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문전박대 당한 명나라 사신(2)
“전하! 청화백자는 대명국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인데, 조선은 황상폐하의 허락도 없이 대명국의 청화백자를 모방하여 이를 파랑국 등에 몰래 팔아 대명국 재정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마땅히 청화백자를 더는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옵니다.”
주지번이 엄중한 목소리로 이균을 꾸짖었다.
‘미친것들 청화백자를 특허받은 것도 아닌데, 지들만 만들어 팔겠다!’
이균은 허탈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조선이 오히려 명나라보다 질 좋은 청화백자를 저가에 공급하자 명 황실 재정이 어려워지자, 명은 조선에게 청화백자를 팔지 말라며 엄포를 놓고 있었다.
“하하하! 천자께서 속이 좁으시구려! 그깟 도자기를 팔지 말라는 칙서를 전달하기 위해 먼 조선 땅까지 온 것이오!”
“아니 어찌 천자께 그런 말씀을······.”
이균이 명 황제의 속이 좁다며 비아냥거리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노수신을 비롯한 서인들이 술렁거렸다.
“전하! 황상폐하의 명은 지엄한 것이거늘 어찌 그런 무례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주지번이 역정을 내며 말했다.
“따를 수 없는 황명을 내리니 그러는 것 아니겠소. 청화백자가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요? 조선도 청화백자를 팔아 가난한 백성들을 굶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인데 어찌 지엄하신 천자께서 속이 좁게 백성들 구휼을 못하게 하는 것이오.”
이균은 천자라고 쳐 받드는 명나라 황제의 치졸한 짓거리에 화가 치밀어 올라왔지만, 가능한 감정을 억제하며 명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겠다 말했다.
“감히 황상 폐하의 지엄하신 황명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그렇소. 그대의 황제의 황명을 따를 생각이 없으니, 맘대로 하시오. 그리고 감히 궁녀를 받치라! 명국이 조선을 어떻게 보고 그따위 소리를 하는 것이오. 조선의 처녀들을 한 명도 내줄 수 없소!”
이균이 탁자를 내리치며 주지번을 노려보았다.
조선 개국이래 명나라의 요청으로 궁녀들을 보낸 일이 있었으나, 근래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장거정은 이균을 길들이기 위해 조선의 처녀들을 명에 받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균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주는 것이었다.
‘저자가 미친 것인가!’
이균이 황제폐하의 황명을 따르지 않겠다며 오만방자하게 나오자, 주지번은 할 말을 잃었다.
조선 왕을 겁박해 조선이 더는 청화백자를 만들지 못하게 하라는 장거정의 명을 받을 때만 해도, 풋내기 조선왕의 눈물을 빼주겠다는 각오였으나 조선왕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전하! 기어이 황상폐하의 황명을 따르지 않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청화백자는 오로지 명 황제의 명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옵니다. 황상폐하의 허락이 없으면 청화백자는 절대 만들지 못하옵니다. 그리고 듣자오니 조선이 20만 대군을 양성하고 있다고 하는데, 소국 조선이 20만이라는 대군을 양성하려는 까닭이 무엇이옵니까!”
“하하하. 우리 우의정께서 아주 친절하게 조선군의 속사정을 그대에게 알려주었나 보구려!”
이균이 노수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 그게 아니옵고.”
이균의 매서운 눈초리를 느낀 노수신은 말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조선은 대명국이 지켜주고 있어 대군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불필요한 오해를 살일을 하지 마옵소서!”
주지번이 몹시 심기가 불편한 기색으로 이균을 바라보았다.
“궁녀를 내놓아라. 말을 내놓아라. 금과 은을 내놓아라! 그대가 말하는 대명국은 조선에 올 때마다 조선에서 무엇인가 뜯어낼 궁리만 할 뿐. 조선을 제대로 지켜준 적이 없지 않소! 그러하니 조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군을 일으킬 수밖에 없지 않겠소.”
이균은 역정이 나는지 이미 식어버린 녹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소국은 대국을 따라야 하는 법입니다. 황상폐하께서 이 사실을 알면 20만 대군의 칼끝이 대명국을 향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시게 될 것이옵니다. 부디 자중하소서!”
