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변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림(2)
“허허. 그대는 말을 삼가시오. 그대의 울분을 알겠으나, 어찌 신하된 자로서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는 것이오!”
심의겸의 입에서 역성혁명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우의정 노수신은 그를 자중하도록 했다.
“대감!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왕이 정도를 가지 않으면 그 왕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혈기 방자한 젊은 유생들은 심의겸의 말에 동조하며 이균을 왕위에서 내려야 한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유생들에게 이균은 오랑캐와 다를 것이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사서삼경을 외우며 주자학을 배운 그들은 성리학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균을 그들의 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허! 그대들의 억눌린 마음을 알고 있소. 하지만 지금 역성혁명을 논할 때는 아니오! 좀 더 지켜봅시다. 우선! 조선 팔도의 유생들과 사림들을 규합해 상소를 올리도록 하시지요!”
유생들마저 격앙된 반응을 보이자, 노수신은 그들을 진정시키며 우선 상소를 제기해 왕을 견제하자는 반응을 보였다.
“대감! 상소 가지고 되겠습니까? 지금 강화도에는 양놈들이 믿는 요상한 종교가 들어와 백성들을 혹세무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상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들의 예배당까지 지어주신다니······. 허허 참!”
기대승도 천주교 성당까지 나라의 돈으로 지어준 이균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렇습니다. 이교도까지 들여온 주상은 우리들의 왕이 아닙니다!”
기대승이 말하자, 유생들도 호응하며 더욱 불만을 표출했다.
“허허! 기다리시오. 그대들의 분노는 이해가 가나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어야 하는 것이오. 지금은 조정에 우리의 뜻을 전하께 전할 수 있는 우리 세력을 심어 놓는 것이 중요하오. 그러기 위해서는 인사권을 행사하는 이조 전랑을 우리 사람으로 심어 놓아야 하오! 알겠소! 그리고 그다음 행동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오!”
그도 지금 당장에라도 왕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정치 경험이 많은 노쇠한 대신 노수신은 지금은 자신들이 일어서야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지금과 같은 교조적인 성리학 중심이 아니라 제법 융통성이 있는 한당의 유학이었으나, 이균의 왕이 될 무렵 조선은 송나라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 중심 국가가 되어 있었다.
주자학은 교조적이며 융통성이 없었다.
그런 성리학이 뼛속까지 자리 잡은 사림들은 이균이 추구하는 조선의 변혁을 인정할 수 없었다.
조선은 이균의 개혁, 개방을 지지하는 세력과 이균의 개혁을 성리학을 배신한 이단으로 규정짓는 세력의 붕당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이 아니라 개혁파와 성리학 근본주의자의 붕당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다.
격앙되었던 젊은 유생들을 돌려보낸 후, 노수신은 홀로 남아 독한 소주를 비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명종의 뒤를 이어 어린 이균이 왕위에 오를 때만 해도 사림과 유생들은 이균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다.
문정왕후와 소인배들에 의한 폭정의 시대가 가고 그야말로 군자들이 통치하는 성리학 국가 조선이 되어 이균이 내성외왕이라는 유학의 이상적 군주가 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이균은 왕이 되자마자 해적질이나 하는 왜놈들에게 도자기를 팔고 요상한 모양을 한 서역인들과 교류하며 성리학을 탄압하니, 유생과 사람들의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 전하는 이단이나 하는 짓을 하고 있어. 하지만······.’
노수신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하지만 지금 당장 뾰족한 방법이 없는 그는 한숨만 내쉬며 소주잔을 연거푸 비웠고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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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도록 비추어 오는 뜨거운 햇살에 이균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떴다.
오래간만에 늦잠을 푹 잤더니 몸이 아주 개운했다.
졸지에 팔자에 없는 조선의 왕이 되어보니 왕이라는 직업도 여간 고달픈 것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왕대비께 문안 인사드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경연에 학문 수업, 끝도 없이 밀려드는 상소문 등 서류 검토, 대신들과 크고 작은 정사 논의까지 밤늦도록 쉴 틈이 없었다.
왜 장수하는 조선의 왕들이 별로 없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균은 FM대로 빠듯한 일정을 소화했다가는 탈이 날 수 있다고 여기고 몸이 영 피곤하면 일정에 신경 쓰지 않고 늦잠을 자 버렸다.
왕이 늦잠을 자느냐 경연에도 나오지 않고 과외수업에도 참여하지 않자 대간에서는 어린 왕이 제왕 수업을 게을리 하고 정도의 길을 걷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이균은 쓸데없이 입바른 소리만 하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대간이고 뭐고 사사건건 왕이 하는 일에 태클을 거는 그들이 짜증 날 지경이었다.
어찌 나라를 창건한 태조께서 왕이 하는 모든 일에 태클을 거는 어이없는 제도를 만든 것인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재상정치를 꿈꾸었던 정도전이 만든 시스템이겠지만 말이다.
폭군이 되어버린 연산군이 이해가 될 정도로 왕이 하는 일에 이것저것 참견하는 대신들을 보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할 뻔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하 도승지 입시이옵니다.”
오랜만에 늦잠을 잔 이균이 머뭇거리는 사이 내관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도승지 율곡이 왔음을 알렸다.
이균은 그제야 의관을 갖추어 입었다.
“들라 하여라!”
이균이 들라 하자 율곡이 들어와 왕에게 예를 갖추었다.
“어서 좌정하시오!”
이균은 몽롱한 정신을 깨우려는지 깊게 우려낸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 무슨 일이오?”
“전하 드디어 조총을 우리 손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옵니다!”
“음. 드디어 성공했구려. 참으로 장한 일이오. 이제 우리 군사들도 조총으로 무장할 수 있겠구려!”
