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변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림(1)
“그렇사옵니다. 폐하. 조선의 국왕이 폐하께 꼭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구스타프가 공손한 모습으로 세바스티앙 1세에게 조선 국앙 이균이 보낸 친서를 전달했다.
세바스티앙 1세는 구스타프가 전달한 이균의 친서를 받아 들고 천천히 읽어 나갔다.
“조선이 명나라 못지않은 청화백자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조선은 명나라의 그것을 능가하는 자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명나라에서나 만들 수 있는 청화백자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자, 세바스티앙 1세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구스타프를 바라보았다.
“청화백자는 명나라에서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소?”
세바스티앙 1세도 그들이 수입해 비싸게 팔고 있는 청화백자는 명나라에서나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에서 청화백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하니 흥미로우면서도 다른 한편 구스타프의 말이 허풍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폐하! 조선의 도공들은 분명 뛰어난 청화백자를 만들 능력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흐음. 조선이라! 조선이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요?”
“조선은 명나라 옆에 있는 반도국으로 명나라에게 조공을 바치고 있는 작은 속국이옵니다.”
“명나라의 속국이라! 하하하. 그럼 조선도 명나라 일부가 아니오?”
구스타프가 조선이 명나라의 속국이라 말하자 세바스티앙 1세는 조선이 명나라의 일부라 여겼고, 그렇다면 조선이 만든 청화백자도 결국 명나라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
“폐하! 비록 조선의 왕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아야 하며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으나,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전히 명나라의 일부라 할 수 없사옵니다.”
“흐음. 그렇소? 그대가 이번에 조선에서 가지고 온 청화백자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는 것이 사실이오?”
“그렇사옵니다. 폐하! 조선의 청화백자가 모두 완판 되었습니다. 조선의 국왕께서 명나라의 것보다 싸게 청화백자 공급을 약조하였습니다. 조선의 청화백자를 가져오면 보다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사옵니다.”
구스타프가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소? 하지만, 조선과 교역을 했다가 명나라가 우리에게 청화백자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소?”
세바스티앙 1세도 조선과의 교역에 흥미가 있었으나, 자칫 잘못했다가 청화백자를 가장 많이 공급하는 루트인 명나라를 잃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다.
“폐하! 동아시아 무역로는 저희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명나라는 저희가 아니면 청화백자를 팔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명이 최근 청화백자 납품가격을 올리고 있어 새로운 공급망을 개척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스타프의 말을 들은 소년왕 세바스티앙 1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섭정을 거치며 정치수업을 나름 엄격하게 배웠기에 그도 돌아가는 판세를 대충이라도 읽을 능력은 있었다.
“흐음. 조선이라! 그대의 말이 일리는 있소. 명이 청화백자를 독점 공급하고 있으니······. 값을 올려달라고 횡포를 부리면 방법이 없지!”
“강화도라는 섬을 개방하고 그 섬에 천주신자를 위한 성당도 만들어 주겠다!”
세바스티앙 1세는 이균이 보낸 친서를 다시 천천히 읽어보았다.
이균의 친서는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위해 강화도를 개방하고 천주교를 독실하게 믿는 그들을 위해 성당도 만들어주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조선의 국왕이 어떤 자요?”
명나라로부터 마카오를 얻기까지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걸렸는데, 조선의 국왕이 자신들과의 교역을 위해 항구를 개방하고 또 신앙심이 두터운 포르투갈인들을 위해 성당까지 만들어주겠다고 하니 세바스티앙 1세는 자못 조선의 국왕이 어떠한 자인지 궁금해졌다.
“이제 갓 보좌에 오른 어린 왕입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답지 않게 담대하고 야망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어린 왕이라!”
조선의 왕도 자신처럼 나이가 어리다는 말을 들은 세바스티앙 1세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이균에 대해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그를 둘러싼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며 거대한 제국을 이끌어야 했던 그는 어린 조선의 왕의 고충을 알 것만 같았다.
