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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군주 선조대왕 일대기-35화 (35/202)

35화 문전박대 당한 명나라 사신(1)

“흐음. 전······. 하께서는 다른 용무가 있으셔서······.”

주지번이 조선의 왕이 자신을 마중 나오자 않은 것에 대해 역정을 내자, 이 우의정 노수신은 안절부절못하지 못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무엇이라! 황상폐하께서 조선 왕이 직접 나와 사신을 영접하라는 황명을 내렸거늘······.”

장거정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조선의 왕이 영은문에 나와 직접 명나라 사신을 영접해 황상 폐하의 칙서를 받으라는 명을 내렸음에도, 조선왕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주지번의 심기는 몹시 불편했다.

“용서하옵소서! 전하께서도 몸소 나와 황상 폐하의 칙서를 기쁜 마음으로 받으려 하였으나, 갑자기 고뿔이 생겨 그리되시온 것이옵니다.”

명나라 사신이 역정을 내자 호조판서 윤두수가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화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윤두수가 왕이 고뿔에 걸렸다고 변명하였으나, 이균은 영은문까지 나가 명나라 사신을 영접할 의사가 애초에 없었다.

명나라 사신 따위를 한나라의 지존인 자신이 영접한다는 것 자체가 치욕스러운 일이라 여겼다.

“날이 춥습니다. 몸이라도 상할까 염려되오니 어서 모화관으로 드시옵소서!”

명나라 사신이 계속 역정을 내자, 사신을 마중 나온 서인들은 억지로 그를 사신을 영접하는 모화관으로 이끌려 했고, 주지번은 그제야 마지못해 가는 척하며 서인들의 손에 이끌려 모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주지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모화관 안으로 들어서자 조선에서 제일가는 미모를 뽐내는 기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생긋생긋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여릿여릿하고 분내음을 풍기는 꽃과 같은 기생들이 자신을 반겨주자 주지번은 언제 심기가 불편했느냐는 듯 구겨진 인상을 활짝 피며 자리에 앉았다.

주지번의 노여움이 가라앉자, 심의겸이 직접 소주가 담긴 술병을 들어 주지번의 잔을 채워주었다.

“조선 왕이 직접 영접을 나오지 않은 것은 심히 불쾌하오만, 그대들이 이렇게 극진히 대접하니 이만 노여움을 거두겠소.”

주지번은 심의겸이 따라준 소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천하제일의 미색을 옆에 두고 소주를 들이켜니 쓰디쓴 소주가 달콤한 꿀과 같이 넘어갔다.

“조선의 왕이 어리라 들었는데, 왜 이렇게 황상폐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오.”

주지번이 노수신의 잔을 채워주며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 저희도 그것이 심히 염려되옵니다. 전하께서 제왕의 수업을 제대로 받지 않고 급작스레 보위를 넘겨받으셔서 그런 것인지······. 양이들하고만 어울리려 하고 대명제국을 업신여기는 짓을 하시오니.”

노수신이 혀를 끌끌 차며 자신들의 왕을 헐뜯었다.

수세에 몰린 서인들에게 명나라 사신단의 방문은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에게 대명국 사신은 천군만마와 같은 것이었다.

조선의 왕 누구도 대명제국의 뜻을 거스르는 짓을 하지 못한다고 여기던 서인과 사림들에게 대명국의 사신이 온다는 것은 그들을 도와줄 든든한 버팀목 같은 존재였다.

명나라 사신의 힘을 빌려 막무가내로 날뛰는 이균을 길들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버선발로 뛰어와 오만한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극진히 대접한 것이다.

“나이도 어린 것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군요. 조선 왕이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자라면 차라리 책봉을 하지 말았어야 하거늘!”

주지번은 혀를 끌끌 차며 소주가 가득 채워진 잔을 단숨에 비운 후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기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건네주는 고깃덩어리를 삼켰다.

“저희들도 그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듣자 하니 천자의 칙서를 가지고 오셨다고 들었는데······. 오랑캐와 가까이하고 대명국을 멀리하는 전하를 준엄하게 꾸짖어 주시옵소서!”

