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청화백자를 유럽으로!(2)
어린 조선의 왕이 포르투갈을 위해 강화도를 완전히 개방하겠다고 하자 구스타프는 감동을 받았다.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동아시아 거점기지로 삼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지만, 명나라로부터 마카오를 얻기까지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했다.
오랜 몽골족의 지배를 물리치고 명을 세운 주원장은 농민군 출신으로 본질적으로 상업에 대해 적대적 입장을 취했다.
아마도 원나라 말기 물가 상승과 통화 팽창으로 자신과 같은 농민들이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었는데, 상인들은 부를 독점하며 횡포를 부리던 혼돈스러운 시대의 뼈아픈 고통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을 통일한 주원장은 조공무역 이외에 대외무역을 엄격히 제한하는 쇄국 정책을 펼쳤고 그로 인해 한동안 도자기 무역도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문을 걸어 잠그며 무역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하더라도 유럽은 명나라의 도자기를 강렬히 원했고, 유럽 국가들은 밀무역을 통해서라도 도자기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명나라의 청화백자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청화백자의 가치는 더욱 치솟았고, 청화백자를 어렵사리 구하기만 하면 향신료를 통한 교역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주기에 유럽은 어떻게 해서든지 명과의 교역망을 개척하려 노력했다.
그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국가가 포르투갈이었다.
이미 동남아의 해상 교역망을 장악한 그들은 이제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막대한 이문을 남겨주는 도자기와 비단을 포기할 수 없었던 포르투갈은 끝없이 명에 통상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명은 좀처럼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포르투갈도 포기하지 않고 중국 광동 지역에 몰래 잠입해 밀무역을 하며 기회를 보고 있었다.
이에 명은 군대를 동원해 포르투갈 선단에 대한 무력공격도 서슴지 않았으나 오히려 명나라가 밀무역을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밀무역의 규모는 더욱 커져만 갔다.
결국, 명나라 중기 이후에는 중국 남동부 지역에 도자기, 비단 등 사치품 밀무역을 바탕으로 한 거대한 무역 시장이 형성되어 포르투갈 등 유럽 상인뿐만 아니라 중국 상인들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어 명나라 정부가 아무리 단속을 해도 막아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오히려 명나라 정부의 단속은 그 시장이 암시장처럼 되어 물가를 상승시키는 역효과만 내었고, 결국 명 조정은 차라리 포르투갈에게 마카오를 떼어주고 그곳에서 교역을 허락하는 것이 관리하기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명은 광저우 앞바다에 위치한 마카오에 포르투갈 상인들의 거주를 승인하고, 그들과의 교역을 허가했다.
물론 마카오에서의 교역이 명나라로부터 정식적인 공무역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나, 사실상 교역허가를 받은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중심으로 도자기, 비단 등을 구입해 유럽에 되팔면서 막대한 부를 쌓아갔다.
그렇게 수십 년에 걸쳐 명나라 조정의 탄압을 참아내며 어렵사리 마카오를 확보하게 된 것인데, 조선의 소년왕이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하니, 명나라와 태도가 전혀 다른 조선의 대우에 구스타프는 감동을 먹었다.
일꾼들이 조선이 처음으로 수출용으로 만든 청화백자를 조심스럽게 갈레온선으로 옮겨 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청화백자를 가득 실은 갈레온선이 바다를 향해 출항했다.
이균은 파도를 가르며 힘차게 출발하는 갈레온선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조선의 청화백자가 유럽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이균은 자못 궁금했다.
중국이 선점하고 있는 청화백자 시장에 후발주자 조선의 백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을지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야심차게 준비한 청화백자가 유럽에서 별다른 반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청화백자 수출을 기반으로 한 그의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다.
갈레온선은 어느덧 먼 바다로 나아가 이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청화백자를 가득 실은 갈레온선은 그들의 동아시아 무역 거점 기지인 마카오에 들러 긴 항해를 견딜 식량 등 보급품을 충당하고 인도의 고어를 거쳐 아프리카를 거쳐 리스본으로 향하는 긴 항해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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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경매 시장
미지의 세계 동아시아에 진귀한 물품을 가득 실은 구스타프 상단의 상선 산타리나호가 리스본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포르투갈 제국의 수도리스본은 술렁거렸다.
긴항해 도중 상선 2척이 풍랑을 만나 좌초되는 시련이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조선의 청화백자를 가득 실은 갈레온선은 좌초되지 않고 무사히 리스본 항에 도착했다.
유럽인들에게 명나라는 청화 백자, 비단 등 진귀한 물건이 가득한 신비로운 세계였다.
긴 항해 동안 막대한 비용이 들고, 거친 파도를 만나면 선박이 침몰하며 선원들이 죽어 나가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진귀한 물건이 가득한 배 한 척이라도 살아 돌아오면 동양의 진귀한 물건을 비싼 가격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남겨 주기에 유럽인들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확천금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바다에 나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산타리나호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내놓으라 하는 유럽 왕가의 대리인들이 리스본으로 와 동양의 진귀한 보물을 살펴보았다.
그중에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역시 명나라의 청화백자였다.
유럽 왕실과 귀족들은 명나라에서 온 진귀한 보물 청화백자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둔탁하고 두꺼운 석기나 아니면 형편없는 재질의 마욜리카만을 사용하던 그들에게 청아한 소리를 내며 잘 깨지지 않고 하얀 바탕위에 신비로운 청색 그림이 수놓아 있는 청화백자는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유럽 왕실은 앞 다투어 청화백자를 사들여 그들의 호사스러운 궁전, 거실 등 실내에 청화백자를 장식해 놓았다.
