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성균관 대신 왕립대학(2)
“그렇소. 조선이 비록 쇄국정책을 벗어던지고 많은 나라들과 교류를 하고 있으나, 조선은 여전히 어두운 곳이 많소. 그대가 조선의 백성들에게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과 그대가 알고 있는 지식을 알려 주시오.”
“전하! 뜻밖의 말씀을 하셔서 제가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마테오 리치는 여전히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본래 천문, 지리, 과학 등에 관심이 많고 지식도 많았기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해보고 싶은 터여서 선조의 뜻밖의 제안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대가 신앙심도 깊지만, 천문학, 지리 등 학문의 깊이가 크다 들었소. 그대가 조선이 세상을 향해 눈을 뜨도록 도와주었으면 하오!”
이균은 여전히 교조적인 성리학을 근거로 명이나 떠받들고 있는 사림들을 견제하기 위해 천주교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유일신을 믿는 천주교 또한 교조적일 수 있고 다른 종교나 문화에 대해 배타적 성격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들을 통해 서구의 문물과 학문을 보다 빠르게 흡수할 수 있기에 천주교를 택한 것이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겠나이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마테오 리치는 결국 이균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대가 짐의 뜻을 따르니 기쁘기 그지없소.”
마테오 리치가 그의 뜻에 따라 대학을 설립하겠다고 하자, 이균은 만족스러운 듯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전하의 부탁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나이까!”
“흐음. 마침 한강 서쪽에 대학으로 쓸만한 꽤 넓은 부지가 있소. 대학은 그곳에 지었으면 좋겠구려. 그리고 대학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비용은 모두 왕실에서 지원할 터이니 돈 걱정은 하지 말고 필요한 것은 모두 요청하시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왕실에서 아낌없이 재정을 지원하겠다고 하자, 마테오 리치는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현했다.
“흐음. 한강 서쪽에 대학을 짓기로 했으니, 대학 이름은 왕립 서강 대학이라 하면 어떻겠소?”
“그리하겠습니다!”
“하하하! 어서 빨리 왕립 대학에서 조선을 이끌어갈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면 좋겠구려!”
“전하!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이균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이균은 유림의 근거지이자 인재 양성소 역할을 해왔던 성균관을 대신해 왕립 서강 대학이 조선의 새로운 인재 양성소가 되기를 원했다.
“흐음. 그리고 한 가지 더 청이 있소.”
이균이 녹차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마테오 리치를 바라보았다.
“청이라 하시면?”
마테오 리치는 조선의 왕이 또 무슨 청을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균을 바라보았다.
“청화 백자 덕분에 왕실의 재정이 점점 커지고 있소. 이제 재정을 좀 더 체계적으로 관리를 해야 하는데······. 조선의 관리들은 아직 재물을 다루는 능력이 미숙하오. 그대가 재물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자를 추천을 해주었으면 좋겠구려!”
이균은 청화백자와 막사발 덕분에 왕실으로 돈이 몰려들자, 이제 그 재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즉 일종의 국부펀드 같은 것을 조성해 재정을 더욱 풍족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천주를 섬기다 보니 재물을 비록 잘 알지 못하나, 수소문해보면 적합한 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흐음. 고맙소! 그대가 조선에 와 이렇게 조선을 위해 애써 주니 든든하구려! 내 그대를 위해 명례방(명동) 쪽에 큰 성당을 지어줄까 하오! 그곳에서 그대의 뜻을 펼쳐보도록 하시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마테오 리치는 감격스러운지 얼굴이 무척 상기되어 성은이 망극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먼 길 오느라 고단할 터이니,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오!”
이균이 물러가라 하자, 마테오 리치는 머리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섰다.
‘듣던 대로 조선의 왕은 야심이 가득 한자로구나!’
마테오 리치는 왕이 야심이 가득한 자라는 구스타프의 말이 떠올랐다.
구스타프의 말처럼 왕은 어렸으나, 가슴 속에 꿈틀거리는 큰 야심을 품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왕이 도성에 커다란 성당과 대학까지 지어주겠다고 약조했으니, 그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였다.
이균은 직접 어명을 내려 마테오 리치에게 약속한 왕립 대학을 짓도록 했다.
어명이 떨어지자, 마포 인근을 대학 부지로 정하고 대학 건설을 위한 공사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왕립 대학은 유럽식 건물과 기와집이 함께 어우러질 예정이었기에, 한쪽에서는 우람한 목재와 기와를 이용해 웅장한 기와집을 한쪽에서는 유럽에서 들여온 대리석과 벽돌 등으로 이국적인 서양식 건물을 만들고 있었다.
대학을 맡아달라는 이균의 부탁을 받아들인 마테오 리치는 즉시 예수회에 연통을 넣어 이 사실을 알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예수회 소속 사제들을 요청했다.
천주교 신부들은 당시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라틴어 등 언어는 물론, 천문, 지리, 과학 등에 정통했기에 조선의 학생들에게 서구의 지식을 가르치기에 천주교 신부만큼 적격인 자가 없었다.
이균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예수회 소속 신부인 마테오 리치에게 대학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한편 지금의 명동 지역에서 이균이 약속한 웅장한 성당이 들어서고 있었다.
유럽에서 온 기술자들은 한참을 우러러보아야 보일 것 같은 커다란 첨탑,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형상을 딴 모자이크를 수놓고 있었다.
성당이 완공되면 도성의 큰 볼거리가 될 것이다.