“마땅히 그러할 것이오. 오로지 대명국만이 생산할 수 있는 청화백자를 조선이 모방하여 파랑국에게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황상폐하는 몹시 분노하고 있소!”

이미 술이 흥건히 취한 주지번은 조정의 대신들이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술시중을 들고 있던 기생의 젖가슴을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느닷없이 나이 지긋한 명나라 사신이 젖가슴을 주무르자 기생은 흠칫 놀라 당황한 모습을 보였으나, 심의겸이 눈을 찡그리자 주지번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그의 술시중을 들었다.

“그러하고 천자께서 조선을 보살펴주고 계신데,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을 자기고 계신지 20만 대군을 양성하여 그중 병력 상당수를 명과의 국경지대에 배치하고 있사옵니다. 신은 이점 또한 심히 염려되는 것이옵니다.”

“무어라! 조선이 20만 대군을······.”

주지번은 심의겸이 입에서 20만 대군이라는 말이 나오자 너무나 놀랐는지 입에 넣었던 소주를 내뱉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하옵니다.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하께서는 무리하게 20만 대군을 양성하시니. 혈기 방자한 전하께서 도대체 그 대군의 칼날을 어디로 돌리려 하는 것인지.”

서인들은 마치 어린 임금 이균이 20만 대군을 키워 명나라라도 공격하려 한다는 듯 말을 하며 명나라가 조선의 왕을 의심하도록 부추겼다.

이들이 과연 조선이 신하인지, 아니면 명의 신하인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럼 그대들의 왕이 감히 대명국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오!”

주지번은 술잔을 내리치며 고함을 쳤다.

“어찌 전하께서 대명국을 노리겠나이까. 하지만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고 우리 조선이 대명국을 섬기고 있어 20만이라는 대군이 필요치 않음에도 백성의 고혈을 짜내 쓸모도 없는 군대를 키우고 있으니 백성이 고통이 안쓰러워 드리는 말씀입니다.”

주지번이 다시 노여워하자 노회한 재상 노수신은 다소 부드러운 어투로 그의 분노를 잠재우려 했다.

“흐음. 조선같이 작은 나라가 20만이나 되는 대군이 필요한 이유가 없지 않소. 게다가 조선은 건국 이래 큰 전란 없이 태평성대를 누려왔거늘······. 이는 필시 왕이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오. 황상폐하께서 이를 알게 되면 결단코 조선 왕을 용서치 않을 것이오!”

명나라 천자가 대군을 키워 다른 꿍꿍이가 있는 조선왕을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라 말하자, 심의겸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주지번이 명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천자께 알린다면 천자께서는 필히 이균을 제거하려 할 것이다.

천자께서 일어나시어 조선 왕을 응징하려 할 때 사림들도 함께 일어나 이를 돕는다면 마땅히 성리학의 도리를 땅에 떨어트린 변절자 이균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 심의겸을 비롯한 서인들의 생각이었다.

“얼마 되지 않으나 받으시오 소서!”

심의겸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묵직한 궤짝을 주지번에게 건넸다.

궤짝의 덮개를 열자 번쩍번쩍 빛나는 은자가 가득했다.

가득한 은자를 본 주지번은 누런 이를 활짝 드러내며 만족스러운 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무엇을 이렇게나 많이 주셨소. 내 조선을 위해 요긴하게 쓰겠소!”

은자를 두둑이 선물로 받은 주지번은 조선왕이 영접을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는 어느덧 사르르 사라지고 연신 나긋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것은 천자의 뜻을 저버린 저희 군왕의 잘못을 낱낱이 적은 서찰이옵니다. 부디 천자께 전해 주시옵소서!”

심의겸이 떨리는 손으로 가슴 깊이 숨겨 놓은 서찰을 꺼내 주지번에게 건넸다.

“걱정하지 마시오. 황상 폐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그자가 왕이건 어떻건 온전하지 못할 것이오!”

주지번이 서찰을 천자께 전하겠다고 약조하자, 노수신을 비롯한 서인들은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인들로부터 두둑한 은자와 조선 제일의 미색을 자랑하는 기생의 수청을 받은 주지번은 모화관에서 며칠간 머무르며 회포를 푼 후 이균이 있는 경복궁으로 향했다.

