 이균이 중전의 손을 덥석 잡자, 중전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녀석의 이름을 혼이라 할 것이요. 이름이 마음에 드오?”
“그러하옵니다. 전하!”
“하하하. 내 이 녀석에게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강한 나라를 기필코 물려줄 것이오.”
이균은 한동안 교태전을 떠나지 못하고 중전과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왕실이 오랫동안 기대하던 왕자가 드디어 태어나자, 이균은 왕자가 태어난 다음 날을 임시 공휴일로 선포하고, 중대 죄인이 아닌 죄인 상당수를 사면해주었다.
***
이균은 왕자가 출산한 이후, 곧바로 이제 수명을 다한 과거시험을 폐지하고 관료들은 행정고시를 통해 선발할 것을 전격 발표했다.
행정고시 과목에는 여전히 유학이 들어 있었으나 그 비중이 확 줄었고, 대신 지리, 과학, 어학 등 서학과 관련된 과목이 대폭 들어왔다.
그리고 육군 사관학교와 해군 사관학교를 만들어 무관을 양성하도록 했으며, 군의 계급을 현대식으로 바꾸었다.
갓 임관한 장교는 소위부터 시작해 중위, 대위 그리고 소좌, 중좌, 대좌로 바꾸었으며 장군급은 준장, 소장, 중장, 대장으로 계급을 나누었다.
해군은 서해, 남해, 동해에 각 사령부를 두고 서해는 1함대, 남해는 2함대, 동해는 3함대 관할로 했다.
그리고 예비군을 창설해 외침이 있거나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전역 군인들을 동원하도록 했다.
***
스페인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사절단은 다시 갈레온선을 타고 지중해를 통과해 교황이 있는 로마로 향했다.
“이보게 한음. 이곳이 그 천주교 황제가 있는 로마라는 곳이군.”
로마에 도착한 이항복이 이국적인 로마의 모습에 반해 이덕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이곳이 한때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 않소.”
“흐음. 그러게 말이오.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후예들이 사는 곳이라 하니 무척 기대되는구만.”
이항복과 이덕형은 이미 왕립 서강대학에서 배운 세계사를 통해 유럽사를 빠삭하게 알고 있었기에,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필운, 서반아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요. 명문가 자제로 보이는 아가씨들한테 둘러싸여 아주 가관이던데……. 또 사고 친 거 아니요?”
이덕형이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이놈의 인기는 어딜 가나 똑같구려. 아가씨들이 어찌 그리 날 보고 싶어 하는지……. 참.”
이항복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이덕형을 바라보았다.
“앞날이 걱정되는구려. 필운, 그러다 언젠가는 사달이 나고 말 거요. 사달이.”
“아니. 지엄하신 왕명을 따른 것뿐인데, 무슨 사달이 난다는 건가!”
“왕명? 이 사람이 이제는 왕명 핑계를 대고 여인네들하고 시시덕거리는 거요.”
이덕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이 사람이 정말이라니까. 전하께서 영기리, 서반아 사람들에게 조선 홍차를 알리라는 지엄하진 어명을 내려주셨기에 어명을 따랐을 뿐이라고......."
이항복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덕형을 바라보았다.
“아. 지엄하신 어명이라! 그런데 전하께서 젊은 처자들에게만 홍차를 전파하라 하신 거요. 필운 곁에는 젊은 처자들밖에 없던데…….”
이덕형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항복을 쳐다보았다.
“아……. 니. 뭐……. 그거야. 처자들이 이 잘생긴 외모를 보기 위해 모여드는데 날 보고 어쩌라는 건가.”
“하하하하!”
명에서 유입된 홍차는 포르투갈을 통해 유럽에 알려졌으나, 아직까지 유럽 전역에 퍼지지 않았다.
홍차의 맛에 중독되어 중국에서 생산되는 홍차 대부분을 수입하며 먼 훗날 아편 전쟁까지 일으켰던 영국은 아직 홍차의 존재를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영국에 홍차가 본격적으로 전파된 것은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공주가 영국의 찰스 2세에게 시집을 가면서 중국에서 온 홍차를 영국으로 가져가게 되면서부터이다.
홍차의 맛에 중독된 유럽 특히 영국이 엄청난 은을 지급하고 홍차를 수입해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균은 청화백자에 이에 또 다른 주요 수출품으로 홍차를 지목하고, 녹찻잎이 잘 자랄 수 있는 흙과 바람을 가지고 있는 제주도에 전략적으로 녹차를 재배해, 녹차를 발효시켜 홍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홍차를 잘 만들어도 유럽에 홍차의 존재를 알리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법.
그러하기에 이균은 말발이 화려하고 위트가 넘치는 이항복을 따로 불러 홍차를 유럽인들 특히 영국인에 널리 홍보하라 했다.
왕으로부터 특명을 받은 이항복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여 마치 홍차를 판매하는 영업사원처럼 홍차를 열심히 홍보했다.
그 홍보의 대상이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는 젊은 처자들에 한정되어 문제이지만…….
