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역모(1)
“전하! 동북면을 맡으라 하심은?”
북방에 있다가 도성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데, 왕이 다시 북방으로 가라 하니 신립은 다소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이균의 눈치를 살폈다.
“그대가 함경도북병마절도사 되어 야인들의 준동을 대비토록 하게!”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소신 야인들이 동북면을 넘보지 못하도록 성심을 다해 방비를 튼튼히 할 것이옵니다.”
별장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승차하여 동북면 방어를 총괄하는 병마절도사의 직을 받으니 신립은 감계 무량이었다.
왕께서 수많은 장수 중에 왜 그리 자신을 신뢰하는지 알 길이 없는 그는 그저 왕을 위해 충심을 다하자는 생각뿐이었다.
“자! 어서 동북면으로 가게!”
“알겠나이다. 전하!”
함경도북명마절도사가 된 신립은 곧바로 말을 달려 야인과 대치하고 있는 함경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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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장거정이 제거된 이후 명나라의 만력제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듯 은을 모으는 데만 집착할 뿐 정무를 거부하고 있었고, 아시아 최대의 도자기 수출기지 경덕진은 파괴되어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상인들은 조선의 도자기를 달라 아우성이었다.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국방개혁을 실시해 정예병 20만을 양성하는 데 성공해, 이제 외침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지경이었고, 마음만 먹으면 좁디좁은 반도에서 벗어나 옛 고구려의 고토를 도모할 수 있는 야망을 품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균을 변절자로 낙인찍은 사림들의 준동이었다.
사실 사림들은 이균이 명종의 뒤를 이어 보위를 이어받을 때만 해도 그가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군주가 될 것이라는 열망이 컸고 이균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사람들의 열정적 지지 덕분에 왕권을 위협하는 척신을 단숨에 제거해 왕권을 공고히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균이 유학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군주가 되리라는 기대가 커다란 실망감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사림들의 도움으로 척신을 제거한 이균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오랑캐와 교류하며, 이교도를 들여오고, 천자의 나라 명나라를 천대하며 사대의 예를 저버렸다.
이균을 사림들이 추구하는 이상적 군주로 옹립하려 했던 그들은 곧 자신이 헛된 망상을 쫓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들은 이균을 더는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균은 주자의 도리를 저버린 폭군이었다.
이균의 변절에 실망한 일부 사림들은 산으로 들어가 속세를 떠나 살았으나, 조정에 입조한 서인을 중심으로 한 이들은 수시로 회동하며 무엇인가를 도모하려 했다.
사림들의 이러한 수상쩍은 행동을 이미 이균은 잘 알고 있었으나, 그들의 동태만을 감시할 뿐 아직은 특별한 조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절대다수의 백성들이 새로운 세상을 연 이균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림들도 백성들이 이균을 지지하고, 이균이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부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열려는 왕과 변혁을 거부하고 주자의 도리를 외치는 사림과의 관계는 함께 공존할 수 없는 불과 물 같은 것이니, 언젠가는 서로를 향해 회심의 일검을 날릴 것이다.
이균은 인상을 잔뜩 쓰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밖에 대기하고 있던 늙은 상선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 전하!”
“상선 갑자기 무슨 일이오?”
느닷없이 상선이 기척도 없이 들어오자, 이균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상선을 바라보았다.
“전하! 중전마마께서······.”
“중전이 뭐가 어찌 되었다는 것이오?”
상선이 뜸을 들이며 말을 얼버무리자, 이균은 답답하다는 듯이 상선을 다그쳤다.
“전하! 중전마마께서 회임을 하셨습니다!”
“무어라! 그게 사실인가?”
중전이 임신했다는 상선의 말에 이균은 화들짝 놀랐다.
“그······. 그러하옵니다. 전하!”
‘내가 아빠가 된다는 거야!’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아이 아빠가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또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하하하. 어서 중전에게 가봐야겠소!”
“그리하시옵소서!”
이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장 중전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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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전!”
