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2)
포르투갈의 갤리온선이 강화 앞바다에 나타났다.
생전 처음 보는 요상한 배가 강화 앞바다에 출현하자 강화 주민들이 바닷가에 모여들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갤리온선을 바라보았다.
“저 배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명나라 배인가?”
“명나라에 저런 배가 없는데······.”
종종 명나라나 왜선을 본 적이 있으나 강화 앞바다에 나타난 요상한 모양의 배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저 배에 탄 사람들 좀 보게. 머리 모양하고 색깔이 어찌 저렇단 말인가? 꼭 귀신같구먼.”
어렴풋이 보이는 배에 타고 있는 선원들의 머리 색깔은 갈색, 금발, 그리고 빨간 머리로 제각각이었고 복장도 조선인이 보기에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어허. 나라가 망하려나 어찌 저런 요상한 배가 나타난단 말인가?”
강화 주민들은 갑자기 출현한 요상한 모양의 배가 신기하면서도, 큰 전란이 일어날 징조가 아닌지 하는 두려운 마음도 같이 들어 술렁거리며 혼란스러워했다.
일부 주민들은 피난을 갈 짐을 챙길 정도였다.
그러나 강화주민들의 우려처럼 전란은 일어나지 않았고, 갤리온선은 강화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머무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약 이틀 후 강화에 주둔하고 있는 수영의 판옥선 3척이 갤리온선으로 향했고, 요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약 20여 명의 무리가 판옥선에 옮겨 탔다.
“아이고. 머리가 왜 이리 꼬불꼬불 한 거야?”
“하하하. 그러게 옷은 왜 저 모양인가? 꼭 광대 같구먼!”
요상한 배에서 내린 선원들이 조선 수군과 함께 강화도 해안에 내리자, 강화 주민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갤리온선에서 내린 20여 명의 포르투갈 인들은 강화 수영에서 일주일 동안 머무르며 조선군으로부터 융성한 대접을 받은 후 판옥선을 타고 한강을 따라 도성으로 향했다.
그들은 마카오에서 명나라의 청화백자를 싣고 유럽으로 가 막대한 이익을 받고 파는 포르투갈 상단 구스타프 일행이었다.
그들의 주된 교역품은 청화백자와 중국 비단이었는데, 그들은 왜에도 들려 중국 비단, 서적, 청화 백자 등을 팔기도 해 오다 노부나가와 인연이 있었다.
포르투갈 상인을 주선해달라는 조선 통신사의 부탁을 받은 오다 노부나가는 이를 잊지 않고 구스타프 일행이 오와리국에 들르자 조선에 한번 가보라고 한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말을 듣기 전까지 그들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동아시아는 오로지 명나라와 왜만 있을 뿐, 조선은 교역할 물건이 아무것도 없는 미개한 나라일 뿐이었다.
조선이 중국 청화백자와 버금가는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는 오다 노부나가의 말을 처음 듣고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청화백자는 오로지 명나라만이 만들 수 있는 진귀한 물건인데, 명나라의 속국과 다름없는 조선이 그런 진귀한 물건을 만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에게서 조선에서 만들었다는 청화백자를 건네받고 생각이 달라졌다.
명나라의 청화백자와 비교해 손색이 전혀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자기였다.
명나라의 청화백자를 팔아 짭짤한 수익을 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청화백자를 독점 생산하고 있는 명나라가 판매 가격을 올리고, 어려가지 조건을 내걸며 갑질을 하고 있는 것이 짜증이 나고 있던 터였는데, 코발트를 값싸게 공급해주면 명나라와 같은 청화 백자를 충분히 공급해 줄 수 있다는 조선왕의 제안은 그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그러나 한강 변을 따라 보이는 엉성하게 볏짚과 흙으로 만들어진 움막과 같은 초가집들을 보며 이렇게 허접스러운 나라가 과연 명나라에서나 만들 수 있는 청화백자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고 그 의구심은 점차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도성도 초라해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웅장해 보이는 경복궁, 창경궁 등 궁궐이 도성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명나라의 자금성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해 보였고 육조거리 일대와 관료들이 사는 곳은 기와집이 꽤 있었지만, 도로 사정도 엉망이었고, 그들이 보기에 허름한 움막 같아 보이는 초가집이 도성에도 상당수가 있었기에, 명나라 그리고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고 있는 포르투갈의 수도의 화려함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어 보였다.