“의심이라! 조선이 20만 군사를 보유하는 것은 조선을 지키기 위함이오. 게다가 야인들이 최근 준동하고 있으니, 조선이 북방의 경계를 든든히 하면 명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오!”
이균과 주지번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격론을 벌이자 조정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명나라 사신이 천자의 칙서를 무기로 삼아 왕을 압박하면 망아지처럼 미쳐 날뛰는 이균이 잠잠해질 것이라 여겼던 서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곧 깨달았다.
이균이 한치의 물러섬이 없자, 주지번은 분을 삭이지 못하겠는지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다 입을 열었다.
“전하께옵서 황명을 거역하고, 20만 대군을 변방에 배치한 사실을 알게 되면 황상폐하께서는 전하를 용서치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전하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소서!”
“무어라! 어디 일개 사신 나부랭이가 황제의 이름을 빌어 왕의 목숨을 겁박하려 하느냐! 정녕 니가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구나.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당장 그 요망한 주둥이를 닥치고 있거라!”
더는 이균도 참지 못하고 그를 호위하고 있는 갑사의 환도를 빼 들어 주지번의 목에 칼날을 들이댔다.
“전······. 전······. 하. 어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만방자하게 왕을 꾸짖던 주지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는 두려움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그의 바짓가랑이서는 오줌이 질질 흘러나왔다.
“전······. 전하! 자중하오소서! 어찌 천자의 칙서를 가지고 온 사신을 그리 대하시는 겁니까. 천자의 노여움을 살까 두렵습니다!”
놀란 것은 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이 아무리 망나니라 하더라도 천자의 나라 사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패륜적인 짓거리를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런 사단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우상 그대가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지 말라는 왕명을 어기고 영은문에 나가 저자를 극진히 섬겼다고요. 게다가 은자까지 넉넉히 챙겨주었다던데······.”
이균은 이미 첩보기관 정후청을 통해 서인들이 명나라 사신과 접촉한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다.
“전······. 전하. 그······. 그것은. 대명국 사신을 영접하는 것은 관례이옵니다. 천자의 노여움을 살까 하여······.”
“그래요. 아주 충신이 나셨구려. 그래서 저자에게 나라의 비밀을 적나라하게 일러바친 것이오. 그리고 세금 낼 돈은 없다고 난리더니 저자에게 바칠 은자는 넉넉한 모양이구려!”
이균이 환도를 내팽개치며 노수신을 비롯한 서인들을 노려보았다.
“전······. 전하! 신을 의심하시는 것이옵니까. 소신은 다만 전하의 안위를 위해······!”
백발이 성성한 노수신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대는 당장 명으로 돌아가 그대의 황제에게 전하거라. 조선은 더는 명을 섬기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하라!”
이균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주지번을 노려본 후 자리를 떠났고, 주지번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황급히 달아났다.
주지번은 이균에게 당한 치욕을 견딜 수 없는 듯 씩씩거리며 한참 동안 왕궁을 바라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도성 밖에 대기하고 있는 명군 1,000여 명을 도성으로 진격시켜 이균의 멱을 따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조선군의 무시무시한 무력시위를 보았기에 그러하지도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하신 것이옵니까?”
주지번이 머리는 헝클어진 채 실성한 모습을 하고 있자 명군 책임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조선왕이 미쳤구나! 감히······. 황상폐하께 어서 사실을 아뢰야 겠다. 조선왕이 역심을 품고 있는 게야! 내 반드시 오만한 조선왕의 멱을 따고 말 것이다!”
“무슨 봉변이라도 당한 것입니까?”
“어서 가자. 조선 땅은 이제 꼴도 보기 싫구나!”
“알겠습니다!”
이균에게서 개망신을 당한 주지번과 명군은 서둘러 도성을 떠나 명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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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사신이 이균에게 개망신을 당하고 쫓겨났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조선 팔도에 퍼져나갔다.