이미 도성에 성당이 몇 개 있으나, 명동에 들어서는 성당은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거대한 규모로 유럽의 그 어느 성당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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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왕립 대학이 완공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이균은 우선 아름답기로 유명한 창덕궁을 임시 대학 건물로 내어주어 사대부들과 백성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이보게 한음. 같이 가자고!”
멀리서 이덕형이 서책을 가득 들고 창덕궁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본 이항복이 헐레벌떡 달려 와 이덕형의 어깨를 툭 쳤다.
“필운이 아니오! 하하하. 어서 수업 들으러 갑시다. 첫 수업부터 지각하게 생겼구려!”
이덕형도 바로 둘도 없는 절친 이항복을 알아보고 반가운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과거시험 초시 시험장에서 만나 둘이 뜻이 맞는 것을 확인하고 이항복이 나이가 5살이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절친이 되었다.
나이 차이는 그들이 절친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세상을 살아가며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나는 것은 어려운 것이기에 그들은 나이 차이를 뒤로하고 둘도 없는 절친이 될 수 있었고, 그들은 24시간이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서로 붙어 다니며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은 복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란히 초시에 합격한 그들은 본래 성균관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초시에 합격한 이들은 모두 왕립 서강대학에 입교하라는 어명이 떨어져 이렇게 창덕궁에 임시로 문을 연 왕립 서강대학에 처음으로 수업을 들으러 오는 것이었다.
“필운. 갑자기 성균관 대신 왕립 대학에 입교하라니 어리둥절하구려!”
이덕형은 갑자기 성균관 대신 처음 들어보는 대학이라는 곳을 들어가라 하니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성균관에 들어가 복시를 준비하려 했던 이덕형이었는데 뜬금없이 대학에 들어가라 하니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하하. 고리타분한 유학은 이제 배우지 말고, 새로운 학문을 배우라는 전하의 뜻이 아니겠나. 듣자 하니 과거시험에도 이제 유학의 비중이 줄어들고 서학의 비중이 엄청나게 커진다는구먼!”
이항복이 뭘 그렇게 당연한 것을 물어보느냐는 듯 이덕형의 어깨를 다시 툭 치며 빙그레 웃었다.
“필운! 그것이 사실이오. 참으로 잘 되었구려. 그렇지 않아도 과거 시험 때문에 유교 경전은 보고 있지만 지루해서 죽을 맛이었는데······.”
“아. 그렇고말고. 세상이 뒤바뀌고 있는데 아직도 공자 왈······. 맹자왈 이니······. 전하께서 아주 잘하신 결정인계야. 자네도 서애 선생이 쓴 서방견문록을 읽어보지 않았는가? 세상이 그렇게 넓고 많은 사람들이 사는지는 처음 알았구만. 그리고 지구가 평평한 것이 아니라 둥글다고 하지 않나······.”
“필운! 나도 그 서책은 백번도 더 읽었소. 그 책을 볼 때마다 범선을 타고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싶더구려!”
류성룡이 마카오를 견학한 후 마카오 총독에게서 들은 이야기나 여러 가지 서학 관련 서적을 참조해 쓴 서방견문록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조선의 수많은 젊은 인재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 놓은 지 오래였다.
미지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세계 일주에 성공한 마젤란 등 수많은 탐험가들의 이야기부터 신대륙에 발견된 은광 등 진귀한 물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막대한 부를 챙기며 거대한 해양제국을 건설한 포르투갈, 스페인 제국 등의 이야기 등 서방견문록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엮어 놓았기에 그동안 성리학 경전만 읽던 조선 젊은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서방견문록은 언문으로도 출판되어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즐겨 읽는 필독서가 되었고, 조선의 젊은이들은 서방견문록을 통해 그들도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고 싶다는 욕망을 키워 나갔다.
“이러다 정말 늦겠구먼. 어서 수업 들으러 가세!”
“아······. 그러세. 첫날부터 교수님한테 찍히면 안 되지.”
수업 시작을 알리는 커다란 종소리가 창덕궁에 울려 퍼지자, 이항복과 이덕형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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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
창과 조총 그리고 환도로 무장한 천여 명의 정예군의 호위를 받으며 한 중년의 남자가 거만한 자세로 말에 올라타 영은문이라 적혀 있는 커다란 문을 통과했다.
그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었다.
조선이 청화백자를 천자의 나라인 명의 허락도 없이 저가에 팔아 명의 재정을 어지럽히자, 명 조정의 실력자 장거정은 사신을 급파해 세상 물정을 모르고 날뛰는 어린 왕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고자 했다.
장거정은 조선이 함부로 미쳐 날뛰면 무력으로 응징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례적으로 명나라 북경을 방어하는 정예병력 1,000명이 사신과 함께 가 무력시위를 하도록 했다.
조선으로 향하기 전 장거정을 직접 만나 조선이 더는 청화백자를 생산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특별한 지시를 받은 주지번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조선에 온 것이다.
“이곳이 조선의 도성인가?”
주지번이 한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했다.
“그렇사옵니다. 이제 조선의 도성이옵니다.”
“조선이 어느새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약 10여 년 전 명종 시대에도 조선에 사신으로 온 적이 있던 그는 도성 곳곳에 서구식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조선의 도성은 비루하기 그지없어 보였는데, 어느새 화려한 건물이 들어서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어서 오시옵소서! 천자께서 이렇게 사신을 보내주시니······. 감계 무량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사림의 거두 우의정 노수신, 이조판서 심의겸을 비롯한 서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명나라 사신을 맞이했다.
조선의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를 맞이했지만, 주지번은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말 위에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던 주지번은 그가 찾는 누군가가 끝내 보이지 않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찌 조선의 왕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