교황청이 있는 로마에 도착한 사절단은 그 어느 곳보다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사절단을 교황청으로 이송시킬 화려한 마차가 대기 중이었고, 수백 명의 용감무쌍한 스위스 용병이 사절단을 호위하기 위해 사절단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교황청의 주요 성직자뿐만 아니라 엄청난 인파의 로마 시민들도 그들을 마중 나왔다.
천주교에 저항하는 신교도와 이교도들에 의해 중대한 도전에 직면한 교황청은 그 타개책으로 신대륙과 아시아에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 선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는데, 특히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해외 선교 활동을 더욱 중시 여겨 예수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런데 동방에 있는 조선이 예수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천주교에 호의적이라 하니,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조선을 동아시아 천주교 전파의 중간기지로 여기게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로마 교황청 입장에서도 조선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엄청난 인구를 가진 명나라에 천주교를 전파하고 싶은 것이 교황청의 생각이었으나, 명은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며 천주교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기에 조선을 중간기지로 삼아 명나라에 천주교 전파를 할 기회를 엿보고자 했다.
“이거 남만국보다 더 대접을 받는구만. 저기 나와 있는 사람들 좀 보게. 엄청나네.”
로마에 도착한 사절단은 상상 이상의 환대를 받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화려하게 수놓은 마차에 올라탄 사절단은 조선에서 함께 온 응양군 소속 갑사들과 교황청의 호위대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교황청으로 향했다.
의장대의 진중한 음악과 화려한 깃발 그리고 비단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옷을 입은 응양군 소속 갑사들은 긴 행렬을 이루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고, 동방에서 온 이국적인 모습의 사절단의 화려한 행렬을 로마 시민들은 신기해하며 바라보았다.
***
“동방에서 귀한 손님들이 왔구려!”
그레고리우스 13세가 미소를 지으며 사절단을 향해 인사했다.
“교황께서 이렇게 사절단을 직접 만나주시니 영광이옵니다.”
이산해가 사절단을 대표해 교황에게 예를 표시했다.
“조선이 천주교에 호의적이라 하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소.”
“전하께서는 예수회의 조선에서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실 것이옵니다. 그리고 여기 전하께서 보내오신 친서와 조선 도공들이 만든 청화백자이옵니다.”
“이리 귀한 선물을…….”
사절단은 로마 교황에게도 조선도공들과 화원들이 만든 찻주전자, 찻잔, 접시 등 청화백자 세트를 선물했고, 교황을 비롯한 주교들은 청화백자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리 귀한 선물을 주셨으니, 우리도 답례를 해야겠지요.”
교황이 눈짓을 하자, 시종이 묵직하게 상자에 담겨 있는 무엇인가를 사절단에게 건넸다.
“이……. 것이 무엇이온지.”
이산해가 교황이 선물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그레고리우스 13세를 바라보았다.
“흐음. 오르텔리우스라는 자가 만든 세계지도요. 조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요.”
“아니. 이렇게 귀한 선물을. 전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교황이 선물한 세계지도는 오르텔리우스가 메르카토르의 지도 제작 도법을 사용하여 만든 최초의 근대적 세계지도로, 비교적 정확하게 세계의 지리를 반영하여 여러 차례 개정판을 통해 7,000권 이상이나 인쇄되는 등 큰 인기를 얻은 세계적인 지도였다.
조선은 근해에서 벗어나 더욱 먼 곳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기에, 오르텔리우스의 세계지도는 조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만족하시니 다행입니다.”
이산해와 교황은 오랜 시간 동안 환담을 하였다.
교황은 앞으로도 조선이 천주교를 적극 지원해 달라고 당부했고, 이산해는 조선이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천주교 선교를 방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
“이곳은 또 로마랑 분위기가 다르구만!”
“그러게. 완전히 물의 도시이구만. 도시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건가.”
로마에서 융성한 대접을 받은 사절단은 육로로 베네치아로 이동해 도시를 유람했다.
도심 곳곳이 수로로 연결된 베네치아는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그런 도시를 처음 보는 이항복과 이덕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베네치아의 매력이 흠뻑 빠져있었다.
본래 동방과의 무역을 중개하며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누리던 베네치아는 16세기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으나, 신대륙이 발견되고 동방을 연결하는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면서 점차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베네치아를 마음껏 유람하고 다니던 이항복과 이덕형은 한 건물에 들어가 요상하게 생긴 기계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찍어내는 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저게 무엇인가? 무슨 서책을 저렇게 빠른 속도로 찍어내다니…….”
커다랗게 생긴 요상한 기계에서 묵직한 무엇인가가 쭉 내려와 힘껏 누르자, 순식간에 글이 쓰여 있는 종이가 나왔다.
“아니 무슨 글이 저렇게 빨리 새겨지는 것인가?”
“그……. 그러게. 참 신기한 물건이구만.”
이항복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일하는 데 정신이 팔려있는 인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니. 저 요상하게 생긴 물건이 무엇이오?”
“아. 동방에서 온 사절단이군요. 이건 인쇄기라고 합니다. 책을 아주 빨리 만들어 낼 수 있죠.”
인부는 조선에서 온 사절단을 알아보고 친절하게 기계를 설명했다.
“인쇄기라?”
이항복의 눈빛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