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변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림(3)
“흐음. 그렇소? 모든 것이 부덕한 나의 소치요.”
그러나 이균은 생각보다 침착한 모습을 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유희춘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학문의 깊이가 그토록 깊으니 내 자못 궁금한 것을 몇 가지 물어보리다!”
유희춘은 순간 화를 억누르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대가 말하기를 사물에는 반드시 이치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얼음이 차가워지면서 녹아 연기처럼 증기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오?”
이균은 과학 시간에서나 물어봄 직한 뜻밖의 질문을 하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하! 그것을 이 시간에 왜 여쭤보는지······.”
“지금 사물에는 몸든 것이 이치가 있다는 격물치지를 강연하는 것이 아니요? 그대의 강연을 듣다 보니 궁금증이 생겨서 그런 것이오!”
“전······.전하! 신이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음양이 서로 조화하려 그러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음양이 뭐 어쩌고저쩌고······. 헛소리 하고 자빠졌네.’
이균은 음양의 조화나 어쩌고 떠드는 유희춘을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흐음. 그래요? 그럼 여러 개의 얼음 덩어리가 합쳐져 하나가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왜 그런 것이요?”
그러나 유희춘은 엉뚱한 질문만 하는 이균이 왜 저러는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왕이 물으니 이를 무시할 수 없는 노릇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전하 그것은 서로 같은 기가 하나가 되려 하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저런 한심한······.’
유희춘의 뜬구름 잡는 얘기에 이균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흐음. 그럼 땅은 끝나는 것이 있소? 하늘은 어떻소?
“전하 땅은 한계가 있겠지만, 사람들이 끝까지 가본 적이 없기에 알기 어렵나이다. 그리고 하늘 밖은 공자께서도 감히 논하지 못한 것이옵니다.”
“그럼 땅 밑에는 물이 있소?”
이균은 끝이 없이 질문 공세를 펼쳤다.
“전하 물은 땅 위에 나는 것이옵니다. 어찌 땅 밑에 물이 있겠나이까. 이는 자연의 이치에 거스르는 것입니다.”
‘한심하구나! 저런 자들을 대신이라 믿고 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인가!’
계속 동문서답을 하는 유희춘에 이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대들이 오랑캐라 부르는 양이들이 새로운 땅을 발견한 것은 알고 있소? 그리고 그들이 커다란 배를 이끌고 세계 일주를 마친 것은 알고 있는 것이오? 그리고 천체가 둥글다는 것은 알고 있는 것이오! 어찌 세상이 이토록 급변하고 있는데 그대들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이오. 세상 물정을 모르고 뜬구름 잡는 얘기나 하는 경연장에서 내가 무엇을 배우라는 것이오!”
마침내 이균이 폭발했다.
그는 역정을 내며 유희춘과 경연장이 모여 있는 대신들을 나무랐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1492년이고 그 이후로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마치고, 포르투갈이 명의 마카오를 점령하여 동아시아 무역과 향신료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거대한 해양제국이 되었으며, 일본 막부조차 그들과 교류하며 급변하는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음에도 오로지 조선만 문을 걸어 잠근 채 공자가 어떻고 맹자가 어떻고 하며 뜬구름 잡는 말만 하고 있으니 이균은 절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균이 역정을 내자 경연장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경연장에 있는 이들은 모두 성리학 근본주의자들이기에 성리학을 쓸모없는 학문 취급하는 이단스러운 이균의 발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군자의 도리를 배우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유희춘은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는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군자의 도리라 하였소? 그대들의 말하는 군자의 도리가 도대체 무엇이오?
그대들이 말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부국강병과 국리민복을 이룰 수 있겠소!“
이균은 경직되고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념만을 찾는 도학을 부르짖는 근본주의자들을 꾸짖었다.
“전하! 어찌 그런 불경스러운 말씀을 하시나이까. 유학은 조선 창건 이래 나리의 국시이옵니다. 부디 학문에 정진하소서!”
“부디 학문에 정진하소서!”
경연에 참여한 대신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이균을 바라보며 눈물로 하소연했다.
그러나 이균은 그들의 말을 더는 듣기 싫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그대들은 겉으로는 청렴결백을 외치고, 군자의 도리를 외치면서, 실상은 공리공담을 일삼고 붕당이나 만들며 벼슬자리나 탐하는 이들이 아니오.”
“전하! 부디 성군이 되옵소서!”
“조선의 국시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유희춘과 대신들은 온몸이 떨려왔다.
그들에게 이균은 조선의 근본이념인 유학을 집어 던지는 폭군 그 자체였다.
“더는 그대들에게 군자의 도리를 배울 것이 없소. 경연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서학을 배우도록 하겠소! 더는 경연에 참여하지 않겠소. 경연을 폐하시오!”
이균은 경연을 없애버리겠다는 말을 하고 경연장을 떠나 버렸다.
“전하가 미친 것이 아니요! 어찌 저런 광인의 말을······.”
유희춘은 고결한 성리학 국가 조선의 국왕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 실성한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른 대신들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교역하며 도자기를 파는 등 무역을 장려하는 등 기존의 국왕이 볼 수 없는 파격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하여도 조선을 지탱하는 근본정신인 유학을 송두리째 부정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균이 경연장에서 보인 행태는 실로 광인과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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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장을 풍비박산 낸 이균은 그를 호위하는 금군을 이끌고 사냥을 떠나버렸다.
경연장에서 있었던 더러운 기분을 사냥이라도 해서 털어내고 싶었다.
급하게 금군을 소집한 이균은 왜에서 가져온 조총으로 무장한 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달렸다.