얼마나 많은 진귀한 청화백자를 장식해 놓느냐가 왕실의 부유함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정도로 청화백자는 유럽에 도착하자마자 왕실과 귀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구스타프, 청화백자는 가득 가져온 겐가?”
왕실의 대리인들은 구스타프 상단이 얼마나 많은 청화백자를 가져왔는지 궁금해 하며 그들이 선적해 놓은 물건 주위에 몰려들어 기웃거렸다.
“오늘은 새로운 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보시지요! 조선에서 온 청화백자입니다.”
구스타프가 밝게 웃으며 조선 강화도에서 가져온 청화백자를 왕실 대리인들에게 보여주었다.
“명나라가 아니고 조선? 조선이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가?”
목숨을 걸고 동아시아까지 가서 명나라의 진귀한 청화백자를 마다하고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조선이라는 나라의 청화백자를 가져왔다는 구스타프의 이야기를 듣자 유럽 왕실의 대리인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명나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한번 보시지요. 명나라의 청화백자에 절대로 뒤지지 않는 자기입니다.”
그러나 구스타프는 입 꼬리를 치켜세우며 상자를 열고 청화백자를 조심스럽게 꺼내 왕실의 대리인들과 귀족들의 재정 담당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에이. 청화백자는 명나라에서나 만들 수 있는 진귀한 물건인데, 어찌 조선이라는 듣보잡 나라에서 그런 보물을 만들 수 있다는 건가?”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 있어 청화백자는 명나라만이 만들이 있는 고귀한 사치품이었다.
그런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듣보잡 나라에서 청화백자를 만들었다고 하니 그들은 그런 구스타프의 말을 믿을 수 없었고, 설령 만들었다고 해도 품질이 형편없는 도자기일 것이라 여겼다.
“에이. 물건도 보지도 않고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쓸데없이 목숨을 걸고 먼 바다를 건너 쓸모없는 물건을 가져오겠습니까?”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왕실의 큰손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떠나려 하자, 구스타프는 일일이 그들에게 청화백자를 손에 쥐여 주며 그들이 떠나지 못하게 했고, 그제야 그들은 마지못해 조선의 청화백자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동양의 신비로운 청화가 그려져 있는 접시를 두드려 보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필 것 같은 매화가 그려져 있는 자기를 음미하듯 쳐다보기도 하며 왕실의 대리인들은 청화백자를 살펴보았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그들의 눈빛은 점차 예사롭지 않게 빛나기 시작했다.
“구스타프, 이것이 정말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온 자기란 말인가?”
청화백자를 손으로 매만지던 프랑스 왕실의 대리인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구스타프를 바라보았다.
붓 자국이 거의 보이지 않고 마치 수채화를 그려 넣은 것 같은 아름다운 그림, 그리고 깔끔한 자기의 표면!
영락없는 명나라의 청화백자였다.
도화서의 화원들이 혼을 담아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어서 그런지 오히려 명나라의 그것보다 더 예술성이 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구스타프가 조선에서 온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면 명나라의 청화백자로 믿을 지경이었다.
“하하하! 어떻습니까? 명나라의 청화백자보다 더 뛰어나지 않습니까?”
구스타프의 예상이 적중했다.
직접 조선의 청화백자를 본 유럽 왕실과 귀족들을 대리해 경매에 나온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조선이라는 듣보잡 나라에서 명나라 황실이 품질을 보장하는 청화백자보다 뛰어난 자기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조선에서 만든 자기라는 말에 시큰둥했던 이들은 어느새 조선의 청화백자의 매력에 홀딱 빠져 있었고, 수많은 이들이 구스타프가 내놓은 청화백자 곁으로 모여들었다.
잠시 후 리스본에 처음 선보인 조선의 청화백자에 대한 경매가 시작되었다.
명나라 자기에 못지않은 예술적 가치를 확인한 유럽 각 왕실과 귀족의 대리인들은 흥분하여 호가를 높여가며 앞 다투어 조선의 청화백자를 사들였다.
조선의 청화백자가 높은 호가로 인기리에 팔려나가자 이를 지켜보고 있는 구스타프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조선의 청화백자는 단 몇 시간 만에 모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왕실과 귀족들에게 팔려나갔고, 곧 조선이라는 나라가 명나라 것 못지않은 뛰어난 품질을 가진 청화백자를 만들어낸다는 소문이 온 유럽에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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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가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왔습니다!”
“들라하라!”
조선의 청화백자로 큰 수익을 낸 구스타프는 입 꼬리가 잔뜩 올라간 채 이균이 직접 쓴 친서를 가지고 그들의 왕 세바스티앙 1세를 만났다.
세바스티앙 1세는 주앙 3세의 4남 주앙 마누엘과 에스파냐왕 카를로스 1세의 딸 후아나의 소생으로 추기경 돈 엔히크의 섭정을 갓 벗어난 소년 왕이었다.
왕이라고는 하나 이제 갓 섭정을 벗어났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와 같았지만, 그는 야망이 큰 인물이었다.
이미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인도의 고어, 말라카, 마카오 등을 연결하는 거대한 항로를 가진 대해양대국을 건설한 유럽의 패권 국가 중의 하나였지만, 담대하고 모험심이 강한 세파스티앙 1세는 보다 큰 미지의 세계를 원하고 있었다.
특히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이교도를 지중해 주변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다.
그는 먼 훗날 십자군을 다시 조직해 백마를 타고 선두에 나서 사악한 이교도 집단을 괴멸시키고자 하는 꿈을 꾸었고, 실제로 그는 거대한 십자가가 펄럭이는 깃발을 앞세워 모로코 원정에 나섰으나 이슬람 군에 참패하고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그의 비참한 운명을 아직 알지 못하는 세바스티앙 1세는 강렬한 눈빛으로 구스타프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조선 국왕의 친서를 가지고 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