“좋소. 도자기 공급처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 나쁠 것이 없지 않겠소. 조선과 통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시오!”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이득을 챙기고 있던 포르투갈은 명, 왜에 이어 조선과도 통상을 하기로 결정했다.
명나라의 그것에 비추어 손색이 없는 조선 청화백자를 구입해 유럽에 팔면 막대한 이문을 남길 수 있기에 조선과의 교류를 피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오랜만에 육지를 밟은 구스타프 상단의 선원들은 리스본에서 흥청망청 돈을 쓰며 환락의 시간을 보냈다.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는 매일 거대한 상선과 군함이 드나들며 신대륙 그리고 아시아에서 싣고 온 진귀한 물건이 가득했고, 돈이 넘쳐났다.
목숨을 건 항해를 무사히 마친 선원들은 목숨값 대신 받은 두둑한 급여를 가지고 술과 여자를 사 환락의 시간을 보냈다.
흥청망청 돈을 쓰며 그들을 유혹하는 늘씬한 미녀들과 뜨거운 밤을 보낸 그들은 어느덧 천국의 맛을 뒤로하고 다시 먼 바다로 출항을 준비했다.
구스타프 상단의 상선들도 다시 아프리카, 인도, 말라카 등을 거쳐 마카오, 그리고 조선으로 향하는 긴 항해를 준비하기 위해 선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구스타프 상단이 조선에서 청화백자를 구입해 꽤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상단의 상선들도 마카오에 들르는 김에 조선에 가 직접 청화백자를 확인해보기로 하고 출항을 준비했다.
그리고 며칠 후 수십 척의 거대한 갤리온선이 커다란 십자가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돛을 펼치고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는 바다를 향해 출항했다.
갑판에 올라 점점 멀어져 가는 환락의 도시 리스본을 바라보는 선원들의 마음은 착잡했다.
살아 돌아와 또다시 짙은 화장으로 그들을 유혹하는 여인의 젖가슴을 품을 수 있을지 아니면 거친 바다의 제물이 되어 고기밥이 될지 아무도 그들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었다.
구스타프 상선의 주선인 산타리나호에는 예수회 소속의 신부 3명과 수녀 10여 명이 타고 있었다.
조선이 포르투갈 상인과 선원들을 위해 강화도에 성당을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하자, 포르투갈 왕 세바스티앙 1세는 예수회 소속 신부와 수녀들에게 조선으로 가라 명했고, 그들은 두려움 없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조선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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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전혀 다른 섬이 되어 있었다.
대형 갤리온선 수십 척이 입항할 수 있도록 커다란 선착장이 만들어 진 지 오래되었고, 섬 주변에는 유럽에서 건너온 선원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여러 숙박시설 등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서양식 건물, 병원 등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강화도 중심부에 이균이 약속한 성당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신앙을 중시하는 포르투갈인들은 직접 건축가들뿐만 아니라 성당을 만드는 데 필요한 대리석, 벽돌 등을 가지고 와 커다란 첨탑을 가진 웅장한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이국적인 건물의 모습에 강화주민들은 너도나도 몰려들어 성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완성되기도 전에 성당은 강화도의 명물이 되어 있었다.
강화도는 포르투갈을 위해 완전히 개방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카오처럼 그들에게 완전히 영토를 넘겨준 것은 아니었다.
강화도는 도성으로 향하는 관문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을 이균도 잘 알고 있기에 강화도를 그들에게 넘겨줄 생각이 애초에 없었고, 오히려 포르투갈인들이 왜놈들처럼 반란을 일으켜 강화도를 차지하려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강화도 곳곳에 요새를 만들어 포대를 설치하고, 수군을 증강 배치했다.
선착장에는 거대한 크기의 갤리온선 수십 척이 정박하여, 일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조선의 청화백자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청화백자를 만들어내는 도공들의 우두머리인 이준기와 그 도공들은 포르투갈 상인들이 요구하는 청화백자를 만들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의 매일 밤샘 작업을 하며 청화 백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지만, 조선 자기의 가치를 확인한 포르투갈 상인들은 엄청난 양의 청화백자를 주문했고, 조선 도공들이 모두 모여 밤샘 작업을 하며 청화백자를 만들어 내도 그들이 주문하는 양의 청화백자를 만들어 내기 빠듯했다.