“과연 이런 나라가 청화백자를 만들 수 있는 것이 맞습니까?”
구스타프 상단의 선장 레오도르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구스타프를 바라보았다.
“흐음. 그러게 말일세. 아무래도 잘 못 온 것 같네. 그런데 노부나가 그자가 허언을 할 자는 아닌데······.”
구스타프도 조선의 형편없는 도성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일본의 떠오르는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가 조선이라는 나라가 명나라의 청화백자와 같은 청화백자를 저렴하게 만들 수 있으니 꼭 가보라는 신신당부가 귓가에 맴돌았다.
“흐음. 일단 도성까지 왔으니 조선의 왕을 만나보기나 하세! 그리고 판단해도 될 것이네.”
구스타프는 조선까지 왔으니 일단 왕이나 만나보자고 생각했다.
강화도를 거쳐 이왕 조선의 도성까지 왔으니 그냥 돌아가기도 뭐한 상황이기에 그로서도 왕을 만나보는 것 외에는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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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남만국 상단 입시이옵니다.”
“흐음. 들여 보내도록 하게!”
마침내 구스타브와 그의 수하 몇 명이 소년왕 이균 앞에 모습을 보였다.
요상한 모양의 옷과 긴 갈색 머리를 휘날리는 구스타프를 본 조선의 대신들은 그들이 무척 못마땅해 보였다.
이균의 영원한 지지자 영의정 이준경도 남쪽 오랑캐의 모습을 한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통신사로 왜에 다녀와 급변하는 세상을 몸소 확인한 율곡과 박순은 대신들과 다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전하! 이렇게 알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선왕이 이제 갓 즉위한 어린 왕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수염조차 제대로 나지 않은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구스타프는 다소 놀랐다.
‘아니 저런 무례한 놈이. 어찌 전하 앞에서······. 오랑캐 놈들은 어쩔 수가 없구나’
구스타프가 절대 지존 앞에서 고개만 까닥하며 인사하자, 조정에 모인 대신들은 혀를 끌끌 차며 술렁거렸다.
그러나 이균은 아랑곳하지 않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노부나가로부터 기별을 받고 온 것이겠지요?”
“그러하옵니다. 전하! 오와리국의 다이묘 노부나가님께서 조선이라는 나라의 자기 제조기술이 뛰어나니 꼭 한번 가보라 하여서 이렇게······.”
“그렇소. 조선은 능히 명나라가 만들어내는 청화백자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소. 다만 명나라로부터 들여오는 코발트 가격이 너무 비싸 많이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오. 조선이 청화백자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그대의 상단이 코발트를 공급해줄 수 있는 것이요?”
이균은 거두절미하고 그를 조선으로 부른 이유를 말했다.
청화백자의 원료인 코발트를 포르투갈 상단이 공급해주면 그들이 원하는 청화백자를 원 없이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다.
“전하! 저희는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교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깟 코발트는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습니다. 조선이 명나라에 버금가는 청화백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코발트쯤이야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습니다.”
구스타프가 다소 거만한 모습으로 말했다.
조선의 초라한 모습을 본 그는 아마도 조선이 최첨단 하이테크 기술을 자랑하는 청화백자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청화백자를 내오거라!”
그러나 이균은 구스타프의 거만한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관에게 이미 준비해둔 청화백자를 내오라고 지시를 내렸고, 왕의 지시를 받은 내관들은 발걸음을 조심조심하며 청화백자를 구스타프 일행 앞으로 가져왔다.