이균이 느닷없이 교태전에 들이 닥치자, 중전 임씨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허!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몸을 조심해야지요.”
이균이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중전 임씨는 부끄러운 듯 볼이 빨개져 자리에 앉았다.
“중전 회임을 한 것이 사실이오!”
“그······. 그러하옵니다. 전하!”
“하하하! 이런 기쁜 일이 있나! 왕실의 경사요 경사!”
지아비가 껄껄거리며 임신을 기뻐하자, 그녀의 볼은 더욱 빨개져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중전이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하니, 이균은 중전이 더욱 어여삐 보였다.
“중전. 뭐 먹고 싶은 것이 없소. 임신을 하면 생전 먹어보지 않은 것도 먹고 싶다 하던데. 뭐가 먹고 싶소. 딸기? 커피? 아니 커피는 카페인이 있어서 안 되고······. 먹고 싶은 것을 말해보시오. 내 중전이 먹고 싶다하는 것은 지구 끝까지라도 가서 구해줄 것이오!”
“전······. 하! 아직 그리 먹고 싶은 것은 없사옵니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이균이 호들갑을 떨자 중전은 더욱 부끄러워졌다.
“중전! 부끄러워 마시고 말을 해보시오.”
그러나 이균은 중전의 부끄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욱 신이 나 말했고, 심지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중전의 배를 쓰다듬으려 했다.
이균이 왕의 체통 따위는 집어 던지고 중전을 향해 애정행각을 벌이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상궁들이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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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도산서원
조선 최고의 유학자 퇴계 이황이 세운 도산서원에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유림의 정신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도산서원에 수백 명이 넘는 유생들과 사림을 대표하는 이들이 진중한 모습으로 퇴계 이황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곳에는 노수신, 심의겸, 윤두수, 정철 등 서인 관료들도 대거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비통해 보였으며, 울분이 가득했다.
장엄한 목소리로 제문을 읽은 소리가 울려 퍼졌고, 밖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젊은 유생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우의정 노수신이 향을 피워 올리고, 허리를 굽혀 절을 올리자, 수백 명의 유생들이 일제히 절을 했다.
매년 이황의 제사가 있으면 임금이 직접 제문을 보내 이황의 유덕을 추모하였으나, 이제 임금의 제문도 없었다.
아마도 그것이 사람들을 더욱 북받치게 했을 것이고, 소리를 내어 울지 않던 젊은 유생들은 허리를 움찔거리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점차 젊은 유생들뿐만 아니라 도산서원에 모인 사림들 모두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북받치는 서러움을 참을 수 없는지 짐승의 소리를 내며 흐느꼈고, 그들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불구대천의 원수 하성군을 죽이고, 새로운 임금을 내세워야 하오!”
갑자기 한 젊은 유생으로 보이는 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왕을 죽이자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목 놓아 외쳤다.
정여립이었다.
뼛속부터 골수 사림인 그는 유학을 멀리하고 이교도들과 어울리며 사대의 예를 저버린 이균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총명한 머리로 일찍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그가 사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균은 그를 쓰지 않았고, 한직만 맴도는 처지가 되었기에 그의 왕에 대한 분노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렇소! 하성군은 변절자요! 그를 쳐 죽여야 하오!”
“옳소! 하성군을 능지처참합시다!”
정여립이 앞장서 왕을 갈아엎자고 하자, 젊은 유생들이 하나같이 일어나 이에 동조했다.
정여립과 젊은 유생들의 울분에 찬 분노를 노수신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대감. 이제 때가 되었나이다!”
심의겸이 비장한 눈빛으로 노수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수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인들이 도산서원의 모든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심의겸이 앞으로 나와 분노가 가득한 유생들을 바라보았다.
“하성군은 변절자이며 폭군이오! 우리는 하성군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소! 하성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웁시다!”
“와아아아아!”
사림!
그들이 결국 이균의 천대를 참지 못하고 반란을 도모했다.
