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이로운 군주 선조대왕 일대기-52화 (52/202)

52화 유럽에 도착한 조선 사절단(2)

“아니 필운. 지금 제정신이요. 필운은 권철 대감의 손녀와 이미 약혼한 몸이 아니요.”

이항복이 백마 어쩌고 하면서 정신을 못 차리자, 이덕형이 이 인간이 도대체 철은 언제 들려고 그러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허허. 뭘 그런 것을 가지고 그러나. 혼인을 하자 약조를 한 것이지, 아직 혼인을 한 것 아니지 않소. 혼인을 하면 부인이 무서워서 제대로 여인을 품을 수도 없지 않소. 그니까 혼인하기 전에 많은 여인을 품어야 하는 것이오. 자네도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나를 따라오게나. 이국적인 여인을 품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네.”

이덕형의 말처럼 이항복은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에서 왜놈들을 격파하고 도원수로 맹활약한 권율의 딸과 혼인을 약조한 사이였다.

권율의 부친인 권철은 병조판서, 공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 3정승을 지낸 명문 대신이었는데, 껄렁껄렁하고 사고뭉치이기는 하지만, 어릴 적부터 총명하기로 소문난 이항복을 눈여겨보고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여기고 손녀딸을 이항복에 시집보내기로 했다.

아직 명문가인 권철 대감의 손녀와 혼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권철 대감 집안과 혼인을 약조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기에, 행실을 조심해야 했지만, 이항복은 타고난 성격을 버릴 수 없는지 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허허! 필운. 그러다 이 사실이 조선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권철 대감이 자네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릴 것이오.”

명문가 손녀와 약혼까지 한 이항복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자를 찾자, 이덕형은 그의 앞날이 걱정될 지경이었다.

“사내가 왜 이렇게 소심한 것인가. 사내는 자고로 여인을 많이 품어보아야 세상을 아는 법이네. 자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무엇인지 아는가?”

이항복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이덕형을 바라보았다.

백마 어쩌고 하면서 저질 농담이나 하던 이항복이 느닷없는 질문을 하자, 이덕형은 또 왜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 그거야 선비가 글을 읽은 소리 아니겠소.”

“아이고. 그러니 자네가 그리 고리타분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네. 사람이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서야! 그거에 야심한 밤에 여인이 치마끈을 푸는 소리가 제일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세상에 아름다운 소리가 어디 있겠는가.”

‘아이구. 이 인간이!’

이항복이 또다시 실없는 농을 지껄이자, 이덕형은 허탈한 듯 자신도 모르게 껄껄거렸다.

자고로 조선 시대를 통틀어 이항복만큼 농담을 즐기는 대신은 없었을 것이다.

타고난 호기심이 많아서인지 시도 때도 없이 장난질에, 농담을 던지며 사람을 웃기는 것을 즐기니 그가 대신인지 개그맨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어떤가! 나랑 함께 역사를 도모해볼 것인가?”

“나는 싫소. 필운과 함께 하다가 권철 대감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내 다리 몽둥이도 부러질 것이오.”

“이런 소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럼 나 혼자 갈 터이니. 나중에 부러워하지 마시오.”

이덕형이 끝내 함께하기를 거부하자, 이항복은 홀로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연회가 열리는 홀 한가운데를 향해 갔다.

“참 실없는 사람이로구나. 하하하!”

이항복이 결국 혼자 여자를 꼬시겠다고 가자, 이덕형은 껄껄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말린다고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다른 방도가 있을 리가 없었다.

****

만찬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이산해는 포르투갈 제국의 국왕 세바스티앙 1세와 밀실에서 독대했다.

조선의 장인이 만든 청화백자를 선물 받은 세바스티앙 1세는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조선이 청화백자를 안정적으로 공급해주니 참으로 든든합니다!”

세바스티앙 1세는 경덕진이 해적의 급습을 받고 처참하게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이미 듣고 있었기에, 유일한 청화백자 공급처인 조선이 더욱 중요해졌다.

“전하께서도 남만국 덕분에 조선국이 유럽제국과 교류하게 된 것을 감사히 여기고 있사옵니다. 조선국과 남만국의 우호 관계는 변함이 없을 것이옵니다.”

이산해가 겸손한 어투로 세바스티앙 1세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도 포르투갈의 유통망을 이용해 청화백자를 내다 팔고 있기에 여전히 포르투갈은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였기에 조선은 당분간 포르투갈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당연히 그러해야지요. 우리 포르투갈 제국은 조선이 어려운 일이 닥치면 가장 앞장서서 조선을 도울 것이요.”

“감사하옵니다. 전하께 꼭 폐하의 말씀을 전해드릴 것이옵니다.”

양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조선과 포르투갈은 서로를 마치 동맹처럼 생각했고, 앞으로도 그 관계가 지속될 것이다.

“흐음. 그런데 경덕진이 해적 떼의 습격을 받고 파괴된 것을 알고 있소?”

세바스티앙 1세가 중국에서 들여온 홍차 한 모금을 마시며 말했다.

“그······. 그것이 사실이옵니까?”

금시초문이었다.

먼 바다를 건너 1년이 넘는 항해를 했기에, 도자기 최대 생산기지인 경덕진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그렇소. 경덕진에서 도자기가 다시 구워지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이오. 그로 인해 도자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소. 유럽제국은 도자기를 구하기 위해 아주 난리가 났소.”

“흐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옵니다.”

이산해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졌다.

명나라가 도자기를 만들지 못한다면 조선의 가치가 더욱 커진다는 것을 이산해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제야 포르투갈이 조선 사절단을 그토록 환대했는지 알 것 같았다.