백성들은 조선 처녀들을 받치고 청화백자를 수출하지 말라는 무리한 요구를 한 명나라 사신을 개망신 준 것에 대해 통쾌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 대명국을 건드렸으니 전란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동요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전하께서 명나라 사신을 혼꾸녕 냈다고 하던데······. 아주 시원하구만! 제 놈들이 뭔데 처녀를 받치라 마라 하는 거야!”
“하하하. 그러게 말이야. 명나라 놈들이 매년 조공을 바치라고 지랄을 해서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나. 전하께서 아주 통쾌한 일을 저지르셨어!”
저마다 고된 일을 마치고 주막에 모여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키며 하루를 마감하는 백성들은 개망신당한 명나라 사신 이야기를 술안주 삼아 왁자지껄했다.
“그렇긴 한데. 이거 전란이 일어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망신을 당했는데 명나라가 가만있겠나!”
“예끼 이 사람아! 뭔 쓸데없는 걱정을 하나. 그래서 전하께서 미리 이런 사달이 날 줄 알고 군사를 키운 것이 아닌가. 명나라 놈들이 쳐들어와 봤자 아주 결딴이 날 것이네.”
“하하하. 아무렴 그렇고말고. 명나라도 별거 아니란 말이지.”
“아이구. 그래도 난 걱정되어 죽겠구먼. 아들 녀석이 군대에 갔는데 지금 북방에 있지 않나! 그놈에게 무슨 사달이 나면 안 되는데······.”
한 중년의 남자가 시름이 가득한 모습으로 막걸리를 들이켰다.
“어허. 참 자네 아들이 전방에 가 있지······. 걱정하지 말게. 전하께서 버티고 있는 한 명나라 놈들이 쉽게 쳐들어오지 못할 거네. 전쟁이 그렇게 쉽게 나는 것이 아니라네.”
“그렇겠지!”
“그렇고말고! 자 술이나 마시세. 주모 여기 막걸리 좀 더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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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명나라 사신을 너무 박대한 것이 아니 옵니까? 백성들은 대노한 명나라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고 있사옵니다.”
도승지 류성룡이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이균을 바라보았다.
류성룡도 이균의 편이긴 했지만, 여전히 중원을 지배하고 있는 패권국가 명을 명의 심기를 잘못 건드려 그들이 조선 땅을 침공해오면 아직은 그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도승지 걱정할 필요 없소. 명은 조선을 침략할 여유가 없소.”
“무슨 말씀이시온지!”
“명은 강하지가 않소. 비록 중원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나, 호시탐탐 명을 노리는 몽골, 야인에 남서 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까지 있으니. 명은 절대로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할 수 없다는 것이오!”
이균은 결코 명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할 수 없다는 계산이 섰기에 명나라 사신을 개망신 주고 이참에 명과의 관계를 끊으려 한 것이다.
“그렇사옵니까? 전하! 전하의 뜻대로만 되면 안심이오나, 서인들이 노여움이 커 그들이 무슨 짓을 할까 염려되옵니다. 벌써 전국의 유생들이 연일 상소를 올리며 전하를 비난하고 있사옵니다!”
“그렇겠지요. 그들이 천자로 받드는 명나라 사신을 그렇게 망신을 주었으니······. 이제 판을 새로 짤 준비를 해야겠소. 세상 물정을 모르며 유교 경전만 외우는 그들은 더는 필요치 않아요!”
이균이 소주가 가득한 잔을 단숨에 비운 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전하!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들도 만만한 자들이 아니옵니다!”
“암. 그럼이요. 만만의 준비를 해야지요. 명은 여전히 장거정의 손아귀에 있지요?”
“그렇다고 들었사옵니다. 보위에 오른 황제가 아직 어리기에.”
“장거정만 손보면 명의 운명도 끝나겠구려!”
이균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류성룡의 잔에 소주를 가득 부어주었다.
“전하! 그것이 어인 말씀이온지!”
고개를 숙여 두 손으로 왕이 따라주는 어주를 받은 류성룡이 놀란 눈을 하고 이균을 바라보았다.
“하하하!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이 아니겠소.”
이균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깨트리고 구중궁궐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