성리학을 천대시 하는 이균은 그들에게 폭군이었다.
결국, 그들은 폭군 하성군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을 내세우기로 의기투합하고 유림의 본산 도산서원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사림들의 색채가 강한 경북 일대의 상당수의 군인도 봉기에 가담했고, 상주성 성주 김유정도 그중에 한 명이었기에, 김유정은 상주성을 그들에게 내어주었고, 상주성은 반군들의 임시 거점이 되었다.
“장군 우리 군졸의 숫자가 얼마나 되오!”
도산서원을 나와 상주성에 들어간 노수신이 김유정을 바라보았다.
“약 2만 정도 되옵니다.”
“2만이라! 2만이라면 도성으로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가 아니오.”
노수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림 출신 군관들이 다수 반란에 가담하였기에 그에 속한 군졸이 2만 정도 되었으나, 사실 일반 백성으로 구성된 군졸들은 대부분 사림의 반란이 못마땅했다.
“걱정할 것이 없사옵니다. 제가 이미 대동계를 통해 조선 8도에 하성군에 반대는 이들을 모두 조직해놓았사옵니다. 안동에서 저희가 하성군의 폭정을 견디지 못하고 봉기했다는 소식이 조선 8도에 퍼지게 되면 폭정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하나같이 들고 일어나 저희와 합류할 것입니다.”
“흐음. 그러한가!”
그들은 백성 대다수가 이균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백성들도 이균을 폭군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믿는 것인지, 그들이 봉기하면 백성들도 이를 따라 폭군 하성군을 타도하기 위해 들불같이 일어날 것이라 믿었다.
“대감! 이제 동북면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이옵니다. 곧 한강이 얼 것이니, 동북면과 이곳에서 도성을 향해 양공 작전을 펴면 하성군은 버티지 못할 것이옵니다.”
심의겸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동북면이라! 얼마 전에 신립이라는 자가 동북면으로 갔다고 하던데.”
노수신이 심의겸을 바라보았다.
“신립은 애송이에 불과하옵니다. 이일 장군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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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진 아산보
살을 에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밤중에 군졸 2명이 이미 얼어붙은 두만강을 바라보며 보초를 서고 있었다.
“아우 더럽게 춥구만! 무슨 놈의 날씨가 이렇게 추운 건가!”
“그러게 말이여! 빨리 근무 마치고 따뜻한 아랫목에 들어가고 싶구먼!”
군졸들은 솜이 가득한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추위에 벌벌 떨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
“두만강이 아주 꽁꽁 얼어붙어 버렸구먼! 야인들이 두만강을 건너는 건 아니겠지.”
“미쳤나. 얼어 죽기 딱 좋은 날인데 무슨 야인들이 넘어온다는 건가! 쓸데없는 소리 말고 거기 숨겨 놓은 군고구마나 주게!”
“하하하! 알고 있었나. 어서 먹게. 오기 전에 방금 화로에 구운 것이네, 아주 따끈따끈할 걸세!”
군졸하나가 경계근무를 서기전 막사의 화로에서 구워가지고 온 군고구마 하나를 주섬주섬 꺼냈다.
“아······. 아니. 저······. 게 뭔가. 저······. 새까맣게 몰려오는 것이······.”
“아니 무슨 소리 하는 건가. 뭐가 몰려온다는 거야. 눈 밖에 더 오나. 어서 먹게. 식겠네.”
“아니······. 저······. 저기 좀 보게.”
“아니 갑자기 왜 그러나. 추워서 정신을 잃은겐가!”
동료가 놀란 눈으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자, 군고구마를 입에 물고 있던 군졸이 고개를 돌려 얼어붙은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아······. 니······. 저것은!”
곧 군졸은 군고구마를 입에서 떨어트리고 입을 벌린 채 정신을 잃은 모습으로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눈앞의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얼핏 보아도 수천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기병과 수천 병의 보병들이 눈먼지를 일으키며 두만강을 건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