“경덕진이 파괴되어 도자기 공급이 절대 부족하오. 유럽 제국뿐만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등 각국의 상인들이 도자기를 구입하기 위해 조선으로 몰려들고 있소.”

“그러할 만 하군요!”

“그렇소. 그래서 그러니 조선국이 도자기를 우리 제국에 우선 공급해주었으면 하오!”

도자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일단 배에 실어 유럽으로 가져오기만 하면 막대한 이문을 남겨주지만, 도자기 공급이 워낙 부족해 포르투갈 제국도 도자기를 조선에게서 쉽게 받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기에, 세바스티앙 1세는 조선이 자신의 제국에게 도자기를 우선 공급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염려 마시옵소서. 전하께서는 남만국을 각별히 생각하시옵니다. 꼭 전하께 아뢰겠습니다.”

“하하하! 그러 말씀하시니 안심이 되는구려!”

세바스티앙 1세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껄껄거렸다.

****

“정말 미색이 많기도 하구나! 태어나서 이런 호강을 다 하네.”

멋들어진 갓을 쓰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만찬회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이항복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여인을 찾고 있었다.

“오 저런 처자가 있었구나!”

마침내 그의 눈을 사로잡는 여인이 나타났다.

긴 흑갈색 머리에 푸른 호수와 같은 커다란 눈, 청초한 듯 하면서도 관능적인 몸매를 가진 여인이 와인잔을 들고 홀로 창가에 기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항복의 레이더에 그녀가 포착되자 그는 비단으로 수놓은 부채를 펄럭이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가씨, 무엇을 그리 바라보고 있는 것이오?”

이항복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왕립 서강대학에서 마테오 리치에게서 라틴어, 스페인어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어도 배웠기에 그는 유창하게 포르투갈어를 구사했다.

“아······. 조선에서 온 사절단이시지요?”

그녀는 수줍은 듯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렇소이다. 조선에서 온 이항복이라 하오! 저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아름다운 아가씨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는지?”

이항복이 느끼한 멘트를 날리며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루이사입니다.”

그녀도 조선에서 온 이방인 이항복이 일단은 싫지만은 않은 듯했다.

‘하기야 이 조각 같은 외모를 싫어할 처자가 있겠어.’

그녀가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자, 이항복은 내심 자신감이 생겼다.

외모 하나만큼은 자신감 있는 그가 아니었던가!

조선에서도 그가 길에라도 나서면 그의 눈부신 외모에 처자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바람에 그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할 지경이었다.

그가 찍으면 넘어가지 않는 처자가 없었으니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만도 했다.

“루이사라!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구려. 그런데 무엇을 그리 보고 있었던 것이오?”

“그냥 별이 참 아름답게 빛나고 있어 보고 있었지요.”

“별이라······. 아가씨가 저 하늘의 별보다 아름답거늘. 무슨 별을 그리 보는 것이오.”

“무슨 말씀을······!”

그녀는 다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루이사! 당신을 위해 조그마한 선물을 준비했는데, 자 받으시오!”

이항복은 도포 속에서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그녀에게 건넸다.

“아니. 이것은 청화백자가 아니 옵니까! 이리 귀한 것을······.”

이항복은 갈레온선에 가득 실려 있던 청화백자 중 작은 찻주전자를 몰래 챙겨왔었다.

“루이사를 위해 준비한 것이오. 받으시오. 여기에 차를 담아 마시며 내 생각을 해주시오.”

“정······. 정말 받아서 되나요?”

“그렇소이다. 조선에는 이런 청화백자가 넘쳐나니 걱정할 필요 없소. 아가씨가 원하면 더 많은 도자기도 줄 수 있소이다.”

이항복은 그녀가 청화백자를 아주 만족스러워하자 더 허풍을 떨며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다.

“조선은 참으로 자기도 많고 좋은 나라이군요. 그리고 황금도 엄청나게 많다고 들었는데······.”

‘지팡구하고 조선을 헷갈리는구나.’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는 중국 동쪽 해안에서 1,500해리 떨어진 바다에 황금을 뒤덮인 섬나라가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지팡구였다.

“하하하. 당연하지요. 조선에는 발에 걸리는 게 황금이요. 황금은 길에 있는 돌처럼 아주 흔한 것이지요.”

“그것이 정말인가요? 그렇게 황금이······. 동방에 황금의 나라가 정말 있었군요.”

그녀는 평소에도 동방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는데, 이항복이 특유의 말빨로 조선, 명, 왜 등 동방 국가에 대해 여러 가지 신비로운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어느덧 이항복에 푹 빠져들었다.

“루이사! 우리 안은 답답한데 밖에 나가 산책이나 하며 얘기를 나눕시다!”

“그래요!”

‘이제 끝났구나.’

그녀가 흔쾌히 밖에 나가자고 하자, 이항복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작업은 완전히 끝났다.

이제 거사를 치를 일만 남았다.

“공기가 참 신선하구려!”

이항복은 그녀와 함께 밖을 거닐다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고, 루이사도 이항복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루이사!”

둘은 어느덧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에 발길을 멈추었고, 이항복은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포개었고, 루이사도 이항복의 입술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둘은 하나가 되어 뜨거운 열기를 품어냈다.

“조선으로 돌아가면 당신을 보지 못하는 것인가요?”

하나가 되어 뜨거운 거사를 치른, 루이사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루이사 걱정하지 마시오”

“조선으로 돌아가지 마세요! 여기서 우리 함께 살아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빨리 가봐야 하는데, 이산해 대감이 찾을 것 같은데.’

원하던 바를 마친 이항복은 이제 빨리 돌아가고 싶어졌으나, 이미 이항복에 푹 빠져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그냥 두고 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루이사!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는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꼭 다시 만날 운명이요.”

그러나 루이사는 이항복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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