‘아니 어찌 경덕진에서 만들어진 크락자기가 조선에 있는 것인가?’
내관이 조심스럽게 가지고 온 청화백자를 본 구스타프는 충격을 받은 듯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고 그의 수하들도 당황스러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내관이 가지고 온 도자기는 명나라 최고의 도자기 산지인 경덕진에서 만들어져 유럽 각국에 수출되는 청화백자 즉 포르투갈 상인들이 말하는 크락자기의 모양 그대로였다.
순백의 백자 표면에 청색 빛깔이 나는 코발트 유약으로 마치 흰 종이에 수묵화를 그려 넣은 듯 한 얼핏 보아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청화백자가 그들의 눈에 펼쳐지자 그들은 진귀한 보물을 보는 듯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청화백자를 조심스럽게 만지며 살펴보았다.
흰 바탕의 백자에 파란색의 무늬가 절묘하게 어울리는 청화목단문항아리, 덩굴, 꽃, 연꽃잎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같이 그려져 있는 청화사계화초문팔각병, 두 마리의 봉황이 커다란 날개를 펴고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갈 것으로 보이는 청화쌍봉문반 등 명나라에서도 황실에서만 쓸 수 있는 고귀한 청화백자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전하. 이······. 이것이 정녕 조선에서 만든 것들이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선에서는 절대 청화백자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표정으로 거만하기까지 했던 구스타프는 언제 자신이 그랬냐는 듯 영롱한 청화백자에 감동을 받은 듯 떨리는 목소리로 이균에게 물었다.
“그렇소! 모두 조선에서 만든 것들이오. 어떻소? 명나라 자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 않소?”
이균은 도자기 제작을 책임지는 도공 이준기에게 명나라에서 가장 고귀하게 여기는 청화백자를 특별히 신경 써서 제작할 것을 명했고, 지엄한 어명을 받은 이준기는 수많은 도공, 그리고 도화서 제일의 화원들과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해 명나라 자기와 비교해 손색이 없는 청화백자를 만들어 냈다.
“전하! 그렇사옵니다. 조선이 이토록 뛰어난 청화백자를 만들다니······. 감탄스러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구스타프가 직접 본 청화백자의 품질은 단순히 명나라 청화백자를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더 뛰어나 보이기까지 했다.
청화백자는 순백의 백자에 푸른 색깔의 코발트 유약을 붓으로 수묵화를 그리듯 그리는 것이기에 처음 붓을 댄 부위는 청화가 진하지만 갈수록 연해져 그럴 때마다 다시 유약을 묻혀 그림을 그려야 했기에 잘못 그림을 그리면 전체적으로 그 그림이 얼룩덜룩하고 지저분하게 보이게 된다.
그런데 이균이 보여준 조선의 청화백자는 이러한 붓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고 동일한 색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여 자연스러운 농담까지 표현되어 그야말로 한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 같았다.
오히려 명나라의 청화백자보다 더 깔끔한 마무리가 돋보이는 걸작이었다.
조선에서 제일가는 실력을 갖춘 도화서 화원들은 물기를 많이 흡수하는 큰 붓을 사용하여 백자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큰 붓이 코발트 안료를 한 번에 많이 머금게 되어 덧칠할 필요 없이 동일한 색채를 유지하며 자연스러운 농담의 표현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 기법은 이미 명나라에서 개발된 기법이지만 도화서 화원들은 이균의 명을 받들어 보다 코발트 안료를 오랫동안 머금을 수 있는 큰 붓을 개발하여 청화백자에 그림을 수놓은 것이었다.
조선 제일의 화원들은 코발트 안료를 오래 품을 수 있는 그들이 개발한 붓으로 테두리를 짙은 청화로 그린 뒤, 물로 농담을 조절해 옅은 색으로 안쪽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붓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은 완벽한 수채화와 같은 분위기를 재현한 것이다.
“어떻소. 그럼 이 정도의 자기라면 그대들의 나라에서 충분히 사 갈 수 있겠소?”