****

형형색색의 화려한 복장을 한 조선군 의장대가 명나라 사신을 맞이했다.

-탕! 탕! 탕!-

의장대는 장전한 조총을 하늘을 향해 발포했고, 잠시 후 6문의 홍이포가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공포를 쏘았다.

그리고 주지번이 데리고 온 명나라 군 1,000여 명을 압도하는 최정예 친위부대 응양군 소속 갑사 4,000여 명이 오와 열을 맞추어 일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방패와 환도로 무장한 팽배수가 우렁찬 함성과 함께 행렬의 가장 앞에서 나아가고 있었고 그다음으로 조총으로 무장한 조총수, 기다란 장창과 갑주를 입은 창수, 조선을 대표하는 국궁을 든 사수, 장검으로 적을 단숨에 도륙해버리는 단병접전의 최강자 도수, 그리고 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기마대가 뒤를 이어 나아갔다.

조선 최정예 응양군 갑사들의 터져 나오는 함성과 조총 그리고 지축을 흔드는 홍이포 소리에 주지번은 정신이 없었다.

‘조선군의 군세가 대단하구나!’

조선군은 능수능란하게 도와 창을 다루었고, 특히 조총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명나라 군도 당연히 조총을 사용하고 있으나, 여전히 주력 무기는 창이라 할 수 있어 군졸들이 조총을 잘 다루지 못하는데, 이와 달리 조선군은 조총을 주력 무기중 하나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고 조총을 빠른 시간 안에 장전해 발포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무력시위를 하기 위해 명군 1,000여 명을 데리고 온 것인데 오히려 주지번은 조선군의 살벌한 무력시위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드는 공포심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반면 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조선군의 화끈한 무력시위를 지켜보는 이균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식 쫄았구나.’

주지번이 조선군의 기세에 혼비백산한 모습을 보이자 이균은 재미있다는 듯 그를 지켜보았다.

조선군의 화끈한 무력시위가 끝나자 이균과 명나라 사신은 경복궁 안으로 향했다.

자신 앞에서 무력시위를 한 이균의 오만방자함에 주지번은 심기가 몹시 불편한지 시종일관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회포는 좀 풀었습니까?”

이균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전하께서 배려해주셔서 별 탈 없이 왔습니다!”

주지번은 여전히 불쾌한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짧게 말하고 녹차 잔을 비웠다.

“하하하. 다행이구려. 명나라의 차는 과연 일품입니다. 조선에서도 어서 빨리 명나라 못지않은 차를 키워야 할 터인데······.”

그러나 이균은 그의 불편한 심기를 모른 채 하며 뜬금없이 차 이야기를 하며 화재를 돌리려 했으나, 굳어진 주지번의 인상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전하! 황상폐하께서 우리 사신단을 직접 영접하라는 황명을 내리셨는데, 어찌 황명을 따르지 않은 것이옵니까?”

“하하 아차 그런 황명이 있었지요. 내가 요즘 건망증이 심해서······.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오!”

이균이 비아냥거리며 말장난을 하자, 주지번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전하! 그것을 말씀이라 하시는 겁니까? 황상의 황명은 지엄한 것이거늘. 어찌 따르지 않는 것이옵니까!”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주지번은 마치 아랫사람을 꾸짖듯 이균을 나무랐다.

“흐음. 일개 사신을 왕이 직접 영접하는 것이 옳은 황명 같지는 않소. 내 애초에 그런 부당한 황명은 따를 생각이 없었소!”

이균도 화가 나기는 매한가지였으나 가능한 자제하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전하! 황명은 반드시 따라야 하옵니다. 앞으로 유념해 주옵소서! 여기 황상 폐하의 칙서를 전해드리니 예를 갖추어 받으시옵소서!”

주지번도 화를 삭이며 만력제의 칙서를 이균에게 전했고, 어찌 되었던 조선이 명나라를 여전히 상국으로 받들고 있기에 이균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칙서를 받아 천천히 읽어 나갔다.

그런데 칙서를 읽어 나가던 이균의 낯빛이 붉어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무엇이라! 명나라에 2,000명의 궁녀를 받치고 청화백자를 만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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