게다가 왜에서도 꾸준히 막사발과 자기를 주문하고 있어, 밥을 제대로 먹을 틈도 없이 자기를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피곤하지 않았다.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왔던 그들이었는데, 이제 그들은 왕의 인정하에 제대로 된 대접을 받으며 교역의 선봉장이 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사람대접을 받으니 몸은 고단해서 신명이 났다.
강화도를 포르투갈에 개방하고 그들에게 청화백자를 팔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꽤 많은 은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균은 포르투갈 상선의 입항비로 금화나 은화를 따로 받았으며, 청화백자를 판매한 수익까지 합치니 그 수익은 꽤 큰 것이었고, 조선에 돈이 돌기 시작하니 이균이 원하던 것처럼 자생적으로 상인 조직이 발생하고,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하는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의 정도에는 영세한 수준이지만 꽤 큰 상단이 나타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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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전하께서 이 나라의 근간을 흔들고 있습니다.”
“조선이 오랑캐의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우의정 노수신의 저택에 모인 무리들이 격앙된 목소리로 소년왕의 전횡을 성토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자를 섬기며 유교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했던 조선을 급격히 변화시키는 어린 왕 이균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야심한 밤에 우의정 노수신의 저택에 모인 이들은 당대 성리학의 최고 학자 중의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기대승을 비롯하여 조식과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골수 성리학 근본주의자 김효원, 인순왕후 심씨의 동생으로 이균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간주돼 제거된 심통원과 친족지간인 심의겸, 그리고 이황의 문하에 있던 유생들이었다.
“대감! 이대로 있다가는 조선은 양이들의 나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주자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심의겸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우의정 노수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특히 이균에 적개심이 가득했다.
명종의 정비 인순왕후의 작은 할아버지 심통원에게 역적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탐라에 유리 안치시켜 자칫하면 심씨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지켜본 그로서는 이균은 집안의 원수와 같은 자였다.
“흐음. 사서삼경에 통달했던 전하가 어찌 저리되었는지······.”
우의정 노수신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오랜 유배 생활을 끝내게 해준 것은 이균이었고, 또 그를 우의정 자리에 앉힌 것도 이균이였기에, 그는 이균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노수신도 골수 성리학 근본주의자였기에, 그는 이균이 성리학을 받드는 이상적인 군주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이균은 양이들과 통상하며 성리학을 배척하니, 그의 기대감은 곧 커다란 실망감과 허탈함으로 바뀌었다.
“전하께서 도대체 무엇을 하시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요즘은 경연도 거의 나오지 않으시고, 남만국 상인들이 가져온 요상한 서책만 보고 계신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한때 이균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기대승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기대승은 명종 13년인 1558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지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그도 이황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흡수한 성리학 근본주의자였다.
그는 스승인 이황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주리설 그리고 주기설 논쟁을 벌일 정도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 이균이 왕으로 즉위하자 전한에 임명되어 그의 학문연마를 도왔다.
그 역시 영민한 이균이 성리학을 받는 군주가 되기를 원했으나, 경연에 참여하지 않고 성리학을 멀리하는 이균에 큰 실망감을 드러냈다.
“흐음. 율곡은 왜 그렇게 변한 것이오. 왜에 다녀온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소!”
천재 성리학자로 사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율곡이 왜에 다녀온 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자 노수신은 큰 실망감을 보였다.
“대감. 율곡은 변절자이옵니다. 율곡뿐만이 아니라 이준경 대감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변절하였습니다.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다. 전하를 이대로 두면 조선은 망하고 말 것이옵니다. 역성혁명이라도 일으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심의겸의 입에서 역성혁명이라는 말이 나오자, 노수신을 비롯한 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