이균을 묵묵히 지지하는 노회한 재상 이준경, 통신사를 이끌고 왜에 다녀온 박순, 그리고 도승지 율곡 등 이균의 최측근들이 사냥을 함께했고, 금군의 갑사들에게 조총 사격을 훈련시킨 신립도 동행했다.
몰이꾼들이 꽹과리 등을 두드리며 사냥감을 몰았고, 이균은 말을 달리며 궁지에 몰린 사냥감을 쫓았다.
답답한 궁궐에서 벗어나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말을 달리니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이균은 말의 고삐를 쥐고 속도를 내 달렸고, 그를 호위하는 금군들과 대신들은 그를 뒤따르기에 바빴다.
“금군이 이제 조총을 잘 다룰 수 있다 했느냐?”
이균이 신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균의 눈도장을 받은 신립은 이미 정4품직이라 할 수 있는 만호가 되어 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금군에 종사하고 있었다.
함께 무과에 급제한 동기들에 비해 그가 고속승진하자, 동기들은 그를 시샘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신립은 아랑곳하지 않고 금군에 종사하며 갑사들을 조련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적어도 금군은 왜의 조총수보다 조총을 더 잘 다룰 수 있사옵니다.”
금군에게 조총 다루는 기술을 오랫동안 훈련시킨 신립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우리 금군의 조총 실력을 보고 싶구나. 한번 조총으로 사냥을 해보도록 하거라!”
“알겠나이다!”
이균이 금군의 조총 실력을 보고 싶다고 하자, 신립은 조총으로 무장한 금군을 이끌고 몰이꾼들에 의해 구석에 몰린 토끼, 여우, 꿩 등 사냥감들을 향해 사격 준비를 했다.
신립의 명이 떨어지자 금군들은 조총을 꺼내 능수능란한 솜씨로 화약을 넣고 탄환을 총구에 장전한 후 심지에 불을 붙이고 사냥감을 겨누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레와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탄환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 사냥감들을 명중시켰고, 토끼, 여우 등 사냥감들은 급소를 맞은 듯 그 자리에서 피식 쓰러져버렸다.
“흐음. 대단하구나!”
금군들이 조총을 신속히 장전해 토끼, 여우 등을 명중시키는 것을 직접 본 이균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신립의 호언장담처럼 금군들은 조총을 자기 몸의 일부인 것처럼 자유롭게 다루었다.
이균뿐만 아니라 이준경, 박순, 율곡 등도 금군들의 화려한 사격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하! 금군들의 조총 다루는 솜씨가 마치 귀신과 같사옵니다!”
“하하하. 그러합니다. 신립과 금군들에게 포상을 넉넉히 해야겠소!”
“그리하시옵소서! 금군이 목숨을 바쳐 전하를 보필할 것이옵니다.”
경연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사냥을 나온 이균은 울적한 기분을 풀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사냥을 핑계로 금군의 조총 사격술이 얼마나 일취월장했는지를 직접 보고 싶은 의도도 다분히 있었다.
직접 확인한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자. 짐도 조총을 한번 쏴보고 싶구려. 총을 한번 주어 보시오!”
이균이 명을 내리자 신립이 금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금군은 재빠르게 조총을 장전하고 심지에 불을 붙인 후 말 위에 올라타 있는 이균에게 건넸다.
조총을 건네받은 이균은 몰이꾼들에게 몰려 겁에 잔뜩 질려 달아나는 노루를 겨냥했고, 잠시 후 번쩍이는 섬광과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탄환이 발사되어 노루의 심장을 그대로 맞추었다.
탄환에 급소를 맞은 노루는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전하! 명중이옵니다!”
이균이 조총으로 노루의 급소를 정확히 맞추자 이를 지켜보던 대신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맛에 사냥하는구나!’
자신의 쏜 총을 맞고 노루가 쓰러지자 이균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이균은 조총을 다시 금군에게 돌려준 후 이번에는 활을 들고 대신들과 함께 천천히 말을 타며 이동했다.
“전하! 경연장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경연장에서 일어난 일을 잘 알고 있는 율곡이 조심스럽게 이균을 바라보며 말했다.
“흐음. 내 경연을 폐하라 명했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하는 경연은 쓸모없는 짓이오!”
“전하! 그렇게 되면 사림들이 가만두고 보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가뜩이나 왜, 남만국 등 오랑캐와 교류한다며 불만이 가득한 자들인데, 그들이 어떤 작당을 할지······.적당히 달래주옵소서!”
율곡은 아직 조선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을 받드는 사림들이 무슨 짓을 할지 염려되었다.
그들은 교조적 성향의 성리학 근본주의자들이기에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이 이단으로 낙인 찍은 자는 적이 되는 것이고, 아무리 왕이라 해도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군주의 도리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응징하려 할 것이다.
사람의 그러한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율곡은 이균이 사림의 공공의 적이 되어 해를 당하지 않을까 그것이 두려웠다.
“전하! 그리하시옵소서. 너무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옵니다. 때로는 허리를 굽혀 때를 기다릴 줄도 아셔야 하옵니다!”
이준경도 젊은 날의 혈기를 믿고 지나치게 앞서나가는 이균이 사림의 노여움을 살까 걱정되었다.
“내 그대들이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소. 흐음. 말이 나온 김에 율곡 그대가 이제 병권을 잡아보는 것이 어떻겠소?”
이균이 갑자기 병권을 잡아보라 하자 율곡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균을 바라보았다.
“흐음. 그대가 병조판서를 맡아 주시오. 그래서 사림들의 준동도 감시하고 또 나약해 빠진 조선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데 힘을 쏟아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