예상보다는 꽤 오래 걸렸지만, 조선의 기술자들이 조총을 개발했다는 희소식을 들은 이균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갑사들은 이제 조총을 잘 다룰 수 있소?”
“신립이 갑사들을 잘 조련한 것 같습니다. 조총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다 하옵니다.”
“흐음. 그래요! 하하하 갑사들이 조총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 한번 봐야겠군요. 조총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조속히 군사들을 조총으로 무장시키라 하시오!”
“알겠나이다. 전하!”
이균은 조선이 자체 개발에 성공한 조총을 보급해 왜 못지않은 조총부대를 만들고자 했다.
중원을 지배하고 있는 명나라도 조총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체계화 한 것은 아니기에 잘 훈련된 조총 부대와 포병전력을 조화시키면 동아시아에서 제법 괜찮은 전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 이균의 생각이었다.
“그래 도자기가 잘 팔리고 있다고요?”
“도공들이 불철주야 도자기를 만들고 있으나 남만국 상인들의 요구를 따라가지 못하는 지경이라 하옵니다.”
“허허! 그래요! 도공들과 화원들이 정신이 없겠군요!”
그의 생각처럼 청화백자가 불티나가 팔려나가자 이균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왕이 될 때만 해도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던 왕실의 재정은 청화백자와 막사발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며 제법 든든해졌다.
“전하! 도공과 화원들을 더 확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소. 도공과 화원을 양성할 수 있는 학당을 만듭시다. 그리고 그들을 후하게 대접해야 할 것이오.”
“알겠나이다!”
도공과 화원이 부족할 정도로 청화백자에 대한 수요가 늘자, 이균은 그들을 양성할 수 있는 전문학교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균의 어명에 따라 도성과 전국 8도에 도공과 화원을 양성할 수 있는 전문학당이 생겨났다.
도성에서는 직접 왕실이 학당을 만들어 A급 도공과 화원을 양성할 수 있도록 했고, 도성에 있는 왕실 학당은 그 경쟁이 치열했다.
그리고 조선 팔도 곳곳에도 학당이 만들어졌고 그곳에도 지원하는 이들이 줄을 설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더는 도공이 천대받는 직업이 아닌 꽤 큰돈을 벌 수 있는 인기 직업이 되어 있었다.
도공으로 성공하면 사대부 부럽지 않은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전하! 하오나 요즘 사람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전하께서 남만국과 교류하며 상업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쓰신 이후부터 사림들은 전하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사옵니다. 사림들을 달래시옵소서!”
율곡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균에게 청했다.
그도 한때는 성리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했기에, 사림들이 지금 하성군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림들의 쌓여가는 불만을 해결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원치 않는 큰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들은 아직도 세상 물정을 모르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하오.”
이균은 율곡의 입에서 사림이라는 말이 나오자 빈정이 상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그들을 내치고 싶었으나, 어찌 되었건 그들이 조선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쉽게 제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하! 요즘 경연에도 잘 참여하지 않는다며 대간이 상소를 올리고 있습니다. 경연이라도 참여하시어 사림들의 불만을 잠재우소서!”
“참나. 알겠소. 내 그리하리다. 그건 그렇고 이참에 과거에 붙은 자들과 성균관 유생들을 마카오에 연수를 보내도록 해야겠소. 그들이 천자의 나라로 받드는 명나라조차 서양인들과 교류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사림들의 시선도 바뀔 것이오.”
“전하! 현명하신 생각이옵니다. 젊은 유생들이 마카오의 현실을 보면 그들의 생각도 달라질 것이옵니다.”
“류성룡, 이산해 등도 함께 보내도록 하시오. 듣자 하니 이들이 꽤 똘똘하다 하더군요.”
“알겠습니다. 전하!”
****
이균이 오래간만에 경연장에 나타났다.
경연장에 나타난 이균의 모습을 본 사림들은 그가 반가우면서도 성리학을 외면하는 이균에 화가 났다.
경연장에는 홍문관의 유희춘, 유도, 특진관 정용영, 박응남 등이 입시 해있었다.
어찌 되었던 그들의 왕이 입시 하자 그들은 예를 갖추었다.
이균은 논어를 다 마치고 맹자 강의를 대학에 관한 해설서인 대학혹문 강의를 듣다가 경연을 참여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변 경연은 유희춘이 담당했다.
유희춘은 1538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으나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돼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이균의 즉위와 함께 풀려난 뒤 홍문관으로 돌아와 경연에서 대학 등에 대해 강론을 맡은 인물로 그의 집안도 대표적인 사림 집안이었다.
“전하! 이리 경연에 참여하시니 감계가 무량합니다. 앞으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마옵소서!”
“자! 알겠소! 어서 경연을 시작하시오!”
그러나 이균은 귀찮다는 듯이 건성건성 대답하고 경연을 재촉했다.
고리타분한 경연을 빨리 끝내고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균이 경연을 재촉하자 유희춘은 대학혹문 중에 격물치지 부분을 열변을 토하며 강연했다.
그러나 이균은 강연에 영 흥미가 없는 듯 하품을 하며 서책을 건성건성 넘기고 있었다.
그러자 유희춘이 강연을 멈추고 이균을 바라보았다.
“전하! 성군이 되시려면 먼저 유학의 도리를 익히셔야 합니다. 지금은 다행히 외침이 없어 지금이야말로 전하께서 학문에 정진해야 할 것인데, 이리 딴청을 피우시니 어찌 군자가 될 수 있겠나이까?”
경연에 통 흥미를 보이지 않고 이균이 계속 딴청을 피우자 유희춘은 이를 참지 못하고 이균을 마치 자식을 대하듯 나무랐다.
아무리 어린 임금이라 하여도 신하가 임금에게 큰소리를 치니 경연장의 분위기는 순간 싸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